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서사의 위기』
가. 서사의 위기
요즈음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스마트폰 속에는 다양한 뉴스, 온갖 게임, 사진자료와 영상 자료 등은 물론 매신저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려놓은 글을 읽을 수도 있다.
대화는 단절되고 그 자리는 ’공감‘이라는 버튼 누르기가 대신하고 있다. 공감 버튼을 교류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교류에 진정한 공감은 없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글과 영상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뉴스라는 스토리를 좇느라 방향도, 의미도 잃은 채 떠밀리고 있다. 스마트폰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사회는 온통 자극적인 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이처럼 자고나면 새로운 이슈들이 범람하여 우리의 사고 체계를 마비시키고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 속에서 방황한다.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제목 그대로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에 대해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나. 이야기에서 정보로
이야기는 경험을 먹고 자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든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다. 전승되는 지식, 즉 서사는 정보와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 온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원격성은 점차 무간격성에 자리를 내주며 점차 사라져 간다. 무간격성은 정보의 특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보는 쉽게 다음 정보로 교체되어 가치를 잃는다.
정보는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새로운 존재형식, 즉 새로운 지배형식으로 변해왔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정보체제가 자리 잡는 고정이 억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혹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스마트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마트한 지배는 그 존재를 특별히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이들은 자유와 소통의 탈 안에 숨어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교류에 몸을 내맡긴 상태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다. 경험의 빈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라. 설명되는 삶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데이터가 이야기보다 더 가치 있다. 서사적 성찰은 요구되지 않는다. 자전적 이야기는 지난 경험에 대한 후속적 성찰, 즉 기억에 대한 의식적 작업을 전제한다. 그러나 데이터와 정보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생성된다.
디지털은 인간을 이야기. 기억, 성찰이 아닌 숫자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심박수, 혈압, 체온, 움직임, 수면 프로파일 데이터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다양한 센서를 부착한다. 심적 상태와 기분은 주기적으로 기록된다. 전체 삶의 기록에 아무것도 탈락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빠짐없이 기록된다. 경험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재생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기억은 불가능하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뿐이다.
마. 벌거벗은 삶
서사의 위기인 근대의 실존적 위기는 ‘삶의 이야기가 산산이 와해’된다는 데서 발발한다. 이 위기의 문제는 ‘사느냐, 아니면 이야기하느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삶이 더 이상 동시에 이야기될 수는 없어 보인다. 전근대에는 삶이 이야기 속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외면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보다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된 것, 금지된 것 또는 은폐된 것의 뜨거운 외설이 아닌 투명성, 정보, 소통의 차가운 외설을 논해야 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바. 세계의 탈신비화
이야기하는 능력의 상실은 세계의 탈신비화에 책임이 있다. 탈신비화란 ‘사물은 존재하나 침묵’하는 것이다. 즉 사물들에게서 신비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단순히 ‘눈앞의 존재’를 이루는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현사실성과 서사성은 상호 배타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정보의 관점에서 먼저 인식한다. 정보에는 먼 거리도 폭도 없다. 정보는 거친 폭풍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빛도 담지 못한다. 정보에는 아우라적 공간이 없다. 그렇게 정보는 세계를 탈아우라화하고 탈신비화한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정보와 반대된다.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 종결형식이다. 둘은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우리는 신화적 장면을 회고하는 이야기할 능력마저 상실해 가는 중이다.
사. 치유의 스토리텔링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넘침에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병원에서조차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의사들에겐 이야기를 경청할 시간도 없고, 인내심도 없다. 심리치료와 정신분석만이 여전히 이야기의 치유력을 상시키고 있을 뿐이다.
경청과 어루만짐도 치유력이 있다. 촉각적 이야기로서 접촉은 고통과 질변으로 이끄는 긴장과 막힘을 풀어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점차 커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접촉은 우리를 자아 안에서 밖으로 꺼내준다.
접촉의 빈곤은 결국 세게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를 우울하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다지털화는 이러한 접촉의 결핍과 세계 빈곤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로티델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아. 이야기 공동체
옛날 시골을 가면 마을 어귀에 수령이 오래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쯤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의례히 널찍한 평상이 놓여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옛날 마을은 이야기 공동체였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공동체 이야기는 자기실현의 모델인 개인 서사로 눈에 띄게 분해되어 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공동체 형성 서사의 생성을 방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그 결과로 우리에겐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매우 부족하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 서사가 공동체를 잠식한다. 자기표현의 형식으로 개인적인 것을 게시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자. 스토리셀링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데이터는 서사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데이터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데이터는 감정보다는 지성을 더 활성화한다. 특히 스토리텔링은 마케팅에서 활용된다. 자기 자체로는 가치 없는 사물을 가치 있는 재화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치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비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약속하는 서사다.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물 자체보다 서사를 더 많이 소비한다. 서사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장소의 특별한 이야기마저 상업화한다.
이제는 정치인들도 이야기가 팔린다는 걸 알고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한 싸움에서 서사가 주장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게 서사는 정치적으로 도구화된다.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된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차. 정보화된 사회
정보화된 사회에 사람들은 말초적 자극이 발달하여 긴 이야기를 지루해 한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메신저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인류가 그 동안 쌓아올렸던 오래된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점차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대부분의 대화는 스마트폰에서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공동체를 만드는 서사는 사라졌다. 서사, 즉 이야기 속에는 삶의 지혜가 풍부하고 그 동안 응축되어온 인간의 지식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이 정보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사회는 점차 디지털 정보로 압축되고 마침내 사람들도 그러한 정보의 한 조각으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보면 조지 오웰이 쓴 ’빅 브라더‘에서 드러내 보인 그런 사회로 탈바꿈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디지털 정보에 삶을 자기도 모르게 물들어 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삶이 익숙해질 것이고, 마침내 디지털 정보의 지배하에 예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징조는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깊은 생각 없이 삶은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는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은 의미가 없다. 그저 입력한 정보를 되뇌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가 사라진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공동체 이야기를 회복시키기를 갈망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서도 개운하지가 않다. 아무래도 책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내 무지의 폭이 너무 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