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츨라프와 한글
귀츨라프연구소 대표 신호철 장로
1. 귀츨라프는 누구인가
칼 귀츨라프(Gutzlaff, Karl F,A.)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포메라니아 프릿츠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독일 베르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823년 네덜란드에서 파송하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아시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1828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태국에 머물며 성경을 태국어로 번역하였다. 1831년부터 1851년 8월 9일 별세할 때까지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중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자기가 중국선교의 아버지라면, 귀츨라프는 중국선교의 할아버지”라고 말할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37년에는 성경(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한국과 귀츨라프의 관계는 1832년 7월 17일 황해도(몽금포)에 한국개신교 최초 선교사로 내한하여, 충청 해안(원산도)에서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 1832년 7월 27일, 원산도에서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가 한글의 언어학적 특성 등 “조선에 관한 소견” 제목의 논문(영문)을 통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주1) 이에 대하여는 제2항 및 제3항에 자세히 열거되었음
둘째, 1832년 7월 30일,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과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혁신(Innovation)을 하여야 수익이 있다”라고 하면서 그가 식량으로 가져온 씨감자를 농민에게 심어주므로 우리나라 감자재배 역사가 시작되었다.
셋째, 1832년 7월 26일, 영국과 한국 간 교역(交易)을 위한 청원서를 관가 근처에서 수군우후(水軍虞候)와 홍주목사(洪州牧使)를 통하여 전달하였다. 이 같은 노력은 1884년 3월 8일 “韓.英통상조약” 체결의 마중물이 되었다.
넷째, 충청해안(원산도) 구릉지(丘陵地)의 풍부한 草地 자원과 야생포도, 복숭아 등 식생(植生) 상황을 살펴보고 미래 한국의 목축업과 과수재배를 예측하며, 포도 재배법과 가공법 등을 마을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복음 전도 책자를 나누어 주고, 노인들에게 감기약도 나누어 주었다.
2.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
귀츨라프는 1832년 원산도 해안에서 충청 수군의 서기관(Yang-yih) 도움을 받아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이는 부분적 성경의 번역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한글 성경이 처음으로 번역되었다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린지(Lindsay) 함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귀츨라프 등은 1832년 7월 27일,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 과정에서 서기관을 설득하여 성공하였다. 귀츨라프는 주기도문(Lord’s prayer)을 한문으로 기록하고, 서기관은 이것을 한글(Corean alphabet)로 쓰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귀츨라프와 서기관 두 사람은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한글로 번역하였다.”
“서기관은 번역이 끝나자 많이 놀라면서 상관들이 이것을 알면 자기 목이 잘린다고 손으로 자기 목을 베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그 종이(번역 원본)를 없애달라고 사정하였다. 이에 귀츨라프와 린지는 서기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 번역문을 상자에 넣어 잠그고, 이제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확인하여 주었다.”라고 하였다. *주2).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 책 p.153 및 281(L52) 참조
필자는 1832년 당시 한글로 번역된 “주기도문” 원문이 어느 곳에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코자 국내.외 도서관 등을 조사하였으나 그 소재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번역문은 귀츨라프가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논문작성 등 한글 연구 자료로 가져가 활용한 뒤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편 귀츨라프는 한국에 머무는 기간(1832.7.17–8.17)에 한국인과의 대화 중에 들었던 낱말들을 채록(採錄)하여 영문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귀츨라프가 충청 해안에서 조선 군관(Teng-no)과 면담하면서 들었던(1832.7.24.) 우리 말 지명(개갱)을 한문으로는 필담(筆談)할 수 없어 ‘Called’를 앞에 붙여 “a bay Called `Gan- keang)” 이라 표기하였다. 충청 수사와 손님 대접 예절에 관한 이야기(1832.7.31.) 중에 들었던 ’좋다(good)’를 ‘Hota’라 기록하고, 귀츨라프가 황해도(몽금포)에 상륙(1832.7.18.)하여 전도 책자를 나누어 줄 때도 주민이 이것을 거절하면서 “불가(不可)”라고 말할 때 이를 “Pulga”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귀츨라프의 한국어 낱말의 채록과 연구의 노력은 한국 체류 모든 기간 중 계속되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은 단 하루 동안 노력의 결과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3. 한글의 우수성과 언어학적 특성
귀츨라프는 한국에서 모든 활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 1832년 11월 7일 중국 선교잡지(The Chinese Repository. Vol. 1. No7,)에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 제목의 영어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1832(純祖22)년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에 의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언어학적 특성에 대하여 서방 세계 여러 민족에게 처음 알린 사례로서 한글 연구의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논문의 주요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글 구조는 지극히 간단하면서, 동시에 매우 독창적(ingenious)이다. 한글에는 15개의 자음이 있다. ㄱ(ka), ㄴ(na), ㄷ(ta), ㄹ(nal), ㅁ(mah), ㅂ(pah), ㅅ(tsa), ㅇ(a,gna), ㅈ(tsha), ㅊ(cha), ㅋ(k’ha), ㅌ(t’ha), ㅍ(p’ha), ㅎ(ha), △(wa) 이다. 이 15개(현행 14개)는 초성으로, 모음과 이중모음과 결합하여 168개의 서로 다른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글의 모음은 11개(현행10개)가 있다. ㅏ(a), ㅑ(ya), ㅓ(o), ㅕ(yo), ㅗ(oh), ㅛ(yoh), ㅜ(oo), ㅠ(yoo), ㅡ(u), ㅣ(e). ●(a) 이다.
그런데 자음은 그 발음을 자주 바꾸는 것으로 보인다. 모음도 때때로 그렇게 하지만 자음보다 조금 덜하다. 이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듣기 좋은 음조(euphony, 音調)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주3) 책 p178 및 p.308 참조
둘째, 한글은 동아시아의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어형변화(declension)가 없다. 중국어 발음은 한국의 원래 언어와 완전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구어는 두 언어의 단어가 하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합쳐진 합성어의 상태로 되어 있는 게 많다.
셋째, 한글과 일본어의 유사성은 매우 놀랍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음조(euphony)를 고려하여 종종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문자를 생략하거나 삽입한다. 한글은 매우 표현력(expressive)이 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딱딱(harsh)하지도 아니하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다.
넷째, 한글은 발음이 온전하고 낭랑(sonorous)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글 글자에서 l, m, n, r을 서로 혼합하거나 교환하거나 뒤바꾸어 사용한다. 한국인들은 그들 언어를 표현력 있고 낙랑하게 강조하여 발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