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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상업과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매우 부유했습니다. 돈, 성공, 수사학, 철학, 웅변 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능력을 숭배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내려놓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했습니다.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와 관계를 맺는 부끄러운 음행이 공공연하게 벌어졌습니다. 교만했습니다. 특히, 각자에게 임한 은사를 서로 비교했습니다. 우열을 가렸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능력 행함 같은 눈에 띄는 은사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영적으로 우월한 상징처럼 여겼습니다. 또 고린도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도Παῦλος를 평가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최소한 뛰어난 웅변, 철학적 언변,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권위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기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는 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외모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말은 세련되지 않았습니다. 가진 능력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도 많았습니다.
거기다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해 보았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허약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거침없는 웅변과 신비 체험과 유대적인 권위로 포장했습니다.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취향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들에서는 권위와 함께 힘이 넘쳐나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는 허약해 보이고, 초라하며, 시원하게 말하지도 못하는 그를 비웃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깎아내렸습니다. 진짜 사도가 맞냐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일한 대가를 받고 있었던 당시의 철학자나 교사들과는 달리 왜 사례비도 받지 못하느냐고, 진짜 사도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냐고 따져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천막을 수리하여 선교비를 충당했던 자비량 사역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성공과 힘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흘린 눈물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이 당한 무수히 많은 핍박과 고난을 자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져주신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사도가 반드시 나타내야 할 표지가 아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a)라고 외쳤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지를 따지려고 하기 전에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라 또는 내가 진짜 사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기 전에 너희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 보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안에ἐν”는 존재 영역을 가리킵니다.
곧 생각과 가치관은 물론 삶의 방향과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리 곧 복음 안에, 사랑 안에, 믿음 안에 있는지와 관련된 질문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시험하고πειράζετε”는 “검증하다, 진위를 확인해 보다.” 등의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점검하라, (자기) 신앙의 진위를 검증하라, (자기) 믿음을 성찰하라.”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연출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는 종교적인 습관도 아닙니다.
반드시 진짜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검증해야 합니다. “확증하라δοκιμάζετε”는 “인정된 진품인지 검사하다, 합격 판정을 내리다.” 등의 뜻입니다. “내가 진짜 사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너희 믿음은 과연 진짜인지 확인해 보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출석보다,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보다, 어떤 직분을 가졌는지보다, 얼마나 해박한 신학으로 무장했는지보다, 얼마나 놀라운 은사들을 경험했는지보다,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과 수고와 봉사를 했는지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짜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보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도의 외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임하여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다.”(고후13:5b)라고 이어집니다. “알다ἐπιγινώσκω”는 “위에, 더욱, 더하여”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ἐπί와 “알다, 인식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γινώσκω의 합성어입니다.
“정확하게 알다, 충분히 깨닫다, 분명히 인식하다, 경험적으로 깊이 알다.” 등의 뜻입니다.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 이상의 의미가 강합니다. 더 충만하고 분명한 인식 곧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인 인식, 복음에 대한 깊은 인식,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키는 인격적인 인식을 가리킵니다. 의문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거듭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성도는 비록 완벽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 정도는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전 삼고 내주하여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다면 생각, 판단, 결정, 행동, 말에 있어서 늘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 삼고 내주하고 계시는 형제와 자매가 자신의 이상이나 취향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버림받은ἀδόκιμοί”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승인되지 못한, 참됨이 드러나지 않은” 등의 뜻입니다. 금속을 시험했는데 불순물뿐이라고 한다면 인정사정없이 버려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도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인데 실상은 그리스도가 없어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불신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전하면서도 자신은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감히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외치면서도 자신은 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자신은 회개할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부어지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자신은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신은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자신은 지극히 유한한 이 땅에 왕국을 세우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종교적인 인간의 너무나 비참하고 어두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임하셔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내주하여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하나로 연합된 존재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머리와 몸, 신랑과 신부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반드시 언제 어디서나 함께 붙어 있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내주의 증거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 하나에도 대단히 민감해집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합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거룩한 싸움을 싸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는 두렵고 떨리는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으로 충만한 참된 확신입니다. 엄청난 위로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 곧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거룩한 처소處所 삼고 친히 내주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헬라어 원본에는 의미상 “너희 자신Ἑαυτούς”이라는 뜻의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는데 능한 저와 여러분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 친히 내주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줄곧 함께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향수 가게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향기가 몸에 밴 채 나옵니다. 본인은 익숙해서 잘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은 말투, 태도, 용서하는 방식, 도움이 필요한 약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전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전원에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빛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주하여 계신 사람은 분명 견디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평안합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전기가 흐르면 불빛이 나타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 머물러 계시면 반드시 삶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빈집이나 버려진 집은 아무렇게나 방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인이 들어오면 달라집니다. 청소도 하고, 고장 난 것도 고치고, 구조도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주인 되시면 저와 여러분 안에도 공사가 시작됩니다.
고치고 싶은 습관이 생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던 죄에 대한 찔림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돌이키고 싶어집니다. 불편한 일이 분명한데도 하고 싶어집니다. 저와 여러분을 거룩한 성전 삼고 임하여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침반이 언제나 북쪽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풍우가 거세게 휘몰아치면 흔들리기는 하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죄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식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따지고 또 따질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고 싶은 소원이 생깁니다. 어느 틈에 제자리로 돌아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기꺼이 거룩한 희생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지금,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저와 여러분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 중심에 모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고해인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힘겨운 상황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생각과 판단과 결정과 행동과 말 곧 삶으로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