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예술 수도(首都)
박 경 옥
제목이 파리 디자인 산책이다. 디자이너이자 이책의 저자인 이선정은 파리는 서두른다고 빨리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마음에 여유를 둔 채 오감을 활짝 열고 봐야 한다고 했다. 제목처럼 산책하듯이 도시의 얼굴을 조금씩 발견하고 싶었다.
아침의 파리는 도시전체가 회색이다. 하늘도 회색이다. 하늘빛을 받은 센강도 회색이었다. 건물은 무채색이었다. 아침 일찍 스마트폰 구글지도 하나에 의지한 채 파리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의 사람들도 없었다. 강아지 목줄을 잡고 여행가방을 깔고 앉아 있는 노숙인이 동전을 구걸한다. 노숙인이 강아지를 데리고 있는 신기한 모습에 되돌아가 동전을 넣어주었다. 목적지는 코코샤넬이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는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리츠호텔이었다. 헤밍웨이, 푸르스트 같은 작가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문화교류의 장으로 여겼다는 곳이다. 파리의 중심가라 그런지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 같았다. 몇 백 년이 된 것 같은 유서 깊어 보이는 건물, 직선과 로터리로 바큇살처럼 정확하게 연결된, 자로 재어서 건설한 게 확실한 것 같은 골목길. 도시전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잘 연결되어 있었다. 벙돔광장에 있어야 할 리츠호텔은 없었다. 작가는 없는 호텔을 있다고 했단 말인가? 광장을 지키는 경찰에게 물으니 헐고 다시 짓는단다. 30분을 걸어서 왔지만 거리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에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기는 광장의 까페에 들어갔다. 현란한 색깔의 향연 같은 마카롱 하나와 크로와상에 카푸치노 한 잔 시키고 벙돔광장에서 연결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바라보니 그 유명한 오페라 광장이 아닌가? 이때부터 지도가 필요없다. 발 닿는 데로 다니다가 눈 땡기는 데로 들어가 구경하고 맛난 냄새나는 데로 들어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만족스러운 곳이다.
지하철을 뜻하는 메트로라는 글자는 아주 작게 쓰여 있었지만 그걸 감싸는 둥글고 투명한 지붕이 또 디자인으로 명성을 내고 있었다. 내친 김에 오페라 광장을 요리조리 둘러본 다음 오줌냄새 풍긴다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로 들어서는 순간 역시나 오줌냄새가 풍겨왔다. 좀전의 우아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지만 백 년 전에 만들었다니 골동품이려니 하고 즐기다보니 과거로 돌아온 듯 하다. 입구 쪽의 지하철 의자는 잡아당기면 펴지는 접이식이었다. 잡아당겨 앉았다가 일어서면 자동으로 접어진다. 휠체어가 들어오니 승객 두 명이 얼른 일어서고 의자가 펼쳐졌던 그 자리는 휠체어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는 접이식의자는 접어지고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서있다. 이것은 인간중심 공공디자인의 모범으로 꼽힌다고 한다. 인간중심의 디자인이 프랑스의 특징이라고도 했다.
방송에서는 역이름만 불어로 말하고 끝이다. 예를 들면 샤틀레역을 샤틀레 샤틀레처럼. 자국어, 영어, 중국어로 설명하는 다른 나라하고는 달랐다. 이것은 자신감 또는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들렸다. 이 지하철의 종점은 셍뚜앙 벼룩시장이다. 생뚜앙 벼룩시장에 도착하여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부부에게 길을 물으니 대답대신 애절한 눈빛으로 “마담!, 원 유로”한다. 방금 갔던 웅장한 오페라광장을 오가던 부티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이다.
벼룩시장에는 골동품과 미술품을 팔고 있었지만 그들은 판매에는 별관심이 없는 듯 몇 십 년을 함께 해온 이웃 상인들과 담소를 나누다 가게로 발길을 옮기는 사람에게 “봉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우아한 불어를 한마디 날려준다. 친절한 남자들이라 그런지 내가 불어만 되면 말을 걸고 싶어졌다. 그리고 돈이 많았다면 그림을 몇 점 샀을 것이다. 오르쉐 미술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그림이 유명인사 것이라면 이곳의 그림은 이름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수준이나 분위기는 비슷했다.
생뚜앙 벼룩시장은 좀전에 봤던 시내중심부하고는 다르게, 길은 구불구불하고 질서 없는 사람들로 무질서한 파리의 골방 같았다. 그러나 골방에 들어가면 편했던 경험이 되살아난다.
너무 귀한 나머지, 햇볕이 좋은 날은 대학교수도 휴강을 해준다는 파리의 햇볕이 눈부실 때 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세계최초의 백화점이라는 봉마르쉐 백화점에 갔다. 세상의 명품은 다 모인 것 같은 봉마르쉐백화점에는 관광객은 보이지않고 영화배우들인가 싶은 미남미녀의 가족단위 쇼핑객들만 보인다. 상류층의 소비문화가 고스란히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파리지엥이 즐겨쓰는 색깔의 샤넬립스틱을 하나 사서 입술에 바르고 다시 파리의 디자인과 낭만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까페에 들어가니 사람들은 야외테라스에서 거리를 바라보고 옆으로 나란히 앉아있다. 로터리의 까페는 사방팔방으로 쭉쭉 뻗은 시원한 길이라 거리를 바라보고 앉아보니 그들이 방향을 그렇게 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나란히 앉는다고 작가는 얘기했다.
드디어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레스토랑. 프랑스 식사문화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하는 것 또한 인생의 큰 행복 중 하나로 여기는데, 실제로 한 끼 식사에 평균 한 시간 반 정도를 할애하며 그 시간을 즐긴다. 이들의 식사문화는 매우 엄격하며 아무 음식이나 먹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간식도 오후 4시 한번으로 정해져있다. 엄격하다는 데는 양도 철저히 조절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식사문화 때문에 비만율이 낮다.
옆 테이블의 여자는 혼자였다. 천천히 먹는 게 궁금하여 살짝살짝 훔쳐보았다. 음식이 담겨진 접시가 정물화를 그리려고 배치한 것처럼 예술적이다. 감자 반 쪽을 먹는데 15분이 걸렸다. 식사를 마친 후에 웨이터를 불렀다. 계산을 하나보다 했더니 디저트로 조각케익을 시켰다. 포크와 나이프는 음식 맛이 섞일까봐 새 걸로 내왔다. 디저트를 먹는데 또 15분이 걸렸다. 조각케익을 먹는데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아주 조금씩 우아하게 달콤함을 삼켰다. 그러니 한 시간 반 걸리는 식사시간이 이해가 되었다.
생제르망 거리를 걷다 보니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다리가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이 다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400년이 되었다는 돌로 만든 퐁네프다리는 엊그제 만든 것처럼 튼튼하고 멋스러워 보인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되었던 이 다리는 랭보와 까뮈, 리욤 등이 작품을 구상할 때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 책의 작가인 이선정은 파리의 공공디자인은 문화예술인을 키워 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썼다.
돌아올 때는 센강에 놓인 다리들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로 되돌아왔다. 이 다리의 아치구조는 최고의 균형미를 자랑한다. 프랑스는 1870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모든 분야에서 풍요로운 시기를 보냈다. 특히 예술과 문화가 발달해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등의 화가들과 프루스트, 에밀졸라, 빅토르 위고 등의 문학가들이 예술의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이 시기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성과 20세기로의 진입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아 이 다리를 건설하였다. 네 군데의 다리입구에 당대 최고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장식한 탑을 세웠다. 조각상들은 각각 중세, 르네상스 시대, 루이 14세 시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현대 프랑스를 상징하는 탑꼭대기에는 황금빛의 페가수스가 반짝이며 입구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걸으며 평화롭고 아름답던 그 시대로 걸어 들어가는 듯 했다.
센강은 어디서 시작해 걸어도 편안하고 아름다웠지만 밤에 불빛을 머금은 조용히 흐르는 센강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화가들이 그 강을 그렇게 많이 담아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한걸음 한걸음마다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경치, 귀에 들어오는 정겨운 노래, 코에 들어오는 향긋한 냄새를 맛보면서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 새 마음이 활짝 열려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센 강변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프랑스는 언제부터 예술과 문화를 상징하는 국가가 된 것일까?
그리고 파리는 어떻게 도시 전체를 문화행사장처럼 만들 수 있었을까?
방대한 인적 인프라도 놀랍지만 문화적 자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프랑스는 각종 문화정책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실행한다.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1981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자크 랑이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의 정치 이념을 문화로 확대하고 실현했다. 파리에 공공건축물들을 세워 프랑스의 신문화를 창조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피라미드, 퐁피두 센터, 신개선문, 오페라 바스티유, 프랑스 국립도서관, 오르쉐 미술관 등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씩 들르는 건축물이 이 때 탄생했다. 그리고 골목마다 우리의 노래방이나 피시방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갤러리들은 미래의 문화예술도 프랑스가 세계최고가 될 것임을 예견하게 했다.
하루에 3만보씩 걸으며 누볐던 파리가, 내가 떠나온 지 10여 일 만인 2015년 11월 13일의 금요일에 IS무장조직에게 테러를 당했다. 프랑스의 톨레랑스 정책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되었다면 인명피해 못지않은 안타까운 일이다. 발터벤야민이 지목한 대로, 파리는 오랫동안 프랑스인들만의 수도가 아니라 세계인의 예술 수도였다.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프랑스의 문화예술을 꽃피웠듯, 톨레랑스 정신이 살아남아 미래의 세대에도 찬란한 문화를 인류에 선사하길 빌어본다. 이번 여행으로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유는 테러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저력을 믿게 되었다.
세계인의 예술수도 파리.hwp
첫댓글 파리 사람 다 됐슈
세계를 누비고 다니시는 샘!
선생님의 세계가 늘 부러운 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