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오늘은 야외에 나왔습니다. 날씨가 매우 화창합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78장에 보니,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많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라는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이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었기에 아름답다고 말들 합니다. 바깥에 나와 대 자연을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세계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자연만 만들어 놓고서 아예 손을 떼고 말았습니까?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왜 불의와 사기와 도적과 폭력과 살인이 일어 납니까?
집안에서 남에게 사기를 당했다든지 큰 우환이 생기고 난 뒤에 이 대자연을 보십시오. 과연 그래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가사가 절로 나게 됩니까? 도리어 하나님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세계에 왜 아름답지 못한 것이 함께 있는 겁니까? "이 대 자연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해서는 아니됩니다. 자칫하면 그냥 성의없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왜 이 세상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는가?'도 같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파견 시켰습니다.
세상의 실상이 어떠하며 이 악한 세상의 힘이 긍극적으로 무엇을 겨냥하면서 활동하느냐를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못한 또 다른 권세자가 이미 이 세상을 선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와 보니 우리가 점찍은 야외 예배 장소에 다른 천막들이 벌써 쳐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세력에 의해 선점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가까스로 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세상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세력에 예수님을 배척해버렸습니다. 이 세상 밖으로 내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과연 이 아름답지 못한 세력에 대해서 그냥 방관만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목숨은 잃었지만 악의 무리가 최고의 무기로 삼는 죽음 속에서도 너끈하게 부활하심으로 그들은 이제 닭 쫓는 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서 그들은 제거되고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세상을 분리하려 오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와 아름답지 못한 자의 분리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지만 모세 당시에는 모세가 이 일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벌리시는 아름다운 심판도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이 '아름다운 심판'까지 우리가 범위를 넓혀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봅시다.
저는 사람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재벌이라면, "저 사람은 과연 옳게 세상을 보고 있을까?"를 먼저 마음 속으로 묻는 버릇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재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을 보게 되면, "저 사람은 과연 옳은 진리를 알고 있을까? 세상을 제대로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을 먼저 고려해 봅니다.
누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감탄하면, "과연 저 여인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아는 분일까?"를 먼저 걱정하게 됩니다. 어떤 가족이 넓은 평수에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저 가족은 과연 복음을 알까?"가 궁금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 현실이란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을 위하여 만드셨고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심판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나 진리를 모르는 자는 결국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쌍한 자를 부러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세상을 분리하려 오셨습니다. 아름다운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말입니다. 이 현실감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처신했습니다.
24-26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권력자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력을 더 큰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기에 이런 쪽으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이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 어머니의 믿음이 나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겠다"는 말씀을 본인들이 잘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막상 모세를 믿으라면 거부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예수님 속에서 이미 모세의 속성이 다 포함된 예수님 상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재물을 거절하고 권력을 거절하니까 신앙인들에게 너무나도 큰 심적 부담을 준다고 여기고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되니 전혀 심적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구세주입니다. 모세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세가 취한 태도를 그 당시 사회에게 옳은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이고 뭐고 되지 못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분리를 이미 알았습니다. 따라서 기쁘게 세상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억지로 세상의 재물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보면 '좋아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분리하심'이 곧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벌리시는 아름다운 진리임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니,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임금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니,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현실에 상관두지 않고 일관성있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그녀는 존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목숨 부지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연관짓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 당시 정치 상황에서는, 히브리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절대로 남자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막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강제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의 믿음이 이러한 죽음의 힘 조차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려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모세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무려 석달을 감추어놓고 키웠습니다.
하지만 한계에 이르러자 모세의 어머니는 갈대 상자 안에 아기를 담아서 갈대가 무성한 강으로 띄어 보냅니다. 그리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몰래 갔습니다. 바로의 딸이 이 상자를 발견하자 지켜보던 누이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제가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했습니다.
그래서 친모인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 유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그 친모가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바로의 딸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즉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모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애굽이라는 현실 나라에서 구원받아야겠다고 모세의 말을 추종하는 자는 모세와 같은 운명, 물에서 건짐을 받는 무리들이 됩니다. 죽음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 아름다운 세계에서 아름답지 못하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저주이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답지 못한 세력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운명이 그러했고 예수님의 운명도 그런 식으로 공격받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곧 패배도 아니요 비진리도 아닙니다. 도리어 죽음에서도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진리 말입니다. 모세의 이 당당함과 모세 어머니의 자유함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까?
죽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보고 있는 자가 되어 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자연 안에서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논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벌리시는 아름다운 심판을 바라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분리를 기뻐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도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살아야 할까요? 만약 예배당 앞에 노래방이 있어 예배 마치면 곧바로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며 예배 참석하게 될까요? 구원자를 알게 된 것을 실컷 노래하고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세를 거부하면서도 예수만 찾는 잘못된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모세의 기쁨처럼 이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쁨이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