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칼럼] 부흥회와 사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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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대신대학교 한국교회사) |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그 밑거름이 된 요소 가운데는 부흥회와 사경회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사경회(査經會)가 먼저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교 초기부터 일제 치하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해방공간이라고 부르는 광복전후 혼란기와 6.25 후 50년대까지만 해도 부흥회(復興會)라는 말보다는 사경회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말 그대로 사경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사경회의 기간도 짧게는 한주간 길게는 2주간이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달(月) 사경회라 해서 한달간 혹은 2~3개월 장기간에 걸쳐 성경전체나 혹은 몇권씩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오늘날과 달리 교회수도 적었기 때문에 도회지 경내에 있는 큰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릴 때는 인근 각처의 신자들이 쌀과 냄비를 비롯해 덮고 잘만한 이불까지 준비해 모였으며, 잠자리는 교회당과 교육관은 말할 것도 없고 신자들 집에 기숙(요즈음 홈스테이와 같은)하며 성경배우기와 기도에 열심이었다.
집회의 성격은 성경학교와 비슷해서 강사가 설교 시에나 낮 공부시간에 간혹 '성경 어디 몇장 몇절 이하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데'라고 하면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성경을 찾느라고 성경넘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오늘처럼 얄팍한 성경지식인이 아니고 꽤나 깊이 있는 신앙인들이 교회마다 넘쳐났다.
큰 도시를 중심으로 인근마을에서부터 모인 사람들은 두주간 혹은 그 이상의 긴 시간을 함께 먹고 자면서 성경 지식과 신앙 생활의 경험들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 모임'은 1960년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면서 사경회의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의 감정에만 치우치는 심령부흥회로 변모되고 말았다.
심령부흥이 어찌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가능이나 하냐는 것이다. 신앙이란 말씀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을 때만이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또는 잘 박힌 못처럼 그 나무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게 꿋꿋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소위 심령부흥회는 찬송가와는 거리가 먼 난데없는 인본주의에 가득찬 복음송이라는 비본질적인 노래로 말씀을 받아야 할 순진한 심령들을 마비시켜놓고 '아멘'과 '할렐루야'를 강요하는 다분히 선동적인 요소가 흘러넘치게 하고 있으니 미래의 한국교회가 염려된다고 하면 필자만의 기우일까?
강단마다 눈물이 필요한 회개의 메세지는 사라지고 신유와 축복, 방언 만능의 현상으로 변한 것을 무엇으로 제어할까? 부흥강사에게서도 경건과 엄숙함은 사라지고 천박한 개그에 물든 개그설교자들만이 인기를 끌고 그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탄식을 해야 할지. 본질을 떠난 샤머니즘적인 행태는 아닌지.
예수님께서 염려하셨듯이 이 세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는 자가 없고 울어도 함께 슬퍼하는 자가 없는 세대가 되어서 일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역사는 없고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만이 넘치고 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분위기에 휩싸여 얄팍하고 값싼 은혜만 강조하지 말고, 말씀과 은혜의 원천이 되는 사경회적인 훈련을 통해 건강한 신자들을 세워야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을 것이다.
박정규 박사(대신대학교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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