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한 산골 마을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일곱 명의 프랑스인 수도사와 한 명의 의사가 겪은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1996년 일곱 수도사들이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모두 살해된 사건을 다룬다. ‘티브히린 프랑스 수도사 살해사건’ 10주년을 추모하며 2006년에 다시 프랑스 언론이 이 사건을 재조명하자, 1990년대 후반 젊은 프랑스 영화를 이끌던 한 사람인 자비에 보브와 감독이 연출을 맡아 2010년에 완성하였고, 그 해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개봉 당시 4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며 300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이기 때문에 이 영화가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가톨릭 수도사들의 행적을 다루고 그레고리안 성가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노동과 가난, 봉사의 의무를 삶으로 체화한 늙은 수사들의 일상과 사건을 영화가 다룬다고 해서 이 영화를 종교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가둘 수는 없다.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인간적인 나약함 앞에서 신념을 지켜나간다는 것의 의미, 이상과 현실이 괴리를 가져올 때 그 갈등을 이겨내는 방식,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한 고뇌의 과정, 용기와 헌신을 지속하게 하는 어떤 힘의 존재에 대해 사유케 하는 매우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은 수도원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시작한다. 수도사들은 가난한 알제리 마을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고민을 들어주며 이슬람 축제에 참석해 마을남자들과 함께 가톨릭과 이슬람식 기도를 나누고 대화한다. 수도원에서는 악기 없이 소박한 성가를 부르고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공부하며, 밭을 경작하여 자급자족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을 이어간다.
어느 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도로 작업장의 인부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평화롭던 마을은 위기를 맞는다. 의사가 있고 마을사람들을 치료할 최소한의 약을 구비하고 있는 수도사는 테러리스트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공간이다. 이에 수도사들은 프랑스로 귀환할지 남아서 수도원과 마을을 지킬 것인지 목숨을 내건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다.
초반부, 다큐멘터리처럼 수도원과 수도사의 일상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이 담아내던 카메라는, 폭력사태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수도사 개개인의 내부로 들어간다. 선택 앞에 놓인 인간이라는 철학적 질문, 그들의 회의와 고뇌, 그리고 신념이라는 추상적인 관념들은, 카메라가 고요하게 수도사의 뒤를 쫓고 그들의 사소한 표정과 몸짓을 포착하며 얼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자 구체적인 그림으로 형상화된다.
영화는 단순한 수도사들의 생활을 닮아 미니멀리즘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카메라를 채택하다, 중반부 이후 내면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이로써 카메라는 다이내믹한 움직임의 변화를 보인다. 개인의 고뇌와 선택, 믿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긴박감 넘치는 촬영술과 편집리듬을 총동원하여 당시의 화약고 같은 갈등의 순간들을 재연해낸다.
이 영화의 미덕은 수도사들을 진부한 틀 안에서 낭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짧게나마 정치적, 역사적 언술을 새겨 넣으면서 수도사들의 비극이 개인에게 불어 닥친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강조한다.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학교 교장의 입을 통해 전달되거나,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대장과 수도원의 리더 수도사가 잠시나마 서로를 동정하는 장면, 수도원을 겨냥한 어느 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머신 건, 알제리 정부군 역시 무자비하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수도사의 꾸짖음 등. 이와 같은 상징적인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수도사들을 사회와 괴리되어 순수한 봉사심으로 살아가는 초인간으로 박제화시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수도원과 사회를 연결짓고, 그들의 결단과 역사적 속죄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 수도사의 인간적 흔들림에 집중한다.
미스터리물처럼 긴장감 넘치는 연출의 힘, 얼굴의 미세한 근육의 떨림만으로도 갈등과 고뇌를 전달하는 노배우들의 열연, 그레고리안 성가의 경건한 아름다움, 풍경과 인물에 대한 시적인 묘사 등등이 어우러져 이 작품은 종교적 고뇌 후의 헌신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우아하게 엮어낸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신념으로 가득한 인간의 품위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다가 한밤에 수도원이 울리도록 울부짖으며 신께 답을 갈구하는 수도사, 치즈 한 덩어리의 선물에 기뻐하고 책 한 권이 반입되자 꼭 껴안고 아이처럼 설레하는 수도사, 적들에게는 카리스마를, 마을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서로에게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말없이 전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곧 불어 닥칠 자신들의 운명을 절감하고 나누는 만찬이다. 말 없이 의사 수사는 포도주 한 병을 가져오고 카세트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테이프를 끼운다. ‘백조의 호수’ 선율이 수도원을 감싸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행하는 최고의 사치다. 음악에 몰입되어 미소를 나누다가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는 최후의 결단을 다지는 순간이 얼굴에 스친다. 남자의 늙은 얼굴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짧은 클라이맥스의 커트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기를….
수도원 리더인 크리스티앙 역을 맡은 눈빛이 아름다운 배우는 랑베르 윌슨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많은 연기상을 거머쥐었는데, 브룩 쉴즈와 소피 마르소의 시대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몹시도 반가울 것이다. <라붐2>에서는 소피 마르소의 첫사랑 소년을 연기했으며, 브룩 쉴즈가 사하라 사막을 남장을 하고 횡단했던 영화 <사하라>에서 파란 눈의 무슬림을 연기했다. 이후 <매트릭스>에서도 열연했다.
침묵의 서언을 한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봉쇄 수도원을 다룬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가 2010년 초에 한국에서 조용히 흥행을 이어갔었다. 경쟁을 조장하고 빠르게 움직일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신과 인간>은 경건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 신이라는 존재가 가져다 주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2012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꼭 감상해야 할 귀한 영화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출신.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 또 다른 이의 영화 평론
"너희는 신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여느 대관들처럼 죽으리라." (시편 82, 6-7)
이것은 실화다! 1996년 3월,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알제리 산골 수도원 일곱 수도사들의 숭고한 선택!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실제 있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 수도사 살해사건’을 바탕에 둔 작품으로, 당시 알제리 정부군과 무장이슬람단체(GIA)와의 내전은 최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무장이슬람단체(GIA)가 자국 내의 모든 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자 알제리 정부는 이슬람교 지역의 티브히린에서 수도원생활을 보내고 있던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에게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하지만 수도사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음이 예견되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영화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하며 신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종교인이자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뇌를 드라마틱하고 깊이 있게 담고 있다.
삶의 자세와 신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숭고함의 극치! 알제리 아틀라스 산골의 나지막한 언덕에 조화롭게 둥지를 든 7명의 프랑스인 수도사들. 그들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율법에 따라 죽을 때까지 한 곳에 정착하여 기도와 독서,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을 실천하며 마을의 이슬람 형제들과 평화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알제리 정부군과 이슬람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 소용돌이는 수도사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수도사로서의 신념과 인간이기에 느끼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사이에 생긴 깊은 갈등의 골 앞에서 그들은 동요한다. 여생이 길지 않은 80대 의사 뤽에게 있어 수도원에 남는다는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아직 젊은 수도사 크리스토프에게는 자신의 희생이 진정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다. 그는 마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답이 없는 신을 향해 소리치며 고통스러운 내면의 갈등을 토로한다. 이처럼 <신과 인간> 속 수도사들은 종교인으로서 추구되는 절대적인 이상을 대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도 인간이기에 나약하며 그렇기에 극복하고자 애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군인들의 헬기 소리가 두려워서 더 크게 성가를 부르고 기도문을 버팀목 삼아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더욱 눈물겹게 다가온다.
수도사들의 삶을 조망하는 빼어난 영상과 아름다운 성가! 영화 <신과 인간>은 수도사들의 삶을 조망하는 빼어난 영상은 물론 스토리와 절묘하게 맞물려 영화 전반을 흐르는 아름다운 성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토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침묵을 추구하고 자연의 한복판에서 느린 호흡으로 조망하는 삶을 살아간다. 성전에서 하루 일곱 번의 기도를 하고 성찬에 들어가기 전 한 목소리로 “생명의 기운”을 노래한다. 특히 성가는 수도사들이 신 앞에 하나가 되어 함께 어우러지게 함은 물론 삶의 리듬과 기도 생활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이 엄격히 따르는 베네딕토 규율은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와 무엇이든 함께 나눌 것을 정하고 있으며 특히 전쟁이나 천재(天災) 등의 불안정하고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필수적으로 의료 지원과 경작 활동을 통해 얻은 수확물들을 이웃들과 나누며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정하고 있다. 모든 결정은 성당 참사회 회의소 안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하며 수도원장의 방에서는 1:1 개인면담을 통해 각 수도사들의 개인적인 고충을 나눈다.
영화는 이처럼 이른 새벽 성전으로 향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에서부터 묵상과 독서, 경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그들의 하루를 묵묵히 따라가는 다큐적 연출을 통해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수도사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는 몰입도를 높여주고 그레고리안 성가의 목소리는 장엄하며 절대 서두름 없이 조망하는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긴 공백의 미로부터 얻어지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느린 듯 하지만 전혀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영상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최후의 만찬에서 정점을 찍는다. 잔잔하게, 그리고 점차 장엄하게 흐르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선율 속에서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수도사 한 명 한 명을 클로즈업 하며 결연한 얼굴을, 흔들림 없는 눈 빛을, 그리고 마침내 그들 내면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또 다른 이의 평론
1996년 5월 21일 알제리에 있는 엄률시토회(일명 트라피스트회)의 7명의 수도자가 이슬람구국전선의 무장그룹(GIA)에 의해 처형되었다. 위 글은 무장한 알제리 반군 ‘산의 형제들’이 처음으로 수도원에 찾아왔던 1993년 12월 24일 성탄절 직후에 알제리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원장이었던 크리스티앙 신부가 작성한 <작별이 시간이 다가왔을 때>라는 유언장의 일부다.
크리스티앙 신부는 “이 잔인한 이별에서 하느님께서 이방인이 아니셨음을 알아주길”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특별한 순교자가 아님을, 이름도 없고 관심을 끄는 일도 없이 죽어간 많은 이들의 무참한 죽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이 다른 평범한 이들의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덜 가치로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순교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 죽음의 책임을 알제리인들에게 지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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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드 셰르줴 신부가 성무일도를 바치는 모습, 그리고 그의 유언장. |
나의 눈길을 아버지의 눈길 안으로 잠근다
무슬림 안에서 섬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가난과 노동과 기도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렸던 이들 수도자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영화가 한 편 만들어졌다. 자비에 보부아 감독이 만든 <신과 인간>(Of Gods and Men)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아틀라스 수도원 형제들의 삶은 사람과 하느님이 더불어 창조해 가는 드라마였다. 크리스티앙의 유언장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분께서 바라보시는 그대로 그분과 함께 바라보기 위하여, 나의 눈길을 아버지의 눈길 안으로 잠근다”라고. 그러니 그는 그분과 더불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았다.
트라피스트회에 속한 알제리 티비레네의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은 철저한 관상수도원이다. 그러나 사실상 수도원은 수도원 안에만 있지 않았다.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알제리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며,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알제리에게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아무도 알제리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수 없었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관공서와 타협 끝에 남아 있었지만, 자기 소유의 360ha의 땅을 국가에 넘겨주고, 남은 14ha 중에서 경작이 가능한 10ha 안에서 야채밭과 과수원, 라벤더, 양봉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알제리 전체가 일종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주변은 온통 무슬림에 둘러싸인 채 외국인인 7명의 수도자들만이 그리스도교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도 아틀라스의 형제들은 자신의 삶을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그 본질적인 것이란 건물도 사업도 아닌 수도자들 사이에, 또는 무슬림 이웃들과 나누는 ‘형제적 친교’였다. 이를 두고 크리스티앙 신부는 “오로지 믿음만이 우리의 생존과 현존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그 한계에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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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뤽 수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
비그리스도교적 분위기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그들은 수도원을 찾아오는 배고픈 이에게 물과 빵을 나누어 주었고,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수선할 것이 있으면 고쳐주고, 문맹인 이웃들의 서류를 대신 작성해주고, 편지도 써주었다. 수도자들은 가난한 무슬림 이웃들과 친구처럼 지냈으며, 차츰 무슬림들도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로 여기게 되었다. 뤽 폴 도 쉬에르 수사는 의사로서 프랑스 친구들이 보내주는 약으로 하루에 100명이 넘는 환자를 손수 돌보기도 했다. 뤽 수사는 그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환자는 군인도 반란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병자일 뿐. 여기서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늘 말해 왔다.
한 방문객은 아틀라스 수도원에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남겨두었다.
“도로에 소용돌이치는 흙먼지, 거대한 히말아야 삼나무 아래 일꾼 몇 사람이 정오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양치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산쪽으로 가지 않으려는 양떼들, 현관 앞에는 오래된 우물 하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그 시원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 때 신부님께서 나를 보시고는 서늘한 객사로 데려 가신다. 아틀라스 성모 수도원은 가난하고 소박한 수도승원이다. 어디를 보나 느껴지는 것, 만나는 것은 겸허함이다. 인위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지금 필요한 것만 있다. 그들은 사막의 변두리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잿빛 담벼락에는 정치 구호문이 지저분하게 나붙어 있다. 정원에는 <평화>라고 새겨진 흰색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비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실존이라는 순수한 영적 특성을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도주 창고를 개조해 만든 수도원 성당에서 공동기도를 알리는 종을 치면, 무슬림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일을 하는 무에친(Muezzin)은 무슬림들이 하루 5번 바치는 기도시간을 알린다. 이들은 이 종소리와 기도가 어떤 연대감 속에서 바쳐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이 기도는 이 지역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과 노동, 아픔과 기쁨을 끌어안는 기도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와 샤를 드 푸코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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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보부아 감독이 만든 <신과 인간>(Of Gods and Men), 2011 |
영화 <신과 인간>을 보면, 크리스티앙 신부의 책상 위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와 이슬람교의 경전 <쿠란>이다.
프란치스코는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 때 에집트의 술탄(왕), 말리크-알-카밀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이교도로 하여 잔혹하게 학살하곤 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태도를 복음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믿었다. 초기 300년 동안 교회는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사랑과 용서였기 때문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게 예수가 전해준 계명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전쟁 한복판에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적에게 찾아갔고,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했다. 그에게 유일한 규칙은 ‘복음’뿐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무슬림 문화를 존중했으며, 마호멧을 인정하고 술탄의 종교를 모욕하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같은 하느님을 숭배하므로 존경심을 표현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여행하면서 무슬림들이 저녁에 전능한 신을 찬미하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는 관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술탄에게서 선물받은 ‘뿔나팔’을 귀하게 여겨 간직했는데, 무슬림들이 정해진 기도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며 사람들을 모을 때 사용하던 나팔이었다. 이 뿔나팔의 종교적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자신이 사람들을 기도에 초대할 때도 이 뿔나팔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심을 표현한 것이다. 술탄은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태도에 감복되어 프란치스코를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보살펴주고 치료해주고 석방시켰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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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동기도>, 프랑코 콜론의 목판화. 아틀라스의 일곱 형제들을 기념하는 일곱 화판 가운데 하나. 1977년. |
크리스티앙 신부는 군복무 중에 알제리에서 자신을 변호해주고 대신 참수된 무슬림 친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알제리에서 첫 서원을 하면서 쿠란과 아랍어를 공부했다. 그는 무슬림의 종교심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늘 기도하는 그들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1979년에 참여한 <리바트 에사 살람>(Ribat es Salam, 평화의 끈)이란 모임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 회원들이 일 년에 두 차례 아틀라스에 모여 기도하고 명상했다. 이 가운데 한 수피(무슬림 수행자)가 어느 날 상징적인 그림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다. 한쪽에는 무슬림이 하느님께 올라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올라간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 가까워진다.”
아틀라스 수도원은 알제리에서 조심스레 토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수도원 객사 기도소에는 베르베르 양탄자와 달필로 쓴 쿠란 구절이 쓰여있는 패널을 걸어두었고, 때때로 주님의 기도와 마니피캇 등을 아랍어를 염송하기도 했다. 특히,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성무일도와 미사성제를 봉헌하기도 했던 장소인 성당에는 무슬림의 감성을 고려해 십자고상 대신에 프란치스코의 유명한 다미아노 십자가와 비슷한 십자가를 걸어두었는데, 십자가 아래서 마니피캇을 부르는 마리아와 심홍색 망토를 입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그리고, 명패에는 아랍어로 “그분은 부활하셨다”라는 구절을 새겨넣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앙 신부는 프란치스코처럼, 샤를 드 푸코 성인처럼 “주님, 저를 무장해제 시키시고 그들도 그렇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1993년 성탄절 전야에 수도원에 침입한 이슬람구국전선의 반군 ‘산의 형제들’이 크리스티앙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그냥 철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티앙 신부는 “여기는 평화의 집”이라면서 무기를 놓을 수 없으면 수도원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초대한다. 반군 대장인 알리가 의약품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다그치자, 크리스티앙은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약품밖에 없음을 알리고 거절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우리는 검소해요. 직접 키운 걸 먹고 살죠”하면서 코란을 인용하며 말한다. “쿠란을 아시죠? 믿는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 중에 사제와 수도사가 있을 것인데, 그들은 누추할 것이다.”
결국 대장 알리는 이날이 ‘평화의 왕자’인 예수가 탄생한 밤이란 걸 알고 사과하며 크리스티앙 신부와 악수를 나눈다. 이날 밤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자들은 이런 밤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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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에 걸린 십자가와 순교한 7명의 수도자들. 이들에 관한 책이 불휘출판사에서 200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을 편역한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창원시에 있는 데, 지난 수년 간 관상생활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과 더불어 수정만 STX유치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 표지사진 |
“이제 밤이 내리네, 탄생의 위대한 밤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스스로 드러내는 사랑뿐이네
모래와 물을 갈라놓으심으로 한낮에 거하실 이 땅을 하느님은 요람처럼 마련해 주셨네
밤이 내렸다네 팔레스타인의 행복한 밤이 아기 예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아기 예수의 성스러운 생명뿐이네
우리의 살로부터 살을 떼내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막을 영원한 봄의 땅으로 바꿔주셨네
밤이 내렸다네 기나긴 밤 속을 우리는 나아가고 이 장소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라 허물어진 희망의 이 장소뿐이네 우리들의 집에 들르신 하느님은 불이 떨어져 내릴 이 땅에 덤불을 마련해 주셨네”
우리는 순교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반군인 ‘산의 형제들’이 다녀가고 난 뒤에 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그중에는 “우리는 순교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군부가 장악한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신변을 보장할 수 없으니 프랑스로 떠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비록 종교적 신념은 달랐지만, 오랜 벗이었으며 보호자였던 수도자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 난 뒤에 찾아올 두려움을 호소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도 반군도 믿지 않았다.
연이어 외국인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수도자들도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산에 있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발간한 <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불휘 출판사, 2000)이라는 번역서에서는 당시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체험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작은 행동이 가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지 특히 우리가 그것을 매일 반복해야만 할 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목요일에 형제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한 번으로 지나가지요. 그러나 그것을 매일 반복해야만 된다면? 또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행해야만 한다면? 어느 날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한꺼번에 도매로 넘겼지요. 그러나 그분이 그것을 소매로 조금씩 가져가시려고 할 때는 몹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처럼 앞치마를 두르는 일은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진지할 수 있습니다. ... 반면에 그와 반대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쩌면 앞치마를 두르는 것만큼이나 쉬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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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크리스토프 르브레톤 신부가 갈등하며 기도하고 있다. |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얻은 자유
영원한 봄이 다시 사막으로 변할 것 같던 1996년 5월, 아틀라스의 형제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영화에서는 그 밤의 만찬을 위해 뤽 수사가 와인을 꺼내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식당에서 눈물과 웃음이 교차되면서 수도자들은 ‘천국을 위해 세상을 다 버린 자의 심정으로’ 평화를 만끽한다. 그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평화의 경계선을 찾아가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고백한다.
부패한 군부의 보호도 사양했던 수도자들은 이렇게 전한다. 자신들의 혼란과 약함을 고백하면서도, 믿음 안에서 희망의 지평을 발견한다.
“우리의 무력함과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권력에 기대지 않고 남과 교류하라는 권유이며 절박한 요구이다. 나의 약함을 알아야 남의 약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따라 남과 나를 견뎌낼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우리의 임무를 개선한다. 나약함 자체는 미덕이 아니지만 그것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세공되어야 할 우리 존재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도의 나약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신비와 영혼의 힘 속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무기력도 체념도 아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며 힘과 권력의 유혹을 고발함으로써 정의와 진실에 헌신토록 우리를 부추겨준다.”
수도원은 산과 평지, 국가 보안전투부대와 하느님나라를 폭력으로 강탈하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을 취소했다. 그들은 ‘꿋꿋한 희망의 문지기’로 끝까지 이곳에 머물기로 작심했다. 그들은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평화가 가능함을 증언하는 자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 인질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크리스토프 신부가 12세기 영국 순교자 토마스 베케트의 말을 적어서 성당 입구에 걸어놓은 말 그대로였다.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우연이 아니다. ... 참된 순교자는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태워 버림으로써 자신을 잃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찾은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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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아틀라스 수도원 원장인 크리스티앙 신부가 수도원에서 채취한 꿀을 시장 좌판에서 팔기 위해 나르고 있다. |
교회는 무슬림들을 존경하고 있다
크리스티앙 신부와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수도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화해의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한 것이다. 자칫 선언에 그칠 공의회 문헌을 생동하는 진리로 육화시킨 것이다. 공의회에서 반포된 <교의헌장>은 십자군전쟁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갈등을 종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교회 사명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교의헌장>은 16조에서 비록 비그리스도교인이라 해도 “누구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은 것을 행동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슬람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신실하고 그리스도교에 가깝다. 때문에 <교회헌장>에서도 이슬람교를 유대교 다음으로 하느님 백성의 서열에 두고 있다.
더욱이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는 “교회는 무슬림들을 존경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비밀한 결정에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 공경한다. 동정 성모님을 공경하며 때로는 그의 도움을 정성되이 청하기도 한다. 또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고 갚아주실 심판날을 기다린다. 여기서 그들은 윤리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 또는 애긍시사와 재계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의회는 역사과정에서 서로 원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를 잊고 서로 이해하며, 모든 이에게 사회정의와 공동선,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주고 촉진시키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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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6월 25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수정 마을에 있는 수정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정만매립산업단지 문제가 매듭된 것을 축하하는 감사미사와 마을 잔치를 열었다. |
한국교회, 주민들과 연대하는 관상수도자들: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밀양 가르멜 수도원
한국교회 안에서 예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관상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그 지역의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지역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틀라스 형제들과 같은 수도회인 마산교구에 있는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도원’의 관상수도자들은 지난 수년 동안 수정마을 주민들과 연대해 STX의 수정만 매립산업단지 조성을 지난 2011년 6월 백지화시켰다. 또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캠프 캐럴 미군기지의 고엽제 매립 의혹과 관련해 왜관주민들과 연대했으며, 밀양 가르멜수도원은 경남 밀양을 지나는 765㎸ 송전선로 공사를 반대하며 탈핵운동의 차원에서도 주민들과 연대하고 있다. 이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 역시 알제리처럼 가톨릭신자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들 모두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아틀라스 수도원의 크리스티앙 신부는 유언장 말미에 자신들이 행동하는 이유를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그대 안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도자들은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분을 알아본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복된 도둑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가 이 지상을 건너는 복된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죽음과 고통도, 가난도 종교도 우리들을 하느님 안에서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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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 일독을 권하고 싶은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