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우 법당 '정법불교' 관심 가진 불자들로 빼곡
11월 2일 오후, 서울 장충동 우리함께빌딩 6층 우리는선우 법당은 불자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우리는선우가 주최한 열린토론 법석에 참가해 적연 이제열 법사(재가결사 법림 지도법사)의 ‘불교안의 비불교 요소 해부’를 듣기 위해 전에 없이 많은 재가자들이 모여든 까닭이었다.
이제열 법사는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이런 강의를 하는 곤혹스런 입장을 털어놨다. “불교 안에서 비판은 악역에 해당되는 것 같다. 비판을 하면 사람을 네거티브하게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 사실 나는 네거티브한 사람이 아니다. 솔직히 살펴보자. 한국불교의 빗나간 상황을 비판하지 않으면 포교는커녕 불교를 만난 공덕도 얻지 못한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다.”
“지혜를 얻지 못하면 불교의 목표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불교는 그릇된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탈피가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 이제열 법사는 “개인수행이나 사회구조적 면에서도 불교 안에 잘못된 요소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불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적연 이제열 법사(재가결사 법림 지도법사)의 '불교안의 비불교적 요소 해부' 강연이 지난 11월 2일 장충동 우리는선우 법당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정법왜곡 비판하면 삐딱이로 낙인찍어선 불교 미래 없어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가? 무엇이 한국불교가 갖고 있는 잘못된 점이고, 한국불교를 병들게 하는가? 지난 40여년 재가법사로 포교의 일선에서 정진하면서 끊임 없이 정(正)과 사(邪)를 가리는 쪽에 노력을 기울여온 이제열 법사는 단지 정법을 이야기하고 정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불교에 애정이 없는 사람, 심지어 데바닷타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공덕을 말하는 것보다 지혜(반야)를 강조하고, 반야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자가 가야할 삶을 역설하다보니 시나브로 삐딱한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고독한 노력을 알아보는 이도 없지는 않았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정법불교를 하지 않는한 한국불교에 미래가 없다는 확신을 가진 불자들이 이제열 법사와 법림이라는 결사체에서 함께 하고 있다.
“사실 불교라는 종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종교이다. 가장 차원이 높은 고귀한 종교이다. 우리는 이 고귀성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특히 한국불교는 1600년 간 변화가 거의 없었다. 불교라는 종교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잘못된 것을 척결하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고 전제한 이제열 법사는 “이런 점이 기독교와 불교가 다른 점”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에는 이단논쟁이 많고, 이단과 사이비를 가려내려는 시도로 기독교 교단 안에서 갈등이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교리 논쟁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열 법사는 그러나 불교에는 이런 면이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사실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도대체 한국불교는 절에서 스님들이 무당 짓을 해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이처럼 불교를 왜곡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악다구니처럼 덤벼들어 인신공격을 해댄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뿌리가 있는 것 같다. 비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경향이 대승불교에 적지 않았다. 불이나 원융무애 사상 등을 다 끌어다가 사용하면서 정작 불교의 고귀한 진리에는 혼선이 빚어졌다.”
이제열 법사는 이런 흐름 속에서 불자들의 사고는 부지불식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고, 사는 게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따위의, 즉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지혜가 흐려지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법에 관한, 진리를 대하는 것에 대한 불자들의 의식구조가 마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불자들의 판단이 흐리멍텅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이제열 법사는 개탄했다.
섭수만 했을 뿐 절복 못한 것이 비불교적 요소 출현 원인
이제열 법사는 비불교적 요소가 출현한 원인으로 첫째 불교 정착과정에서 지역의 기존종교나 사상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경향을 꼽았다. 섭수와 절복, 즉 섭수는 포용하는 것이고 절복은 끊어버리는 것인데 여기에서 혼선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나쁜 것을 수용하는 것이 섭수이고, 교화를 통해 이를 옳게 하는 것이 조복인데 이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섭수에 치중했지, 절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섭수는 방편이고 절복은 목표이다. 한국불교는 섭수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불교 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정작 불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개신교는 다르다. 이 사람들은 절복 중심이다. 처음에는 마찰도 있고 어렵지만 이 사람들은 그것을 고수했다. 그러다보니 순교도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는 순교자가 없다. 고려불교가 망하고 조선에 들어와 탄압을 해도 순교자 하나가 없었다. 불교인들 자체가 이미 무엇을 척결하고 조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컨대 뱀과 용이 섞여서 뭐가 뱀인지, 용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솔직히 불교와 무속이 일반인들에겐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와 무속을 사춘간이라고도 한다. 무속인이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불교는 이런 것들을 다 용납해버린다. 그러다가 정작 불자들의 신행에서 불교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둘째 원인으로는 정법의 대중화에 무관심했다는 점을 꼽았다. 1600년 동안 일반인들에게 법이 전해주었는가? 그네들에게 사성제, 팔정도가 있었는가? 그러니까 한국불교는 법을 믿지 않고 불상과 스님을 믿어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다. 그런데도 한국불교 불자들의 절대 다수는 법에 관심이 없다. 이게 정상인가?
불교역사에서 과연 대중을 위한 법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거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위한 법회가 열렸을 뿐, 저자거리에서 열린 법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불자들에게 불교에 입각한 세계관, 진리관이 형성되지 못했고, 그저 불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편 정도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신도들 법성 관심 없고 방편에 끌려다니니 한심
“불교만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 법성이다. 나쁜 짓 말고 착한 행동 하라는 가르침은 어느 종교나 다 있다. 그런데 부처님만이 설한 진리가 있다. 부처님만이 발견한 진리가 있다. 이것이 법성인데, 법성은 뒷전이고 방편만 횡행한다. 그런데 그 방편은 절을 위한 방편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이유는 절이 아닌 중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는 절을 짓거나 절 운영하려고 방편만 유행한다. 그런데 상당수의 멍청한 신도들이 이런 방편에만 끌려 다닌다. 기가 막힐 일이다.”
이제열 법사는 한 때 관악산의 한 유명사찰에서 법회 했을 때의 경험을 털어놨다. 당시 삼막사에서는 기도가 끝나고 법회를 했는데, 기도에는 300명이 넘게 참석하는데, 법회에 참석한 인원은 30명도 안되고, 밥을 먹으려고 공양간으로 줄지어 서서 잡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제열 법사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에도 솔직한 우리나라 불교의 흔한 모습이 아니겠냐고 물었다.
“40년간 포교를 했지만, 반야심경을 수도 없이 외웠을 재자불자로부터 ‘조견오온개공’ 등의 뜻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아본 일이 없다. 그들이 그 뜻을 다 알아서 묻지 않았을까? 법성과 연결되지 않는 신앙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산왕대신 부르는 것과 관세음보살 찾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이름만 다르지 신앙의 질은 다르지 않다. 한국불교의 우매성이다.”
이제열 법사는 또 비불교적 요소들이 출현하는 네 번째 이유로 ‘정사(正邪)를 판단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정사의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불교티브이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설법을 시청할 경우가 많다”고 밝힌 이제열 법사는 “우려할 만한 내용을 1년이 넘게 전파를 타도 이를 제어하거나 개선하려는 사람도 단체도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신앙형태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이제열 법사의 거침 없는 강연을 한 마디로 놓지지 않으려는 대중들의 집중하는 모습.
불교안의 비불교적 요소들에 대해서 이제열 법사는 외적 요소들, 즉 출가승들의 청정성 타락, 비계율적 행위, 가승 및 잡승, 유랑승들의 활개, 사이비종단들의 대거 출현 및 절 안에서의 무속 행위 등을 제시했다. 예컨대, 출가비구는 주례를 설 수 는데도 서고 있고, 출가자는 세속인에게 돈을 줄 수 없는데도 수해 등이 나면 종단 대표가 방송에 출연해 돈을 내는 행위들은 율에 대한 무지이거나 알고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법당 안에는 절대로 귀신을 끌고 들어오면 안 되는데도 한국불교에서는 법당 안을 영가로 도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불교정신에 어긋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다. 비불교인데 불교인줄 알고 수용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가승, 잡승들이 판을 치고, 사이비들의 대거 출현했으며, 불교저변이 저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열 법사는 “한국불교의 상당부분에서 머리 깎은 무당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칠성불공, 산신불공이라니? 칠성과 산신이 부처인가?
한국불교가 대처제도를 허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제열 법사는 메스를 들이댔다. 대처는 예전에는 독거사, 즉 머리 깎은 거사로 불렀을 뿐, 스님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위 정통 불교를 추구한다는 조계종이 그들과 함께 종단협의체를 만들어 함께 하고 있으니, 큰일이라고 개탄했다. 대처승들이 운영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사찰 운영을 정법에 의해 하지 않고 있으며, 그곳에서 부처님의 법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 이제열 법사는 “주로 그 속에서 점을 보거나 귀신 푸닥거리를 하거나 재를 지내고 있으니, 솔직히 한국불교에서 진정한 불자의 수는 많이 잡아야 5만 정도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또한 비불교적 요소들은 신앙적 요소들에서도 다수 나타나고 있다고 이제열 법사는 주장했다. 토속신앙과의 결탁에 따른 정법 훼손, 칠성불공, 산신불공, 용왕불공, 신중불공 등 잡신들을 신성화한 미신적 신행행태가 자행되고 있다고 비판한 이제열 법사는 “지혜와 연결되지 않은 방편은 악교 방편이다. 부처님의 방편은 선교방편이다. 중생을 어리석게 만드는 방편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칠성불공, 산신불공이라니! 칠성이 부처인가? 산신이 부처인가? 잡신들에게 목숨바치는 불교, 이것이 한국불교이다. 이런 것들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삼성각에는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나반존자는 아라한이다. 즉 부처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그런데 이 나반존자를 산신, 칠성과 동일화시키고 있다. 산신은 신 중에서도 하계영기에 해당된다. 잘못된 의식의 만연도 심각하다. 과거에는 재가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49재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90년대 이후로 재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는 7*7재를 지내고 있다.”
이제열 법사의 비판은 거침 없이 이어졌다. 법회 동참 대중들은 혼란을 느끼거나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열 법사는 “불교의 시주형태도 정법에 의지한 시주가 거의 사라졌다”고 개탄했다. 정법을 알고 나니 제가 이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한다는 뜻으로 내는 시주는 거의 없으며, 시주의 전부는 귀신의 장난이 무서워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내는 재에 시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혹여 정법불교를 하는 포교당이나 모임이 있어도 그곳을 찾는 불자들은 정법의 선양을 위한 희사가 아닌 회비내는 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정견 등지면 영원히 불성 무너뜨리는 것
이제열 법사는 비불교적 요소는 법성에 관한 것에도 횡행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적 사유방식에 따른 용어의 왜곡, 즉 참나, 진아, 본래면목, 주인공 등 반 불교적 용어들의 정착화가 심각한 상태이며, 경전과 전통에 부합되지 않는 수행자들의 설법이 만연되어 있고, 수행의 상품화에 따른 법성의 둔화가 심각하다고 개탄했다.
이제열 법사는 비불교적 요소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출가승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노력과 함께 ▲비불교적 신행 행위를 금지 ▲법성의 보호를 위한 호법기구 설립 ▲사부대중들에게 비불교적 요소들을 척결하도록 하는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제열 법사는 결론적으로 중아함경의 부처님 가르침 “고타마시여, 내 섬김이 믿음과 지혜를 혼탁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것을 그만 두겠습니다. 받들어 섬김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해 질 때에 비로소 그를 받들어 섬길 것입니다”는 경구를 제시했다. 또한 중론의 “차라리 계율을 깨뜨릴지언정 올바른 견해를 무너뜨리지 말라. 계율을 깨뜨리면 혼자 악도에 떨어지지만 정견(正見)을 등지면 영원히 불성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날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