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의 정면충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한 보복 원정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두 차례의 군사적 정면충돌을 빚은 프랑스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앞에서 완전 실패로 끝났다. 이때의 프랑스나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침략자를 격퇴했다고 자부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대외고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시간을 놓치게 되었다.
◆병인양요
1700년대 후반 청나라에 간 조선사신단의 일원이 북경의 천주교와 접촉하여 자생적인 천주교인이 생기기 시작하자 1801년, 1839년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9년에는 천주교 신자가 약 1만 7000명으로 불어났다.
1863년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1866년 러시아 선박이 동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의 조정에 관직을 갖고 있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자유를 신장시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조선이 동맹을 맺는 협상을 추진하도록 촉구했다. 대원군은 천주교 ‘수괴’들을 은신처에서 끌어낼 계략으로 짐짓 이 안에 호감을 표했다. 1866년 2월 베르뉘 신부가 서울에 오자 그를 체포하고, 또 다른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한 보복 원정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베르뉘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참수되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정책은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과 약 1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인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처형을 모면한 3명 중 한 명인 리델(Felix-Claire Ridel) 신부가 낚시배를 타고 중국 천진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 기지를 두고 있던 프랑스 극동전대 피엘 구스탑 로즈(Pierre-Gustave Roze,魯勢) 제독이 천진에 와 있었다. 리델 신부로부터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 학살소식을 들은 로즈 제독은 조선에 대한 보복 원정을 결심했다. 북경주재 프랑스 영사 대리 헨리 디 벨로네(Bellonett, H.D., 伯洛)가 강력히 후원했다.
로즈는 본격 원정에 앞서 그해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군함 3척을 이끌고 서울 양화진 서강까지 와서 강화도와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 수로탐사를 한다며 무력시위를 겸한 정탐을 하고 돌아갔다. 예비원정 결과 큰 배와 제한된 병력으로 요새화된 서울을 공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강화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그는 추수기에 서울로 통하는 수로의 입구를 봉쇄하면 조선조정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병인양요. 프랑스 극동전대 피엘 구스탑 로즈(Pierre-Gustave Roze,魯勢) 제독
1866년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라게리에르호를 기함으로 하여 보급선 2척, 포함 2척과 호위함 1척에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최인서(崔仁瑞)·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고 중국 산동반도 지푸항을 출발했다. 10월 16일 170명의 병력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했다.
조선정부는 이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했다.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을 공격하였다. 프랑스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기 위해 549명의 부대로 11월 7일 덕포에서 야간 도하작전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탈환하였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을 공격했으나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프랑스군은 상륙 이래 거의 한 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했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문서는 이때 가져간 것이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개항협상도 벌이지 못했고, 정족산성 패배 후 철수했으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양 열강과 최초로 치른 무력충돌이자 승리한 전투였다. 프랑스의 패퇴로 말미암아 대원군과 조선 조정에 근대화 없이 외부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화하여 조선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병인양요. 로즈 제독(중앙)과 기함 La Guemiere 수병들(1865)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2달 전인 1866년 8월 20일(음 7.11)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면제품과 유리 등을 싣고 중국 천진으로부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 배는 영국의 메도우즈 상사(Meadows and Company)가 빌린 미국 국적의 배로 선주 프레스턴(W. B. Preston) 등 미국인 3명, 통역을 담당한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등 영국인 2명, 중국인 13명, 흑인 2명 등 총 20명이 타고 있었다. 토머스는 중국에 파견된 영국 웰스선교부의 선교사로 조선 선교의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한 해 전에도 조선 해안에 와서 2달 반 동안 머무르며 조선의 문물을 접하고 말을 배운 적이 있었던 그는 강변에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 병인양요. 미국의 포함외교
조선 관리들은 통상을 거부하며 즉각 물러가기를 요구했다. 8월 25일 선원들이 대화를 위해 배위에 올라온 조선 관리 이현익과 두 부하를 인질로 잡아 감금하고 연안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이를 보고 공격 명령을 내렸고 평양 군민들이 모래톱에 얹혀 움직이지 못하는 이 배를 불태워버렸다
이 사실은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은 1차로 와추세트(Wachushett)호 함장 슈펠트(Robert W. Shufeldt)로 하여금 진상조사를 한 후, 포함외교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로 작정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가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으로 1871년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 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계획했다.
▲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작전회의.
로저스는 조선 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계획했다.
1871년 6월 1일 로저스 미국 함대는 인천 앞바다에 와서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강화해협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는 미국 함선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손돌목 포격사건).
미국 대표는 조선 측에게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을 비난하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 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고,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 측은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 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 미국은 조선과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해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 이어서 광성보를 점령했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하여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하고,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을, 6월 11일에는 덕진진을 점거하였다. 이어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는 광성보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수륙 양면에서 포격하여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는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으나,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 난 결사적인 항전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조선정부의 통상거부로 인해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7월 3일(음 5.16)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 미국은 조선과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포병대·공병대·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포함해 10개 중대로 상륙군 부대를 편성,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 이어서 광성보를 점령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군사적 정면충돌을 빚은 프랑스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앞에서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이때의 프랑스나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침략자를 격퇴했다고 자부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대외고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시간을 놓치게 되었다.
▲ 척화비.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대외고립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