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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박한영 대종사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Ⅰ.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 박한영 선사
1. 석전 박한영(朴漢永:1870~1948)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현 삼례읍 하리) 출셍
석전(石顚) 박한영 스님은 구한말 일제의 식민지 속에서 민족의 지도자요, 불교의 선구자로서 한국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면서 실천해 나간 분이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오세창, 이동영,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며, 만암, 청담, 운허, 경보 스님 등 출가자와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모윤숙, 김동리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라고 자칭했을 정도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셨던 분이다.
스님은 교(敎)와 선(禪)을 겸수한 고승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울 만큼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대석학이요, 교육자요 대종사였다.
다음은 박한영 선사에 대한 인물평과 그의 반일 성향의 일화 한 대목을 소개한다.
ㅇ. “박한영은 실로 대단한 학승(學僧)이었다.”
- 위당 정인보, 『석전상인소전石顚上人小傳』에서
ㅇ. “그는 내전(내전)이고 외전(외전)이고 모르는 게 없을 만큼 박식 했다.”
-육당 최남선, 『석전시초서문』에서
ㅇ. “ 아아, 그런디......., 오늘이 바로 일본 천황 생일이래여, 잘들 쉬어”
-1933년 4월 29일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정에서 10초 안 되는 교장의 천장절(天長節:일본 천황의 생일날) 식사(式辭)를 마치고 내려갔다.
2. 박한영 선사 약전(略傳)
<출생- 10대>
스님은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현: 완주군 삼례읍 하리)에서 아버지 성용(聖容)과 어머니 진양(晉陽)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출가 이전인 9세(1878년)부터 16세(1885년)까지는 통사와 사서삼경을 수학하면서 한문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
17세(1886년)되던 해 어머니가 완주 위봉사(威鳳寺)에서 금산(錦山) 스님의 생사법문(生死法門)을 듣고 전해주자, 이에 감동받아 출가를 결심하였다.
19세에 전북 완주군 위봉사의 암자인 소양면에 있는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여 금산스님에게 계와 법명을 받았다.
<20대>
21세에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幻應)스님에게 사교(四敎)를 배웠고,
23세(1893년)에는 선암사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大敎)를 이수했다.
25세에는 안변 석왕사를 비롯 신계사와 건봉사 등지에서 참선에 정진하였다.
26세(1895년))에는 순창군 복흥면에 소재한 구암사(龜岩寺)의 설유(雪乳)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27세(1896년 구암사에서 개당(開堂)하자, 수많은 학인이 모여들어 종풍을 크게 드날렸다. 그러나 구암사는 6.25 전쟁 때 공비의 거처가 될 것을 우려한 국군에 의하여 전소되어서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유물, 석전스님의 2만여 권의 책, 유품 등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30-40대>
39세(1908년) 되던 해, 석전은 경성에 올라와 만해, 금파 등과 불교유신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41세(1910년)에는 일본 조동종에 한국불교를 합종시키려 할 때 임제종 정통론을 내걸고 저지하였다. 이로써 북쪽에는 원종(圓宗), 남쪽에는 임제종(臨濟宗)이 할거하게 되었다.
석전 박한영 대종사
42세가 되던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자 두 종은 모두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43세(1912) 명진학교(明進學校)의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석전스님께서 주지로 계셨던 순창 구암사는 화엄사상을 이어받은 절이며 스님의 비석에는 화엄종주라고 새겨져 있다. 최근에 양자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화엄경의 요약이라고할 수 있는 법성계를 양자물리와 연결 짓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중첩은 법성계의 일즉일체 다즉일과 같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였다.
44세(1913년)가 되던 4월에는 서울 전동 조선불교중앙포교당에서 환등기로 여래팔상(如來八相)을 보여주는 현대식 방법을 통해 설법하기도 했다. 동년 10월 '조선불교월보'를 인수받아, <해동불보(海東佛報)>로 제호를 바꾸고 11월 20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이 <해동불보>는 이듬해 6월까지 통권 8호를 발행했다.
스님이 불교계 잡지를 통해 특히 강조한 것은 조선불교의 주체의식에 관한 것으로, 중국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를 벗어나 조선의 선(禪)과 교(敎)의 맥을 찾기 위해 조선불교 전적(典籍) 간행과 사적에 대한 연구가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스님은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를 제호를 바꾸어 자신이 직접 발간한 《해동불보(海東佛報)》를 통하여 종횡무진으로 불교계의 자각과 유신운동을 역설하며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50대>
1919년은 3·1운동과 만세시위로 민족의 단결력과 독립을 원하는 욕구는 어느 때보다 강하였다. 3월 7일 석전은 중앙학림 전임학장으로 선출되어 학림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9월에 스님은 이종욱 등과 함께 한성임시정부 발족의 경성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51세(1920년)에는 이능화(李能和) 김정해(金晶海) 김홍조(金弘祚) 등이 발기한 조선불교회 29명의 발기인으로 참여 했다. 그해 6월에는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회를 창립, 사찰령 철폐운동과 혁신운동을 전개했다.
52세(1921년) 11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에 홍포룡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53세(1922년) 5월 불교청년운동의 주축인 중앙학림을 향후 3년간 휴교하기로 결정했다. 3년 2개월만에 학장직에서 물러난 석전은 경전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55세(1924년)에는 《불일(佛日)》 창간 시 백용성과 함께 편집인을 역임하였으며,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의 명찰을 순례하면서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56세(1925년)에는 《조선불교총서(朝鮮佛敎叢書)》 간행의 일을 추진하였다.
57세(1926년) 10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 주지 동봉(東峰) 스님이 대원암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원하고 석전을 강사로 초빙하여 이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20여년간 석전은 불교계의 지도적 인재 양성에 주력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는 청담(靑潭) 운허(耘虛)스님을 비롯하여 신석정, 미당 서정주, 춘원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을 꼽을 수 있다.
59세(1928년) 5월부터는 불교전수학교에 출강해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집중적으로 강의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에서 7인의 교정(敎正)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조선불교 최고지도자로서 종단을 이끌었다.
<60-70대>
63세(1932년) 11월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 교장으로 선임되어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불교 중흥과 조곡광복의 인제 양성에 힘썼다.
64세(1933년)에는 중국의 불교유적을 돌아보았으며, 중일전쟁발발 이후 점차 노골화되는 일제의 황민화시책에 반대하여 석전 박한영 선사는 69세(1938년) 11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대원암에서 학인들에게 불전을 가르치고 불교계 잡지에 글과 시를 기고할뿐, 일체의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76세(1945년) 초 강원의 학인들을 떠나보낸 석전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북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겨 주지 매곡(梅谷) 스님께 "나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네"라고 말하고는 한가로이 만년을 보냈다. 광복을 맞은 불교계는 9월 22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새롭게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을 조직하였고, 초대 교정에 석전을 추대하였다.
79세(1948년) 음력 4월 8일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내장사 일실에서 입적하였다.
3. 저술
석전 스님은 단행본 형식의 번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다. 이런 스님의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와 글쓰기는, 구한말 서세동침(西勢東侵)의 상황 속에서 우리 겨레가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한국불교의 몽매함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가기 위하여, 온 몸과 정신의 역량을 쏟아 붓는 열정과 염원의 기도이기도 했다.
스님은 평생에 걸쳐 동서양의 수많은 글을 읽고 연마하였으며, 불교실학을 추구한 학승이며 저술가였다. 이러한 석전의 독서와 저술은 자신의 불교적 지성을 닦는 일이면서, 동시에 당대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던 불교적, 민족적 현실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 그 목표를 둔 것이었다.
석전의 저술은 《석전시초(石顚詩抄),1940》 외에 《정선치문집설.1914》, 《계학약전》, 《염송신편》(전 5권), 《불교사람요》 등 9책의 단행본과, 각종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100여 건이 넘는 논설과 수필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석전문초(石顚文鈔)》는 주로 그의 선사상과 지율엄정정신(持律嚴正精神), 그리고 시선교일여(詩禪敎 一如)의 중심 사상이 담겨 있다.
4. 석전과 조선 불교 임제종
석전스님께서는 1907년 금강산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과 공부를 하고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함께 서울로 오셨다.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조선불교를 일본에 갖다 바치려는 매종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이를 막기 위하여 1910년 구암사 주지로 계실 때 만해 한용운 스님, 백양사 만암스님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일으키셨다.
39세 되던 1908년 석전은 불교유신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만해(卍海), 금파(琴巴) 등과 불교개혁운동에 참가하였다. 1910년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 종래(鍾來) 등과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밝히고, 임제종을 설립하여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맞섰다.
조선총독부의 말살 정책으로 임제종 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의 하위 부속 불교가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4월에 한성임시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석전스님께서는 전북 대표로 참여하셨으며 태평양 회의에도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서명에 동참하셨고 1929년 조선불교승려대회에서는 조선불교교정으로 추대되었다.
스님께서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조선불교를 지켜내셨다.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하시며 인재 육성 활동을 하였다.
5. 석전과 제자들
-미당 서정주, ‘석전 대종사 부도 조성 기금 헌납’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독립운동으로 학교를 퇴학당한 뒤 스님께서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받아줌으로써 배움을 이어가고 문인이 될 수가 있었기에 스님을 평생 동안 스승님으로 모셨다고 한다.
일찍이 서정주 선생은 《어록》의 발사(跋辭)에서 “만해 용운 스님은 일찍이 석전 스님에게 바치는 한시(漢詩)들 가운데서 이 분을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보름달의 밝고 맑음에 비유하고 계시거니와, 그 도력의 청정하고 호연하셨음을 이렇게 흠모하여 표현해 놓으신 걸로 알며, 나도 또한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있다간 우리 석전 스님을 다시금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석전 스님은 1948년 정읍 내장사에서 열반했다. 그런데 기금이 부족하여 그때까지 부도(浮屠)를 조성해드리지 못했다. 부도는 고승들의 사리탑을 이르는 말로, 부도를 조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일반인으로 치자면 묘를 쓰지 못한 경우나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미당은 죄송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설마 큰스님의 부도조차 못 모셨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 출판사로부터 노자 『도덕경』 번역을 부탁받았던 미당 서정주는 번역을 마치고 받은 원고료 전액을 석전 대종사 부도 조성 기금으로 헌납했다. 이리하여 부도탑과 탑비는 석전 스님이 열반하신 정읍 내장사에 조성되었는데, 내장사 안내서에 2013년에 부도가 조성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식견을 가진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만해 한용운을 비롯하여 변영만·정인보·오세창·이동영·이능화·최남선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스님과 교류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출가 제자로는 만암·청담·운허·운성·운기·남곡·경보 등이며, 재가 제자로는 서정주를 비롯하여 신석정·조지훈·모윤숙·김동리 등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중앙불교전문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스님께서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전국 유람 하였다. 스님의 백두산행 때 옆에서 모신 젊은 시절의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고, 그 때 받은 가르침이 후일 최남선이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되었다. 이 때 육당 최남선은 스님께서 읊으신 한시들을 '석전시초'라는 책으로 펴내서 선사하셨다
정읍 내장사 부도전(浮屠殿)
-제자들과의 일화-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ㅇ라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스님의 활달한 재치와 통찰력을 엿보게 하는 거시적 안목의 한 일화가 아닌가 한다.
6. 석전의 한시(漢詩)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 해 (曉日天池浴)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虹霓斷復連)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光風吹瀨急)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구나. (蕩破西峯煙)
스님의 백두산행 때 옆에서 모신 젊은 시절의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고, 이 때 받은 가르침이 후일 최남선이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해인사에서
날은 차고 낙엽 지는데 범종소리는 잦아들고 (天寒木落梵鐘稀)
먼 길 나그네 숙연하게 느지막이 돌아가네. (遠客蕭然向晩歸)
눈 온 뒤 영봉에는 삭막한 기운 감돌고 (雪後靈岑多戍削)
안개 속 암자의 나무도 희미하게 보이는구나. (煙中庵樹却依微)
좋은 샘물은 나와 친하여 가는 발길 멈추게 하고 (名泉慣我留飛屧)
산사에는 사람이 없어 저녁 햇살만 비추누나. (法苑無人感落暉)
게을리 떠가는 흰 구름 무료히 바라보며 (悵望白雲如我嬾)
돌이끼 옷에 물든 줄 까마득히 몰랐네. (澹忘石翠已霑衣)
어둑어둑 어둠이 찾아드는 고즈넉한 해인사 경내, 나그네 발길마저 끊겨 귀가 길을 서두르는데, 한가롭게 뉘엿뉘엿 져가는 흰 구름 무료하게 바라보면서 망아의 경지에 든 선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흥사에서
문에 다다르자 그윽한 향기 이상히 여겼는데,
연못의 붉은 연꽃이 막 피려 함이었네.
맑음과 진(眞)에 접하였으며
묘법(妙法)에 통한
티끌을 떠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뿐이네.
갓 피어오른 연꽃에서 전해오는 맑은 향기에 취해 진흙 속에서 맑음과 진(眞) 그리고 진공묘유의 법열에 잠긴 선사의 일면을 엿 본 듯 시상이 맑고 깨끗하다.
Ⅱ. 석전의 불교 사상과 실천궁행
1. 석전의 불교사상
1) 겸전사상(兼全思想)
석전의 생애와 그 저술을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석전의 불교관 내지 불교사상은 스님의 사상적 법맥 계보에 비취서 판단할 수 있다. 즉 서산휴정의 선교일치(禪敎一致) 사상이 석전에게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향 아래 형성된 석전의 승풍은 선수행(禪修行)과 포교(布敎)를 겸전한 선사상이라 하겠다.
우선 스님의 기본 불교사상으로 겸전정신을 살펴보자. 이것은 불교의 기본 강령인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겸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불도에 들어가는 세 가지 요체(要諦). 곧 계율(戒律)•선정(禪定)•지혜(智慧)의 준말로, '계(戒)'는 몸•입•뜻으로 범할 나쁜 짓을 방지하는 것이고, '정(定)'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여 안정하도록 하는 것이며, '혜(慧)'는 진리를 깨닫는 지혜이니, 이 셋은 서로 도와 수행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계(戒)에 의하여 정(定)을 얻고, 정(定)에 의하여 지혜(慧)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학겸수의 정신은 한국불교의 전통인 통불교(通佛敎)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석전은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산중에서 명맥을 이어온 선사상의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중과 떨어진 산중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 시대와 대중을 적극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겸학(兼學)정신을 강조하였다.
선(禪)·교(敎) 겸전에 관한 문제는 선이 유입된 이후 조선대에 이르도록 강조되어 왔던 것으로 한용운도 “선·교를 떠나 불교를 말할 수 없나니 선·교가 곧 불교요, 불교가 곧 선·교이다. 교(敎)로써 지(智)를 득하고 선(禪)으로써 정(定)을 득하는 것이다.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궐할 수 없는 것이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의 흥쇠를 영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겸학정신은 그의 불교사상과 학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유신운동을 중심으로 한 스님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2) 지율엄정(持律嚴正)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라고 하였듯이 스님은 철두철미한 지율엄정(持律嚴正)을 강조하였다. 당시는 조선불교의 쇠미와 일본불교에 크게 영향되어 계율이 크게 해이되어 지계정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에 의해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고 그 시행규칙이 차례로 각본말사에 실시됨에 따라 관권을 배경으로 한 주지들의 전횡과 부패가 자행되고 있었다.
스님은 철저한 지계 생활로 많은 승려들의 모범이 되었다. 40여 년간을 서울 도심 속에 살면서도 철저한 지율 생활을 하였다. 문하생 신석정은 탈속 고결한 스승의 풍모를 ‘명경지수(明鏡止水)’와 ‘설중매화’에 비유하고 있었다.
석전은 당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육식(帶妻肉食)’에 대해 경각심으로 4바라이의 순서를 살(殺)·도(盜)·음(淫)·망(妄)에서, 음·살·도·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보살도 정신과 크나큰 서원을 세울 것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경구죄(輕垢罪: 큰 죄는 아니지만 허물이 될 수 있는 잘못)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젊은 승려를 계율로써 무장시키고 교육하여 무엇보다도 쇠퇴한 전통불교와 타락한 권승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불교의 기틀을 다지고자 한 것이다.
또한 스님은 선수행자들의 그릇된 무애행(無碍行: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하는 삶)을 크게 개탄하면서 계율에 대한 해이와 오해가 불교 쇠퇴의 큰 원인이 되고, 그 결과 민중과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교화의 기반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3) 교학사상(敎學思想)
석전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어 지율엄정과 선·교 겸수하면서도 특히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선의 실참(實參:마음을 화두나 공안에 올인(All In)하는 것)보다는 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강학(講學)으로써 당시 불교계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3대 강백’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4) 선사상(禪思想)
석전은 겸학을 강조하며 철저한 지율엄정의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선(禪)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불교의 정통 종맥으로서 임제종 운동을 펼쳤으며, 직접 《정선염송급설화》를 저술하여 교재로서 강의하였다.
당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으며, 급격히 변화하는 격동의 소용돌이에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음하게 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불립문자’를 고수하는 선(禪)만으로는 승려 및 일반 대중을 개화시킬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다.
2. 도제양성과 대중교화
1) 승려·청년교육
석전은 불교계의 문제를 외적인 원인보다는 내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불교가 노후한 것은 불교계의 교육이 불완전하기 때문으로 보고, 불교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하여 승려 교육과 대중교화에 일평생 매진하였다. 이것은 일제하 많은 민족주의 선각자들이 구국(救國)의 길은 오직 민중의 교육에 있다고 자각하고 이를 실천하였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2) 대중교화
석전은 불교개혁의 주체인 청년 불교인의 육성을 강조하고, 또한 이를 직접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불교중앙학교의 교장을 지내고, 서울 개운사에 대원강원을 설치하여 20여 년간 진력하였으며, 1929년 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후학을 지도하는 등 그의 생애 대부분을 승려교육·도제양성에 힘썼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일본불교에 의한 포교소, 출장소 등과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대한 위협은 조선불교 지도자들을 반성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문에 종래의 고립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포교활동을 강화하여 대중불교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포교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는데,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포교사, 포교 교재가 중요 문제였다.
그리하여 석전은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문서포교를 중시하여 미신포교를 지신(智信)포교로, 이론적인 포교를 실천적인 포교로, 과장된 포교를 실질적인 포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인식 아래 권상로가 창간한 불교잡지 《조선불교월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불교월보》가 정간되자 제호를 《해동불보》로 바꿔 1913년 11월 발간하였다. 이 외에도 석전은 《해동불보》, 《불일》 등에 직접 참여하여 대중교화를 선도해 나가며 불교유신운동을 적극 전개해 나갔다.
그런가 하면, 대중교화에 있어서 그 시대의 변천과 민지의 발달로 그 포교의 내용과 방법이 시대에 맞아야 한다고 보아, 그 개선책으로 〈불교와 세신(歲新)의 상화(想華)〉의 글을 통해 6개 조항을 들고 있다.
① 불교인의 수행인 계·정·혜(戒·定·慧) 의 중시
②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
③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키울 것
④ 성심으로 도를 펴고 산업을 일으켜 사찰과 자신을 두호할 것
⑤ 자선사업, 사회사업 등
이 모두가 곧 불교를 일으키고 대중교화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라 하겠다.
Ⅲ. 맺으면서
석전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두 번에 걸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정을 역임한 당대 불교계의 최고지도자였다. 평생 동안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일생을 후학양성과 불교유신운동에 힘 쓴 학승으로 계·정·혜 삼학과 이타행을 실천하면서도, 정통 불교의 건립과 학교 설립에 의한 인재 양성과 포교 등 한국불교에 미친 업적은 참으로 지대하다. 그래서인지 당대의 석학들은 스님을 모시고 싶어 했다.
1945년 초 강원의 학인들을 떠나보낸 석전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북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겨 주지 매곡(梅谷) 스님께 "나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네"라고 말하고는 한가로이 만년을 보냈다.
광복을 맞은 불교계는 9월 22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새롭게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을 조직하였고, 초대 교정에 석전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교정으로 추대된 후에도 그는 서울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정신적인 지도자로 만족하였다. 마침내 석전은 1948년 음력 4월 8일 세수 79세, 법랍 61세로 내장사 일실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은 지(知)와 행(行)을 하나의 일원상(一圓相)으로 보고 지(知)에만 편중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며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을 제시하고 있다. 스님이야말로 평생을 지행합일을 실천에 옮기신 분이었다. 요즘 새로운 각도로 스님의 독립운동을 밝히는 움직임도 있다. 각기 분야에 따라서 좀더 심층적인 연구가 많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 참고문헌
효탄, 「근현대불교인물탐구⓵ 박한영」, 불교평론, 2010
선운사주지 법만, 『석전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 선운사, 2009, 9, 20
남성원, ‘박한영 대종사’, 문중13회 카페, 2017. 5.6
완주군청, ‘한말 불교를 재흥한 박한영’, 『전설의 고장 박한영』, 19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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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보름달의 밝고 맑음에 비유하고 계시거니와,
그 도력의 청정하고 호연하셨음을 이렇게 흠모하여 표현해 놓으신 걸로 알며,
나도 또한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있다간
우리 석전 스님을 다시금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저도 석전 스님의 도력이 청정하고 호연지기가 하늘에 충천하고 싶네요!
< 스님은 지(知)와 행(行)을 하나의 일원상(一圓相)으로 보고
지(知)에만 편중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며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을 제시하고 있다. >
일원상과 지행합일은 원불교의 교리와 많이 상통하네요!
이언 김동수 교수님!
고맙습니다.
<석전 박한영 대종사>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한국불교를 중흥 시킨 위대한 선승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