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7년(1574) 서원을 건립하여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인 선조8년(1575)에 한석봉이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이르러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사적 제170호로 지정된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 뒤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인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어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이르러 사림이 월천 조목 선생을 종향하여 매년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 실을 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은 상덕사, 전교당, 전사청, 한존재, 도재, 서재, 광명실, 장판각, 도산서당, 역락서재, 농운정사, 진도문, 유물전시관인 옥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계 선생은 1557년(명종 12)에 이곳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승 법련을 시켜 짓기 시작하여 1560년(명종 15)에 승 정일이 완공하였다.
이때 지은 서당은 3칸으로 가운데 방은 완락재라 명하여 거처하시면서 많은 제자를 가르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며, 농운정사는 공자형팔간방으로 지어 문하생들이 공부하는 강실로 사용한 곳이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와가로써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전면에는 반칸 후퇴하여 평주 4개를 설치하였으며, 평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마루방을 꾸미고 신위를 모셨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고 마루 위에는 여러 겹의 왕골자리를 깔아 신성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퇴계 선생의 위패는 주벽에 모시고 월천 조목 선생의 위패는 동벽에 모셨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좌측면은 2통 간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한존재라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6칸은 모두 우물마루로 대청을 구 성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원생들이 기숙하면서 강학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에 대향배치되어 있으며 각 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도산서당은 원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에 좌우퇴간을 증설하여 현재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퇴계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셨던 방은 완락재이며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으로 바위에 기대어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바란다는 학문에 대한 겸손의 뜻이 담겨져 있다.
동서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이며 광명은 수많은 책이 나에게 서광을 준다 라는 뜻이고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2층 누각 건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1,300여종에 5,000여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장판각은 서원의 출판소이며 퇴계 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 12곡, 선조어필 등의 목판각이 37종 2,790장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써 제수청과 주고가 있다. 이 건물은 동서의 두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이 서원의 주향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진 보이고 자는 경호이며 호는 퇴계, 퇴도, 도수이다.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 간상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 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 아버지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기경 침식을 잊고 주 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 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 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 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봉임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직중 주자 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 에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을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 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하고,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를 두터 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영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 뒤 친정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 공조판서, 대제학이라는 현직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때 명나라 신제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사고로 죽 자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 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 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 조에게 정자의 사잠, 논어집주, 주연, 장재이 서명등의 온오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 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분에 물을 주게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 으나, 산소에는 유계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 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 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 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나이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의 복각본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각한 성화간본의 수보본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 등의 공 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 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 터였다 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 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고 후서를 썼고, 또한 연평답을을 교정하고 후어를 지었다. 54 에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주>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 전의>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를 썼다. 59세에 황증거에 답하 여 <백록동규집해>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 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의 태극문변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를 썼다. 64세에 이연방의 심무체 용론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 논어집주, 주역, 서명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청제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 명종에게 인효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 궁인의 참언, 간언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과 선조궁 사이에 친 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 스스로 모범적으로 도술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 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 제2도 서명도, 제3도 소학도, 제4도 대학도, 제5도 백록동규도, 제6도 심통성정도, 제7도 인설도, 제8도 심학도, 제9도 경재잠도, 제10도 숙흥야매잠도와 도 설, 제사, 규약 등 부수문으로 되어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 저작이며, 제2도 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 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 일장이고, 도는 권근의 작 품이다. 제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 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 5, 10 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 등 5개처 만이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고, 도쿠가와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 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도 크게 존숭을 받았고,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이 이덕홍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해통술>에서 정자중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획 득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한 견해, 홍의한 마음, 고명한 학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은 백대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학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 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류성룡, 정구, 김성일, 조목, 이독홍, 기대승, 김운월당, 금 응협, 이산해, 정탁, 정자중, 구경서, 조호익, 황준량, 이강이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 렀고, 나아가서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상정, 류치명, 이진상, 곽종석, 이항로, 류 중교, 기정진 등등 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 국유학사상의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를 찬술하여 그에 게 성인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은 <도산사숙록>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 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한 에도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 이 일 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후지와라 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로 신명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와 다름없다"하고 '조선의 일인'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고제 사토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의 유가 아 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는 '주자의 도통', '주자 이래의 일인'이라 하여 존신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아스카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는 불명하여 속학이 되어버렸을 것 이라 생각된다"고 하였고,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는 그를 원, 명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의 진유'라 절찬하여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말 메이지 시대의 구스모토는 "명대의 대 유를 설경헌, 호경재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 장양원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 였다. 마쓰다의 <일선사화>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의 기초자인 모토다는 "정주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 선생이 그 소찬의 <주자서절요>를 읽 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에게 봉헌하였 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 상덕여자대학에서 대학의 증축,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 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는 찬시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 라 이부자 남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 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 고한 뒤.... 도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 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에 종사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 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 4공화국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 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 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5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의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 며, 독일의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 어 그 안에 퇴계학 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 의 해마다 한국, 일본, 대만, 미국, 독일, 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 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 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 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국제학술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도산서원에 배향된 월천 조목(1524~1606)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횡 성이고 자는 사경이며 호는 월천이다. 아버지는 참판 대춘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수익이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한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 며, 대과는 포기하고 독선일신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증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 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에 피선 되고, 집경전참봉에게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 종부시주부, 조지서사지, 공조 좌랑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 으나 허락 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 경사도도사, 충청도도사, 형조좌랑, 신녕현감, 영덕현령, 전생서주부, 공조정랑, 상서원판관 및 금산, 단양, 합천등의 군수, 장원 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이 있었으며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 사 재감 정, 예빈시정, 공조참의, 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간이 편간, 사원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 었다. 그는 신민보다 명덕을 중시하여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 광흥사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으 며,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였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에 심취하여 <심경>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하여서는 매년 역동 서원,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소술과 존봉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 부분을 이루고 있음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 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 이광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이 있다.
도산서원은 주변이 매우 좋아서 선비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고도 합니다..
도산서원에서 안동호를 바라보면 풍경이 너무 좋아서 저 역시 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 답사때 한번 같이 풍경을 즐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