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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도로(道路)
1. 조선의 도로정책과 도로체계
1.1. 한양천도와 도성의 도로 정책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예치(禮治)사상을 반영한 새 도시건설과 함께 도로를 정비하였다. 도성 안의 도로계획 또한 한양 천도 이후 1393년(태조 2) 2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과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ㆍ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념(李恬)으로 하여금 조운(漕運)의 편리 유무와 도로 노정의 험난과 평탄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1394년(태조 3) 9월에는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1394년경에 도로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1399년(정종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405년(태종 5) 10월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 1414년(태종 14)에 걸쳐 창덕궁 건립, 혜정교∼창덕궁 방면이나 종루∼남대문과 숭례문 방면의 시전 행랑이 완공됨으로써 시가지의 형성과 함께 도로도 어느 정도 정비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와 같은 여건 속에서 태종대에 도로제도를 점차 정비하게 되었는데 1407년(태종7) 4월한성부에서 5부 각 방의 이름과 교량 및 거리의 이름을 세우도록 조치하고, 화재방지용 물독[水甕] 설치, 길가 집 앞 나무심기, 냇가 양쪽에 제방 쌓아 나무심기를 주장함과 동시에 성안의 큰 길 이외에 동네의 각 도로도 평평하게 수레가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14년(태종 14) 10월에 이르러 도로의 멀고 가까움이 일정하지 않아 사신의 파견이나 조세를 납부하는 기한을 정하는데 불편하므로 도로의 거리에 따라 후자(堠子)를 설치,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설치하여 1식(息)으로 삼는 이정표 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도성안의 도로 폭에 대한 규정도 제안하였다. 1415년(태종 15) 8월에는 백성들의 도로 침범을 막고 9궤(軌), 7궤 등의 고제(古制)에 따른 도로 폭 규정과 개천 양안의 정비, 성 안팎의 도로개설 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도로에 관한 구체적 대책은 세종대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1426년( 세종 8)에 일어난 대화재 사건으로 말미암아 방화 대책의 하나로서 행랑에 방화용 담장을 쌓거나 관청 가까운 가옥을 철거하고 행랑과 주택 사이에 우물을 파서 물을 저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내의 도로를 사방으로 개통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26년 4월에 한성부와 호조, 공조가 함께 의논한 결과 도성의 도로 폭은 대로는 7궤, 중로는 2궤, 소로는 1궤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 외에 도성의 도로 확보를 위해 성안의 도로를 침범한 가옥에 대해서 철거 조치를 취하거나 화재 예방책으로서 각 방의 민가에도 도로를 개통하도록 조치하였다. 즉, 1431년(세종 13) 4월에 민호를 나누어 동리를 만들고 방리 사이에 도로를 개통하여 화재 피해를 방지하자고 하였다.
이와 같은 도로 규정에 대한 개선책은 논란을 거듭한 결과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 공전 교량조에 대로는 넓이 56척, 중로 16척, 소로는 11척으로 하고 도로 양편의 수구는 각 2척으로 확정함으로써 도성안의 도로 규정이 제도화되었다.
1.2. 도성의 도로망
도성안의 주요 도로망은 경복궁, 창덕궁 및 종묘, 사직단 그리고 4대문과 4소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과 방리 및 각 사(司) 그리고 하천을 따라 형성된 지선도로가 형성되었다. 도성안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는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앞길과 동쪽의 흥인문, 서쪽의 경희궁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와 숭례문에서 대광통교(종로네거리) 연결 도로이다.
중로는 종가(鍾街-종로3가)에서 돈화문, 종로4가에서 종묘를 따라 창덕궁, 혜화문에 이르는 도로, 소광통교(을지로입구)∼광희문, 사직단에서 세종로, 중학동 지나 청진동에 이르는 도로 등이다.
도성의 대문과 지방으로 연결되는 성밖 도로노선의 기점은 숭례문과 흥인문을 중심으로 창의문,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광희문이었다.
먼저 서북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자연암(紫煙巖) 신교(新橋)-기영(畿營) 초교(草橋)-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무악현(毋岳峴)-홍제원(弘濟院)-병전거리(餠廛巨里)로 연결되어 제1대로인 의주대로(義州大路)로 연결되었다.
남쪽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 이문동(里門洞)-주교(舟橋)-청파역(靑坡驛)-석우참(石隅站)(分岐)-와요현(瓦窯峴)-판전거리(飯廛巨里)-동작진(銅雀津)에서 제8대로에 연결되며, 석우참(石隅站)에서 분기(分岐)하여→둔지산(屯之山)-서빙고진(西氷庫津)과 당현(堂峴)-만초천(蔓草川)-습진기(習陣基)-노량진(露梁津)을 통하여 제7대로에 연결되었다.
서쪽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악전현(樂田峴-分岐)-아현(阿峴) 노고산(老姑山)-창천(倉川-分岐)-와우산(臥牛山)-양화도(楊花渡)를 건너 제6대로에 연결되며, 악전현(樂田峴) 분기점에서 만리현(萬里峴)-마포진(麻浦津)-방학호진(放鶴湖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첩로(捷路)이며, 또 창천 분기점에서 광흥창(廣興倉)-서강진(西江津)-율도(栗島), 여의도(汝矣島)-영등포(英登浦)-기탄석교(岐灘石橋)를 지나 인천으로 가는 첩로이다.
동북 방향은 흥인문을 출발, 동묘(東廟-分岐)-보제원(普濟院)-안암동천(安巖洞川)-제기현(祭基峴)-고암(鼓巖-分岐)-수유현(水踰峴)를 지나 제2대로인 경흥로에 연결되는 길이며, 동묘에서 분기하여 영도교(永渡橋)- 왕심리(旺深里)- 차현(車峴)- 전곶(箭串) 제반교(濟礬橋)를 지나 제5대로로 연결, 고암(鼓巖)에서 분기하여 안락현(安樂峴)-중랑포(中梁浦)를 거쳐 제3대로에 연결하는 길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북쪽으로 총융신영(摠戎新營)-평창(平倉)-북한산성 남문-행궁(行宮)에 이르는 도로, 창의문 서북쪽으로 한북관(漢北關)-병전거리(餠廛巨里)를 지나 제1대로로 연결하거나, 돈의문의 서쪽으로 기영(畿營)-모화관(慕華館)-아현(阿峴)을 지나 제6대로에 연결, 소의문(昭義門)의 경우 서쪽으로 아현을 지나 제6대로에, 혜화문에서 동북쪽으로 적유현(狄踰峴)-수유현(水踰峴)를 거쳐 제2대로로 연결되는 도로이며, 광희문에서 동남쪽으로 제반교(濟礬橋)-한강진, 두모포(豆毛浦) 저자도(楮子島)까지 연결되는 도로 노선이 발달되었다.
1.3. 지방의 도로망
지방 도로망은 중앙과 지방 군현의 치소 사이, 군현과 군현 또는 감영, 병영 및 수영 외에 진보 등과의 상호연락과 사행(使行) 및 온행(溫幸) 그리고 물자수송을 위해 정비하였다. 중요 도로망은 9대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0대로(『대동지지(大東地志』), 6대로(『 도로고(道路攷』) 등으로 구분하여 이용되었다.
먼저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에 의한 6대로는 제1로 의주로(義州路, 경성의 홍제원∼의주), 제2로 경흥로(慶興路, 수유리점∼서수라보)에 이르는 길, 제3로 평해로(平海路, 망우리현∼평해)에 이르는 길, 제4로 동래로(東萊路, 한강∼부산진)에 이르는 길, 제5로 제주로(濟州路, 동작진∼제주)에 이르는 길, 제6로 강화로(江華路, 양화도∼강화부)에 이르는 길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에서는 봉화로(奉化路, 전곶교-송파진-광주-이천-음죽-단양-풍기-영천-봉화)와 수원별로(水原別路, 노량진-시흥-안양행궁-수원행궁-건릉), 충청수영로(忠淸水營路, 소사점-평택-충청수영), 통영별로(統營別路, 삼례역-전주-남원 오수역-운봉-함양-산청-진주-사천-고성-통영)가 추가되었다.
2. 도로의 관리
도로에 대한 관리는 공조와 형조에서 맡았다. 형조소속의 장금사(掌禁司)는 도로 불법 이용 등을 단속하는 도로금령(道路 禁令)이나 진량(津梁) 등의 일을 맡았으며, 공조 소속 아문인 영조사(營造司)는 궁실과 성지, 공해, 옥우 및 도로의 토목, 공역 등의 일을 맡았다. 한성부에서는 도돈체사(道頓遞使)를 임명하여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도로의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는 기리고거(記里鼓車)를 사용하였다.
도로의 보수는 국왕의 행행(行幸)이나 사신 왕래의 경우, 그리고 강무(講武-군사훈련)나 온천에 행차할 때에 주로 실시하였다. 지방에서는 도로 주변의 읍민의 부역이나 농민 그리고 승도들을 동원하여 수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도성의 경우엔 5부 방민이나 훈조계공인(燻造契貢人)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1787년(정조 11) 6월 영우원(永祐園) 행차로에 있는 안락현(安樂峴-현재 청량리∼중랑교 사이)이 수재로 파손되자 안락현 동쪽은 양주의 원소군(園所軍-왕릉 수호군)이, 서쪽은 훈조계공인이 보수를 맡았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또 경기도 고양, 파주, 교하의 능행로에서는 교계(橋契)를 상설하여 보수하기도 하였다.
도로보수 과정에서 농민들의 민전을 침범한다든지 곡식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도로 수치에 징발된 역부나 전부들에게 대동미와 같은 조세를 감면하거나 전답의 소출 부족분을 보충해주기도 하였다.
3. 실학자의 도로개혁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상품경제의 발달과 군사외교 및 교통 운송상의 이유로 도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실학자들은 상품 화폐경제를 진흥시킨다는 목적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였다. 그 결과 교통체계를 효과적으로 관리,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의 수치(修治)와 교통수단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실학자 가운데 도로에 대해 선구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유형원(柳馨遠)이다. 그는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도로의 수축은 협착한 도로의 지형을 그대로 하지 말고 평탄하게 개수하여 수레가 다닐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도성의 내로(內路)는 대로 36보(步, 1보=5척 가량), 중로 18보, 소로 9보로 확장하고, 외방의 읍성(邑城) 내로(內路)는 대로 18보, 중로 9보, 소로 6보로 하고 기타 도로 즉, 각도로부터 서울로 통하는 길은 12보, 고을과 고을로 통하는 길은 9보, 각 촌락에서 고을로 통하는 길은 6보로 정하여 도로망을 확충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당시 수레통행 문제에 대하여 지형조건을 구실삼아 통행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각 사와 제읍ㆍ영ㆍ진 그리고 각 역에 대거(大車)ㆍ편거(便車)ㆍ곡거(曲車) 등의 수레를 비치하여 물건을 수송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지방의 도로변 각 역참 근처에 참점(站店-酒店의 일종)과 포자(鋪子-廛房)를 설치하여 사객(使客)을 지공(支供)하고 화폐유통의 촉진과 상공업을 진흥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익(李瀷)은『성호잡저(星湖雜著)』병제에서 도로의 중요성과 수레 이용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지세가 비록 험하나 절반은 평탄하고 넓은 길이 있다. 그런데 길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수레를 이용하지 못한다. ...(중략)... 우리도 옛길을 닦아서 고친다면 비록 짐을 싣는 큰 수레라도 국토의 태반을 다닐 수 있다.”고 도로의 개수를 역설하여 승거(乘車), 병거(兵車) 등 어떠한 수레도 다닐 수 있게 만들 것을 주장했다.
북학파의 한 사람인 유수원(柳壽垣)은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 중심의 사회개혁을 추진하면서 『우서(迂書)』에서 상업을 진흥시키는 방안으로서 교량과 도로의 건설을 역설하였다. 도로를 ‘물화(物貨)의 유통로’로 인식하여 도로의 건설은 우마나 수레의 이용을 원활하게 하며 결국 물화의 유통을 촉진시켜 상업을 진흥시킨다고 보았다.
홍양호(洪良浩)도『목민대방(牧民大方)』에서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백화(百貨)가 유통된다”고 하여 상업 진흥을 위해 중국의 제거법(製車法)을 배우자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용후생이 목민(牧民)의 도(道)”라고 전제하고 산업발달의 기초조건으로서 제언, 교량, 도로, 산택(山澤) 등의 관리를 강조하고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어 읍리를 보호하자고 하였다.
홍대용(洪大容) 역시 『담헌서(湛軒書)』에서 교통공학적 측면에서 수레 제작의 과학적 기술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도로의 정치, 군사적 기능보다 경제적 기능을 중시하여 관물, 공납물의 수송만이 아니라 민간 물화의 운송로로서 도로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상공업의 진흥과 화폐유통 및 주거(舟車)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수레는 물의 배요 이동하는 집”이라 하고 중국에 재화가 풍족한 것은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물화가 유통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외에, 신경준은『도로고』에서 “치정의 근본을 치도(治道)”라 하고 도로 노정의 과학적 측량을 제시하고 능행로, 온천로, 역로, 파발로 및 6대로 노선을 정리하고, 교통수단으로서의 거제책(車制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등을 저술하여 실용적 도로관을 보여주고 있다.
박제가는『북학의(北學議)』에서 “상업이 발달하려면 우선 교통이 발달하여야 한다”고 하고 도로, 교량의 국가적 확장, 수레·선박 등의 제작, 보급으로 교통수단이 혁신되어 교통망, 경제망이 형성되어야 상업이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수레와 선박을 쓰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 생산물의 교역과 상공업이 같이 발달한다고 보아 수레, 선박의 이용을 통한 국내 및 해외통상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의 실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과 국내와 물자의 유통을 위해서 도로 개수 및 수레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개화시기의 도로 실태 및 개화지식인의 도로관
4.1. 서양인이 본 도로실태
개화시기 선교사를 포함한 많은 서양인들은 그들의 견문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의 도로 실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비숍(Bishop, I. B.)은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하루 낮이 걸린다. (중략) 도로의 너비는 겨우 1m 내외로 논둑 밭둑을 지나는 길고 꼬불꼬불한 돌멩이투성이 길이다.”라고 한다든지 “국민 생활의 동맥이라고 할 도로의 불안전함이 한국과 같음은 지구상에 비교할 곳이 없다. (중략) 도로는 또한 온갖 오물의 집적소이다”라고 할 정도로 도로의 관리 실태는 매우 불안전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 von) 역시 “길은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일본의 도로 사정은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기수(金綺秀)는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도로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었으므로 비가 내려도 길이 깨끗하다. (중략) 도로와 거리는 평평하고 곧고 바르게 되어 있어서 길 모서리가 삐쭉 튀어나오지 않고 뒷골목도 구부러져 있지 않아서 (중략) 마치 목수가 일할 때 사용하는 먹줄을 치는 것 같아서 (중략) 도로의 정결함이 맨발로 다녀도 더렵혀지지 않을 정도이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평탄하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2. 개화기 지식인의 도로관
1882년(고종 9)일본에 다녀온 김옥균(金玉均)은 “나라를 부강 시키려면 산업을 개발해야 하고 산업을 개발하려면 치도를 먼저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이 필요하다고 하고 구체적으로『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치도, 즉 도로의 개선과 정비를 주장하였다. 도로의 개선은 교통 발전의 요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치도국(治道局)의 설치를 비롯하여, 치도 기술자의 양성과 필요한 기계의 구비, 오물처리법, 감독ㆍ순검의 설치와 감독의 내역, 인력거(人力車)와 마력거(馬力車)의 운행 등 도로개선론도 제시하였다. 김옥균의 도로개선론은 도로의 수치를 통해 근대적인 국가로 부강해 질 수 있다는 새로운 자기인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