홍제동에 백불이 있다는 곳에 갈려니 서울 시내라 어디인지 짐작이 가지않는다. 우선 가까운 지하철부터 찾으니
홍제역부근이다.
우선 홍제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 배가고파 점심을 먹기로 한다.
점심때가 가까운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경우가 생긴거 같다.
우선 식당을찾으니 입맛에 맞는곳이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분식집에서 식사를 시켜놓고 차분히 갈곳을 휴대전화로 검색하고 가는 옥천암에 전화를 해보고
여러가지 궁리를 했다.
서울 이라는 지역에서 헤맬까 보다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동선을 편하게 하려다보니 여러가지궁리를 한것이다.
간단한 팥죽을먹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양반이 길을모른다.
하긴 이 넓은 서울의 한귀통이를 어찌 다 알겠는가 할수없이 옥천암에 전화를 연결해서 겨우 찾아갔다,
걷기에는 초행이라 부담스러워 택시를 탔는데 걸으면 20여분거리다.
옥처암 개울가에 위치한 백불은 해를맞으며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가까이에서 바로앞의 장소가 비좁아
몸을 누여도 제대로 보지 못하겠고 또한 그물을 쳐서 얼굴또한 잘 뵈지 않는다.
멀리서 왔는데 어찌 이렇게 보고만 갈수 있는가 아쉬움만 가슴에 가득묻고 있다.
보도각백불은 홍지문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절인 장의사(藏義寺)의 경내로 추정되나 현재는 옥천암이라는 작은 암자만 남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하는 왕실과 관련된 관음보살 도량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성취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때문에 서울 근교는 물론 부산이나 대구 등지에서도 찾아와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문화재청>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 경내의 거대한 암석에 새겨진 높이 5m의 마애불로 ‘백불(白佛)’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 불린다. 현재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면을 모두 개방한 각(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하였으며, 조선 후기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복을 빌었는데 이때부터 하얗게 칠을 하였다고 한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팔꿈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비교적 둥근 얼굴은 눈이 가늘고 입이 작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은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옷주름은 선이 깊지는 않지만 신체 전반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로서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석불(石佛)은 높이 10m 이상의 거암(巨岩)에 새긴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다. 이곳은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장의사(藏義寺)가 있었으며, 불암(佛岩)으로 일컫는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高麗時代)로 추정된다.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 석불에 기원을 했으며, 고종(高宗)의 어머니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 부인(夫人)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아드님의 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 하얀 부처님인 백불(白佛)이 새겨진 바위는 보호각(保護閣)으로 지은 보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