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윌러비 가족> 로이스 로리, 2008
아이들의 혹은 어른들의 가슴 속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기엔 어쩐지 껄끄럽거나 부끄러운 욕망이 존재한다. 물론 그건 우리가 너무나 바라고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문득 한 번씩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생각나거나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도리질치며 지워버렸을 그런 상상들이다. 살면서 거의 이루어질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한 번쯤 혼자 머릿속으로 떠올렸을 생각이다. 대체로 부모자녀 관계란, 가족이란 너무 가깝고 사랑하기에 미워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지만 그 자체로 죄책감을 일으키는 그런 존재다.
특히 어린이들은 그러한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을 대체로 스스로 잘 처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깊숙히 억압해버리곤 한다. 그러한 면에서 옛이야기는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숙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브루노 베텔하임 <옛이야기의 매력>)
로이스 로리의 동화 <무자비한 윌러비 가족 (원제: The Willoughby)>은 아예 시작부터 이건 ‘옛이야기의 패러디야.’라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옛이야기에 나옴직한 윌러비 가족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일들을 겪는다. 예를 들면 아주 귀엽고 작은 아기가 현관 문 앞에 나타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옛이야기를 번번이 비틀어버린다.
헨젤과 그레텔을 감명 깊게 읽은 윌러비 가족의 ‘친’부모는 아이들을 내버릴 궁리를 하고, 아이들은 부모가 영영 사라져 고아가 되길 소망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 책은 모든 등장 인물들의 욕망을 하나씩 철저하게 이루어준다. 그 과정은 몹시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고 통쾌하다. 결국, 윌러비 부부는 아이들을 두고 집을 팔아버리고 둘이 떠난 여행길에서 멋지게(?) 죽고,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아이들은 메리포핀스와는 전혀 다른 보모를 만나서 잔소리 없이 맛있는 밥만 주는 누군가와 살게 되고 마침내 비현실적인 부자 멜라노프 사령관의 자식으로 입양된다. 부인과 자식을 잃은 멜라노프 사령관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 덕에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잃어버린 아들도 돌아온다. 남편이 지긋지긋했던 멜라노프 부인은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우체국장을 만나 사랑을 이루고, 우체국장은 이국의 신비로운 여인과 운명적으로 사랑을 이룬다.
아마도 동화 <윌러비 가족> 안에서 아이들이 발견한 욕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고아가 되는 것/ 동생을 갖다 버리는 것/ 어마어마한 부자 아빠가 생기는 것/ 밥만 차려주는 보모가 있는 것/ 바보같이 굴 때마다 형제끼리 서로 타박해도 혼나지 않는 것.
<윌러비 가족>에서는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의 숨겨놓은 욕망 또한 보여준다. -아이들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 멋진 새 배우자를 만나는 것/ 내버려둬도 애들이 훌륭하게 자라는 것/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나를 구원해 주는 것/ 낳지도 않은 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
코로나로 그 어느 때보다 가족과 가까이 지내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불을 뿜었다가 사랑이 넘쳤다가 오락가락 하고 있다. 혼란한 시대에 맞이하는 무사한 하루에 대한 감사와 내 배고픔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차려 내야 하는 고달픔의 이중적인 감정이 널을 뛴다. <무자비한 윌러비 가족>을 읽으며 나는 무자비한 엄마가 되었다가 가여운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가 초코바 개발에 매진하는 사령관도 되어 깔깔 웃어본다. 그렇게 나의 고이 접어둔 욕망을 살짝 건드려 가며 책을 읽어나가고 있는데, 두 아이가 와서 “엄마,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라고 묻는다. 아이들에게 대강 내용을 설명해주며 “너무 웃기지 않아?”라고 묻자 아이들이 약간 어이없어하며 되묻는다. “헐! 엄만 그런 걸 원해?” ‘당연히 그렇지 않다’라고 한 나의 대답은 거의 진심이었다. 나는 이미 <윌러비 가족>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옛이야기가 아이들의 내면의 성숙을 은근히 도와주었다면 이 패러디 동화는 대놓고 무자비하게 통쾌하고 재미있다. 현실에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진짜라면 비극이 되어버릴 숨겨진 욕망들은 이야기 안에서 재미있게 비틀어지고 비뚤어져서 ‘안전하고 충분하게’ 이루어졌다.■
☞이 책을 읽고 들으면 좋은 팟캐스트
<침튀겨도 괜찮아> 24회
http://podbbang.com/ch/17057?e=23907862
첫댓글 '아이들이 발견한 욕망'에서
어렸을 때 나의 욕망을 발견,
예를 들면
'고아가 되는 것'
'어마어마한 부자 아빠가 생기는 것' 따위~.
이야기를 비틀며 독특한 재미를 주는 작품같아요. 추천감사합니다. 이번 기회에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옛이야기의 패러디였다니.., ㅎㅎ 이제야 무릎을 치는 저는, 어휴... ㅠㅠ
덕분에 다시 읽어보고싶어졌어요^^
인생 책을 만났습니다^^ㅎㅎ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행복할 수가... 강렬한 캐릭터들의 향연이네요.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