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 성지
지닌 3월초 수지성당 여성 Cu. 간부들은 야외행사를 위하여 여사울 성지를 답사하였다.
소재지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36-10 에 위치한 아주 조용한 농가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여사울 성지는 충청도에서 활발히 천주교의 못자리 중심이었던 내포지역에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의 생가 터를 위시하여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특히 합덕 솔뫼, 신암 여사울, 합덕 신리 공소와
구합덕 성당, 해미 순교지, 홍주 감영터, 당진 신평성당, 아산 공세리 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 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 충남 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 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하였다.
여사울 성지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성지 입구의 원래 성지 성당이었나 봅니다.
소박한 시골 성당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성당쪽에서 내다본 성당입구

성당 오른쪽으로 성모님 상이 있습니다
바로 뒤에 새로 지은 성지 성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주 의연하게 천주교회 하고 뽐내고 있네요


성당을 내려서니 바로 옆이 성지입니다

성지의 표지석

이존창 루도비코 유적비

성지 성당입니다.
스페인풍의 아주 이색적인 설계로 지어진 성당이었습니다

아주 예쁜자태의 성당이지요?

여러 각도에서 찍어봤습니다.
창문의 문양을 보십시오

대성전입니다.
제대 오른편에는 여사울 출신 및 거주 순교자의 순교장면 그림과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진 판넬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성당 입구의 성수대와 예수님 상
아주 소박합니다

한쪽의 안내 데스크

성당 밖의 회랑의 끝. 멀리 성모님 상이 보입니다


야외 제대 옆으로 십자가의 길 언덕이 있는데
시간 관계로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성모님 상

야외 제대와 십자가

성당의 복도와 회랑, 아주 이국적이죠?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맥시코의 어느 갑부집의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윗층입니다

복도의 끝과 천정의 채색 유리등
어느것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밖에서 보이는 창문과 덧문의 소박한 아름다움

성당의 옆면입니다

이 사진은 최근에 다녀온 분의 사진을 켑춰한 것입니다
십자가 뒤의 언덕에서 찍었네요

녹음이 짖어 초록색 옷을 입으니 더욱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 했군요


성지 표지석과 이존창 유적비가 바라다 보이는 성당의 전면입니다
여사울 성지와 이존창 생가터(충청남도 기념물 제 177호)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은 유교적 신분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 수도 있고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상민도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정치의 부패와
착취는 더욱 더 심해져서 백성들은 압제에 시갈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 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 계통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이어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그 중심에 내포 출신 이존창이 있었다.
'내포'(內浦)란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거래되면서 충청 북부의 수운(水運)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포구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하였던 곳으로 전통적 양반의 사족(士族)에 맞먹는 신흥 양반 세력이 성행했던 지역이었기에
타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한양과 가까운 거리상의 이점으로 인하여 교류가 활발하다보니,
새로운 사조(思潮)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내포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어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은 천주교의 수용 뿐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점과 구한말과 일제통치
하에서의 구국투쟁에서도 드러난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양인 신분으로서 성호의 제자이자 양명학자였던 이기양(李基讓)에게서 수학하다가
경기도로 가서 역시 같은 학통인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결국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도 다 이러한 내포의 사상적
특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와 내포
충청도에는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최대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불뤼, 오메트르, 위엥 등 파리외방선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거처하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나중에 제 5대 교구장이 된 다불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순교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순교사의 편찬이다.
그는 1857년부터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유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서
후세의 귀중한 사료를 탄생시켰다.
1874년 샤를르 달레 신부가 편찬한 "한국천주교회사"는 이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여사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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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찾아가고픈 아름다운 성지가 하나 추가되었어요^^
와, 22분의 성인,복자,순교자 분들이 나신 곳이네요.
여사울..성지 이름도 어찌그리 예쁜가요.
참말 스페인풍의 성당이 멋집니다..조런 창문의 덧문을 무지 좋아하거든요.
언젠가 여사울의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길 기도합니다.
멋진 사진..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