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평창(平昌)은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 일명 于烏縣)이었다가 신라 영역이 되어 경순왕 때에 백오현(白烏縣)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영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인 평창현으로 이름을 개칭되었으며, 1018년(현종 9)에 원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299년(충렬왕 25)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1387년(우왕 13)에 평창군으로 잠시 승격되기도 했으나 곧 현으로 환원되었다. 1392년(태조 1)에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의 비 효경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평창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미탄면·대화면·진부면·봉평면은 그대로, 군북면·남면·북면이 군내면으로 통합되었다. 1979년에 평창면이 평창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장평리, 진부면 속사리·노동리(路洞里)·용전리(龍田里)·이목정리(梨木亭里)·도사리, 대화면 신리(新里)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龍坪面)을 설치하였고, 1989년 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에 편입되었다. 2003년 평창읍·미탄면·방림면·대화면·봉평면·용평면·진부면·도암면 등 1읍 7면과 계촌출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성씨의 역사
평창이씨(平昌李氏)의 시조 이광(李匡)은 1126년(고려 인종 4)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太師)에 이르렀고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다. 백오(白烏)는 평창(平昌)의 옛 이름이다.
숙종 때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에는 시조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이거명(李居明)의 셋째 아들 이윤장(李潤張)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4년 간행된 《갑자보(甲子譜)》를 보면 숙종 때의 《갑자보》가 위작(僞作)이라는 것이 밝혀져 《기미보(己未譜)》 이후 시조가 이광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이광의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고려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고, 많은 공을 세워 평창군(平昌君)에 봉해졌고, 이후 후손들이 평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분적종 및 분파
감정공파(監正公派)
계인군파(啓仁君派)
노산부원군파(魯山府院君派)
문경공파(文景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용공파(司勇公派)
사직공종파(司直公宗派)
수사공파(水使公派)
익평공파(翼平公派)
정숙공파(靖肅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평천군파(平川君派)
헌무공파(憲武公派)
주요 세거지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하진평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회용리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일원
강원도 양구군 일원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금수리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하복리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함경북도 부산군 삼장면 농사동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평창이씨는 20,718가구 총 65,94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