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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호
[저자와의 대화] 중국 대표 작가 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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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현대 중국의 대표작가다. 주로 문화혁명기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데 평범한 인물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에 관한 것들이다.
위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사였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자신이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위화 역시 정부에서 배정해 준 대로 치과의사가 됐다. 시내 중심가의 병원에서 근무했던 위화는 썩은 이를 뽑기 위해 남의 입을 들여다보는 일보다 창밖 내다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입 냄새 대신 활기가 있었다.
특히 그의 눈을 끈 것은 병원 근처 문화관엘 들락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좁은 방에 갇힌 치과의사와 달리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오고갔고, 늘 놀면서도 잘먹고 잘사는 듯했다. 그 사람들에게 위화가 물었다.
'당신들은 일은 안 하고 종일 왔다갔다, 돌아다니기만 하는군요?'
'우리 일은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오.'
'그래요? 그렇게 좋은 직업이 있었군요.'
위화는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원한다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글 솜씨를 증명해야 했다. 위화는 몇 편의 글을 썼고, 1983년 베이징의 한 문학잡지 편집인의 눈에 띄었다.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달려가 편집인이 던져주는 글의 교정을 봐주기도 했다.
'당신, 글재주가 상당하다. 이 뽑지 말고 문화관에 들어가도 좋다.' 그래서 위화는 작가가 됐다.
치과의사가 작가보다 편안하고 안정된 수입을 얻는 직업 아닐까? 그러나 위화가 말하는 중국의 치과의사는 한국의 치과의사와 달랐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가난했고 작가도 가난했다. 그러나 치과의사는 고생하면서 가난했고 작가는 자유로우면서 가난했다. 나는 이를 뽑는 일보다는 글을 쓰는 게 좋았다."
치과 의사생활에 대한 위화의 불만은 그의 작품 '형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치과의사를 의사로 부르지 않고 '뽑치'라고 부르며 고상함과 거리가 먼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화의 작품에는 문화혁명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문화혁명의 정치적 의미를 이야기하거나,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다. 한 가족이 작품의 중심에 등장하고 그 가족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어갔는가, 문화혁명이 한 평범한 가정을 어떻게 무너뜨렸는가를 이야기한다.
'허삼관 매혈기'는 허삼관의 일대기, '살아간다는 것'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한 노인이 돼 버린 복귀의 인생, '형제'는 돈과 출세를 최대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이광두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의 진흙탕 같은 삶을 이야기한다.
위화의 소설이 시대성을 강하게 띠고 있지만, 개인사로 읽히는 것은 '일대기'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일대기 모양을 취한 덕분에 갖가지 사건은 피부에 훨씬 잘 와닿는다. 물론 이 점은 위화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한 개인사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위화의 작품이 개별적인 가족사로 보이지만 중국의 근대사로 확대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작품의 성격이 그렇고, 작가 역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중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위화는 자신의 작품에 유난히 문화대혁명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책이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접한 책은 모택동 선집과 루신의 작품이 전부였다. 당시 유행했던 대자보 읽기가 내 독서였다. 대자보에는 거짓말과 공격, 무고, 폭로가 넘쳤다. 사람들은 갖가지 죄목을 발명하고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웠다. 대자보에 실린 범죄들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학교를 오고가면서 대자보를 읽었다."
소설가는 흔히 원고지 위의 제우스라고 불린다. 신처럼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과 외모를 결정하고, 판단한다. 등장인물은 어떤 경우에도 작가가 정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작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셈이다. 그러나 위화는 다르게 말했다.
"이전에 단편소설을 쓸 때는 그랬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설 속 인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스스로 말을 할 줄 안다. 나는 인물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한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탄생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 '발견' 덕분일까. 위화는 요즘은 거의 장편소설만 쓴다. 국내에도 단편집이 번역돼 있지만 많지 않다. 더불어 그의 초창기 단편소설은 실험적인데다 상징도 많아 (적어도 한국 독자에게는)장편보다 어렵고 재미도 덜하다.
위화는 작가의 고뇌 혹은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사건과 사건의 연결이며,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다. 그는 뛰어난 관찰자로서 소설을 쓴다. 그러나 관찰만으로 좋은 소설을 쓸 수는 없다. 오직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르포 작가' 혹은 '다큐멘터리 작가'가 됐을 것이다.
위화는 "현실을 그대로 문학으로 옮겨놓으면 문학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문과 방송에 실리는 사건 사고를 소설적 언어로 소설책에 옮겨놓는다고 문학이 될까? 그 실제사건이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관찰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통찰력이라고 했다. 사실 그대로 보이는 것 외에 무엇을 볼 것인가? 사실 이면에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어떻게, 왜 볼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위화는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러나 통찰력으로 방향을 잡아주지 못한다면, 상상은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전락할 것이다"고 했다.
위화의 소설에는 어려운 말이 없다. 복잡한 문장도, 특별한 복선도 없다. 독자를 놀라게 하는 반전도 없다. 그럼에도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중국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상상력과 이 상상력의 방향을 잡아줄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똑 같은 중국 문화대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위화의 소설이 유독 아프게 와 닿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위화는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슬프다고 말하지 않고도 슬픔을 전달하는 법을 안다. 그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한 장면은 '설명하지 않는, 신음소리 없는 아픔'이 얼마나 진한 아픔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난한 복귀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이었다. 아이는 달리기를 무척 잘했다. 아이가 맨 앞에서 달리면 사람들은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물었고, 복귀는 자랑스러웠다. 달리기를 잘해서, 어쩌면 '자신이 무너뜨린 집안'을 일으켜세울지도 모를 아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달리기 솜씨는 오히려 불행이었다. 신작로를 날 듯이 뛰어서 학교로 갔던 아이는 죽어서 돌아왔다. 여자 교장이 출산 중 피가 모자랐고, 튼튼한 아이들이 수혈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장 빨리 달렸던 아들은 맨 먼저 병원에 도착했고, 수혈을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다'는 아이의 말에 간호사는 '피 뽑으면 원래 어지러운 거야'하며 죽을 때까지 피를 뽑았다>
이 장면은 복귀의 아들이 수혈 중에 죽는 슬픈 장면이며 중국의 전근대성, 폭력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위화는 장편소설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중국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장편소설 '형제'는 문화혁명과 현대사회에 대한 작가의 불편한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다.
위화는 "나는 문화대혁명도 현대사회도 비판하고 싶다. 나는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입센의 말을 생각하며 소설을 쓴다. 나는 중국 사회의 거대한 병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병자'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형제'를 쓴 이유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위화는 매우 솜씨 있는 사회참여 작가이다.
조두진기자
▷위화는… 1960년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항저우(抗州) 출생. 1983 년 단편소설 '첫번째 기숙사'로 데뷔. '가랑비 속의 외침'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내게는 이름이 없다' '허삼관 매혈기' '살아간다는 것(최근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형제(전 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