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이공 묘갈명 병서(處士李公墓碣銘幷序)
매죽 처사(梅竹處士) 이공의 묘는 용수산(龍壽山)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장례를 치른지 89년이 지나 그의 증손 이조참의 중두(中斗) 군이 그릇되게도 묘갈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노쇠하고 비루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택순(宅淳)이고 자는 우규(于揆)로,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선생이 9세조가 된다. 선생의 뒤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동암(東巖)이다.
5세를 지나 수약(守約)은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관(世觀)을 낳았으니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호는 목우당(牧牛堂)이다. 귀원(龜元)을 낳았으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식호당(式好堂)이다.
이분들이 공의 3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생원 헌복(憲復)의 딸이다.
공은 영조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나 경오년(1798, 정조 22)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남달랐고, 기예와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기에 글을 짓는 모임에서 번번이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윽고 장성해서는 엄정하고 강의하며 신중하여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정승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몸을 낮추어 독서하였는데, 사서(四書)에 근본을 두고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그 이치를 꿰뚫어보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성현들의 입언(立言)한 본뜻을 참되게 얻고자 하였다. 언론(言論)은 근거가 있어 절대로 허황되게 과시하는 태도가 없었기에, 이로써 시대적 추세와 맞지 않아 불우하게도 영락하였다.
이에 ‘경운조월(耕雲釣月’ 01) 네 글자를 벽에 써놓고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었다.
궁벽한 산속에 자취 감추어 시끄러움 사양하고 / 窮山斂跡謝紛紛。
늦봄 동교에서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네. 02) / 春晩東郊植杖耘。
인간 세상 돌아보니 모두가 세토라 / 回視人間皆稅土。
고향으로 돌아와 날로 구름을 경작하네 / 還歸故里日耕雲。
늘그막에 낚싯대 매고 낙강 가 낚시터에 드리우니 / 晩荷長竿下洛磯。
물가 난초 언덕 지초 이슬 먼저 마르네. 03) / 汀蘭岸芷露先晞。
하수의 방어, 04)는 시장으로 다 가버리어 / 河魴盡向市門去。
산속 늙은이 달빛만 낚아 돌아오네 / 由是山翁釣月歸。
또 매죽으로 그 헌을 이름하여, 오로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힘을 다하려는 뜻을 두었으며, 선대 유학자들이 논변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설(理氣說) 등을 가지고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항상 눈을 떼지 않았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부모를 모실 때는 마음과 몸을 다 같이 편안하게 모시는 봉양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연로하여 멀리 나가 놀지 않았으며, 일이 있어 나갔을 때도 밖에서 이틀 밤을 묵지 않았다. 상중에는 상복을 벗지 않았고, 묏자리를 골라 편안히 모시는데, 반드시 정성과 신실함을 다하였다.
생일날에도 잔을 들지 않았고, 종신토록 새벽 사당배알을 폐하지 않았다. 형제가 한곳에 같이 모여 지내며 종일토록 화기애애하였다. 다섯 번째 동생 참판공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벼슬하기까지 공의 지도를 가장 많이 받았다.
일찍이 주자와 퇴계 선생의 글 중에 수용하기에 절실한 것을 뽑고 초楚나라 『이소경(離騷經)』이하 당(唐)․ 송(宋)의 여러 대가의 글까지 다 모으고 편집하여 『금총옥설(金叢玉屑)』이라 하고 건네주었다. 후손들의 학업 계승을 장려하고 훈육하여 성취하는 바가 많았으니, 사양좌(謝良佐)가 ‘극기(克己)는 모름지기 자기의 성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것부터 극복해 나가야 한다.’ 05) 라고 한 말로 교도하고 변화시키는 요체로 삼았다.
기개는 우뚝하고 도량은 넓고 깊었으며, 비루하고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고 게으르고 오만한 태도를 몸에 지니지 않았으니, 그 모습을 대하거나 말을 듣게 되면 감히 그릇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만년에 성품과 도량이 준엄한 것 때문에 명시(銘詩)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뜻을 세워 행동하는 것이 응당 푸른 하늘의 해와 같아야 조금의 사악함이나 왜곡됨이 없나니,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평생토록 스스로 검속하여 이 말에 거의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은 빼어난 자태로 가학의 실마리를 찾아,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면서 혹시라도 실추시키지 않았다. 한 집안에서 혁혁한 고관대작이 배출되었으니 공이 진실로 그 근원을 넓힌 것이고 역시 훌륭한 가문을 잘 계승한 자라고 이를 수 있다.
부인은 은산박씨(殷山朴氏)로, 학생 수겸(守謙)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휘양(彙陽)은 참봉(參奉)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출계하였고, 휘성(彙成)은 통덕랑(通德郞)인데 문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두 딸은 권별(權O)과 권현상(權顯相)에게 각각 시집갔다. 휘성은 2남을 두었는데, 만송(晩松)은 정언(正言)이고, 만백(晩柏)은 통덕랑이다. 휘양은 2남을 두었는데, 만수(晩受)와 만희(晩羲)로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딸은 생원 이석규(李錫圭)와 생원 김기선(金驥善)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별의 2남은 동규(東奎)와 동벽(東璧)이고, 세 딸은 이정우(李庭羽)․ 임진원(任鎭遠)․ 박주승(朴周昇)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현상의 대를 이은 아들은 주환(胄煥)이다.
만송의 아들은 중룡(中龍)이다. 만백의 맏아들은 중건(中鍵)이고 둘째 아들은 바로 이조 참의 중두(中斗) 군이다. 만수의 아들은 중민(中敏)과 중진(中振)이고, 만희의 아들은 중영(中英)이다. 중용의 대를 이은 아들은 국호(國鎬)이고, 중건의 대를 이은 아들은 학호(學鎬)이다.
중두는 3남을 두었는데, 학호(學鎬)와 국호(國鎬)는 출계하였고 필호(弼鎬)가 있다. 중민의 아들은 명호(命鎬)이고, 중진의 아들은 풍호(豐鎬)이고, 중영의 아들은 정호(正鎬)와 출계한 근호(覲鎬)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비는 자신의 몸에서 닦아 / 士修于躳。
궁해도 손해라 여기지 않네 / 窮不爲損。
대대의 가훈은 아름답고 / 世訓之懿。
경전의 뜻을 참되게 하였네 / 經旨之眞。
온축됨이 이미 깊으니 / 蓄之旣深。
그 드러남이 혁혁하였네 / 其發斯赫。
내가 전수받음 있으니 / 我有所受。
감히 밝은 정성 실추하랴 / 敢墜明誠。
작은 집에 자취를 감추고 / 斂跡衡茅。
매죽에 흥취를 붙였네 / 托趣梅竹。
몸소 밭 갈고 낚시질하노니 / 我耕我釣。
운월이 냇물에 넘실거리네 / 雲月滿川。
남긴 풍모 맑고 깨끗하니 / 遺風灑然。
후인들은 길이 공경하리라 / 來世之敬。
<끝>
[주해]
01) 경운조월(耕雲釣月)
은자(隱者)의 고답적인 생활을 형용한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관사복(管師復)이 숭산(崇山)에 은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느냐?”라고 묻자, “언덕에 덮인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못에 가득한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네.[滿塢白
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라고 한 데서 전하였다.(問奇類林)
02) 지팡이……김매네.
논어 『미자』에 “자로가 묻기를 ‘노인은 우리 부자(夫子)를 보았습니까?’ 하니, 장인(丈人)이 ‘사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오곡을 분별
하지 못하니, 누구를 부자라 하는가?’ 하고, 지팡이를 세워 두고 김을 매었다.[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
夫子 植其杖而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03) 이슬 먼저 마르네.
인생이 초로(草露)와 같이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해로가(薤露歌)』에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薤上朝露何易
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04) 하수(河水)의 방어(魴魚)
맛있는 고기를 말한다. 시경 『국풍(國風)·형문(衡門)』에 “어찌 고기를 먹음에 반드시 하수의 방어라야 하리오.[豈其食魚 必河之
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05) 사양좌(謝良佐)가……한다 : 사양좌는 중국 북송(北宋) 때의 유학자로, 이 구절은 논어 『안연(顔淵)』의 주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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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處士李公墓碣銘 幷序
梅竹處士李公之墓。在龍壽山枕艮之原。距其葬八十有九年。其曾孫吏議君中斗。以墓石之文。謬屬於興洛。興洛辭以衰陋不堪而不獲命。謹按公諱宅淳字于揆。文純公退溪先生。其九世祖也。先生之後。代有偉人。諱詠道原州牧使。贈吏曹參判。號東巖。五世而諱守約靖陵參奉。贈吏曹判書。生諱世觀贈吏曹參議。號牧牛堂。生諱龜元僉樞。贈吏曹參判。號式好堂。是公三世。妣贈貞夫人固城李氏。生員憲復女。公生英廟甲子。卒庚午五月十四日。年六十七。幼才思絶倫。藝學夙就。翰墨之會。輒居前列。旣長嚴毅凝重。言動不苟。見者以公輔期之。益折節讀書。本之四子。而博涉諸家。欲其專一該貫。眞見得聖賢立言本意。言論有根據。而絶無浮夸之態。以此不中時好。落拓不偶。書耕雲釣月四大字於壁上。有詩曰竆山斂跡謝紛紛。春晩東郊植杖耘。回視人間皆稅土。還歸故里日耕雲。晩荷長竿下洛磯。汀蘭岸芷露先晞。河魴盡向市門去。由是山翁釣月歸。又以梅竹名其軒。專意用力於朱子書節要。就先儒所辨四七理氣諸說。撮其大要而常目之。性孝友。事親盡志體之養。親老不遠遊。有故而出。不信宿於外。居喪衰絰不去身。擇地安厝。必於誠信。生日不擧觴。終身不廢晨謁。兄弟同會一堂。終日怡愉。五弟參判公。自承學至立朝。最被公導迪。嘗手抄朱退書切於受用者。及楚騷以下唐宋諸大家文。總而編之曰金叢玉屑以授之。奬育後承。多所成就。以謝氏性偏難克處克將去之語。爲矯揉變化之要道。氣槩軒昂。宇量宏深。鄙倍不出於口。怠慢不設於身。接其容貌。聽其言語。無敢有非心者。晩年。自以性度稍峻。作銘詩以自警。嘗曰大丈夫立心行事。當如靑天白日。無少邪曲。吾無過人者。自檢平生。庶無媿於此言也。公挺魁特之姿。尋家學之緖。一生服膺。未或失墜。一門簪紱煒爀。而公實滋息其根源。亦可謂好門庭中善繼述者也。配殷山朴氏。學生守謙女。生二男。彙陽參奉僉樞出。彙成通德郞。有文行早歿。二女權O,權顯相。彙成二男晩松正言,晩柏通德郞。彙陽二男晩受,晩羲。皆通德郞。二女李錫圭,金驥善皆生員。權二男東奎,東璧。三女李庭羽,任鎭遠,朴周昇。權顯相嗣男胄煥。晩松男中龍。晩柏男中鍵。次卽吏議君。晩受男中敏,中振。晩羲男中英。中龍嗣男國鎬。中鍵嗣男學鎬。中斗三男。學鎬出。國鎬出。弼鎬。中敏男命鎬。中振男豐鎬。中英男正鎬,覲鎬出。銘曰。
士修于躳。竆不爲損。世訓之懿。經旨之眞。蓄之旣深。其發斯赫。我有所受。敢墜明誠。斂跡衡茅。托趣梅竹。我耕我釣。雲月滿川。遺風灑然。來世之敬。<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