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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항구를 떠나가는 배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날까? 지난 날 나는 제주항에서 출발하는 이 배들을 전송하다 보면 꿈과 희망을 찾아 대처로 떠나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한 때 안 떠났던게 다행이다 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남영호 침몰 사건 때의 경우이다. 서귀-부산간을 취항하던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경 서귀항에서 승선객 210명과 연말연시 판매용 감귤을 싣고 성산항으로 출발하여 그 곳 성산항에서 승객 128명과 화물을 추가로 싣고서 그 날밤 8시경 부산항으로 향했다. 당시에 남영호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7.2m, 시속15노트를 달릴 수 있는 배로써 오늘 날 제주를 오가는 대형 카페리에 비해 최대 승선인원 321명, 화물 적재량은 130톤 규모에 불과한 작은 여객선이었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가 그랬듯이 과적이 부른 인재가 지금으로 부터 45년 전에 우리의 남단 제주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날 남영호는 성산항에서 승객 128명과 화물을 추가로 싣다보니 총 승객 318명 선원20명 화물만 무려 540톤을 넘게실어 승객은 17명, 화물은 무려 적재허용량의 4배를 초과 하였다. 이미 성산항을 출발할 때 남영호는 선체가 15도 나 기우려 출항을 한 것이다. 결국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52km 떨어진 해상에서 바람에 휩쓸려 갑판 위에 쌓아둔 감귤이 좌현으로 쏟아져 그 무게를 못 이긴 남영호는 침몰한 것이다.
이 때 구조된 인원은 12명에 불과 하였으니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인명사고를 낸 해상사고로 기록 되어져 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사고이다. 그 당시 우리 어린 조무래기들에게까지도 이 사고의 후일 담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성산항에서 출항하려할 때 남영호의 선장은 선적해 있는 배가 기울어져 있음을 알았는지 선적한 화물을 덜어 내지 않으면 자신은 출항을 않겠다고 선주에게 강력하게 항의 했었지만 선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선장은 그날 배에서 내려 부선장이 대신 출항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배안에 있던 쥐들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이나 했는지 배에 걸쳐놓은 널판을 통해 쭈루루루 하선을 했다는 알려지지 않은 뒷담화를 들으며 '동물적 감각'이라는 말이 그런 말이었다는것을 실감하게 했었는데...... 저 꼬마에게 누가 아이스케키를 사 주었을까? 당시에 제주에는'가보자 아이스케키'가 있었다. 찌는듯한 여름날이면 교모를 쓴 고학년 초등생이나, 중학생들이 방과 후에 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시원하고 단물이 나는 아이스케키! 그때에는 돈으로만 사먹을 수 있었던게 아니라 맥주병 소주병을 갖다주면 이 아이스케키를 먹을 수가 있었다. 사진에서보면 아이스케키통을 짊어진 소년의 손에는 역시나 빈병이 들려져 있다. 병이 한개 들려져 있는것 보니 이제 막 오후 장사 시작했는데 첫 마수를 이 꼬마들에게 한모양이다. 장사가 끝나갈 무렵이면 자루에 빈병을 가득담고 어깨에 걸쳐 아이스케키공장으로 가곤 했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를 짓게하는 말이있다. 아이스케키장수: 시원한 아이스케키~~~~이, 가보자 아이스케키~~~~이 동네 조무래기들: 줘야 먹지~~~~~이 우리는 그늘에 앉아 지나는 아이스케키장사에 장단을 이리 맞춰 었는데..... 물허벅을 등에지고 집으로 향하는 누인지 어머니인지 그림자의 길이로 봐서는 해가 서녘으로 뉘역뉘역 넘어갈 때인듯 싶다. 집 물항아리에 가득 채울려면 몇번은 왕복해야하는데 사진에서 보는 아낙은 벌써부터 힘이 빠진 모양을 하고있다. 집 앞 올래에선 동네 조무래기들이 떼지어 놀다가 당시에 귀했던 카메라를 보았는지 서녘하늘 걸린 햇볕을 가리고 이쪽을 쳐다보고있다. 사진의 배경으로봐서는 제주시 1도동에 있는 영락교회인듯 종탑이 보인다. 이 영락교회는 예수교장로회로써 제주에서 역사가 꽤 깊은 교회로 내 고향 제주는 순교의 고장이다. 그래서 제주에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천주교신자들이 순교한 순교지가 많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기풍 목사인데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분으로 제주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대표적인 목사이다. 후세 제주도 교인들이 그를 기리기위해 세운 기념관이 제주도 교래리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을 방문해보면 제주개신교의 순교역사를 볼 수있다.
소풍가는날!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어머니는 전날 시장에가서 김밥용 김, 단무지, 계란, 시금치,햄등을 사들고 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너 형제의 김밥을 마셨는데 아마도 20개 이상은 마셨을 것이리라. 과일은 전날 사다 놓으셨고 삶은 계란 두세 개씩 나눠주시곤 나머진 10원이나 20원을 각자의 형제에게 나눠주시며 알아서들 장만하라 하셨는데.... 학교가는 길목 올망졸망 구멍가게에 들려 왕사탕 몇알, 과자부스러기 몇개, 그리고 소풍날이면 먹을 수 있다 침 넘기던 사이다. 그것도 시원하게 냉장된 사이다가 아니고 미지근하던걸 소풍장소에 도착하면 끓여놓고 식은 것마냥 뜨뜻했던 사이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던 사이다를 잔뜩 부른 배속으로 이 사이다 꿀꺽이며 들이키면 "크윽"하는 트림으로 코끝이 얼얼했었던 기억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리라.
그래도 몇몇 친구들 어머니는 한복 곱게 차려입고 양산 받혀쓰시곤 아들 소풍가는데 따라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난다. 사진에서 여학생이 입은 교복을 보니 아마도 당시 제주에서 알아주던 북국민학교 소풍날이 아닐런지. 그런데 왜 우리 어머니들은 소풍가는 날까지도 이 한복을 고집했었는지 한 때 이해가 안됐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변변한 외출복 하나 없었던 시절이라 이 한복만을 고집했으리라 여겨진다.
제주항에서 항운노조 조합원들이 미군이 원조했던 밀가루를 하역하는 모습인것 같다. 제주는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는 안되고 보리농사, 고구마, 땅콩, 당근 정도의 농사를 하며 살았다. 1946년,47년에는 대 기근이 제주땅에 와 당시 미군정에서는 전분용 고구마 뼈따귀를 풀어 제주민들의 식량을 대신하게 하였지만 턱도 없이 부족한 시기가 있었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량난은 내가 자라던 어린 시절에도 쌀밥을 가정집에서 해 먹기란 가물에 콩나듯하여 명절날, 제삿날, 생일,그리고 소풍가는날에나 겨우 맛을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60년대를 지날 적에 제주의 각 가정에는 미국에서 원조받은 하얀 밀가루 즉, 포대에 미국 성조기와 태극기를 한 손목들이 서로 악수하는 그림이 인쇄된 포대가 부엌 한 구석엔 꿔다논 보리자루 마냥 앉아 있곤 하였다. 우리는 그것으로 수제비를 떠 먹고, 칼국수를 짤랐으며 비오는 날이면 지짐이를 붙여 먹고, 술빵을 해먹었는데 당시에 배고파 먹을게 없을적엔 이것들 참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요즘 애들 하루걸러 수제비, 칼국수 해준다면 먹기나 할까?
생말타기! 참 재미 있었던 놀이가 아닌가 싶다. 조무래기들 두패로 나누어 한 팀은 말이 되고, 한 팀은 기수가 되어 말이 된 친구놈들 골려주느라 멀리서 부터 달려와 엉덩방아를 말이 된 친구놈 허리짝에 궁둥이끝 꼬리뼈 쿵하니 박아놓으면 그 무게에 눌려 주저앉아 버려 마부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길때 까지 계속해서 말이 되어야 하는 놀이!
생각만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사진에서 마부는 앞에 탄 기수와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 이번엔 져 달라고 얍살한 미소 띤 얼굴로 협상을 하는지 밑에 깔려 말이 된 친구놈들 힘들어하는것 아랑곳 하지 않는게 얄미워 죽겠다.
내가 버스를 처음타본 기억이 아마도 국민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일것이다. 우리 여섯 남매는 막내와 그 위 어린 동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누이의 인솔하에 시골 외할머니댁에 가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에 우리는 신정명절을 마치고 외삼촌댁과 이모댁, 할머니에게 새뱃돈 수금하러 갔었으리라. 어머니가 챙겨주신 보따리 하나 둘 챙겨들고 어린 나이에 사진에서와 같은 어른들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하며 탔던 시골버스! 그때에 제주 일주도로는 도로포장이 안되있었기에 움푹패인 웅덩이를 지나거나 돌부리가 나온 곳을 지날때면 이리쿵 저리쿵, 사람들 이리쏠리고 저리 쏠렸었는데 그러다 조무래기들 자신들 들어설 자리 자연스레 정렬되면 그때서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때에 지나는 검은 전봇대와 길가에 늘어선 들판이 내곁을 지나는것을 보고 얼마나 신기해 했었는지, "가만히 서있던 전봇대가 왜 내 곁을 지나갈까? 나는 그대로 서있는데..." 라며 골똘히 생각했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지금의 관덕로와 동문로를 잇는 거리다. 사진 속의 건물들로 보아 시가지가 재 건축 들어가기 전의 모습이어서 1970년대 중반 이전의 사진인것 같다. 사진 아랫부분이 관덕정방향, 좌측이 칠성로 들어가는 곳, 우측이 제주시청 방향이며 직진하면 동문전통시장이있는 동문로타리 방향으로 예전 제주의 번화가 모습이다. 지금은 상권이 신제주 거리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노형이 제주상권을 잡고 있지만 80년대 중반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의 거리에 나오면 제주시의 젊은이들은 다 볼수가 있던 곳이요, 음악다방, 경양식 레스토랑,술집, 영화관, 그외 유행을 앞서가는 옷들이 진열된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다. 지금은 이 길 밑으로 중앙지하상가가 생겨 겨울날 제주의 강한 바람이 들이닥칠 때는 추위를 피하려 지하상가 통로로 행인들이 지나 다닌다.
어느 국민학교의 가을운동회! 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이 운동회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까? 아마도 시골 학교 몇몇은 여태 보존 하는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운동회는 동네 잔치 였었다. 지금처럼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지않던 그때 어른들 역시 이날을 기다렸었다. 가을 운동회가 있기 한달 전 부터 때얕볕 밑에서 마스게임이다, 고전무용, 사진에서 처럼 덤블링 연습한다고 오후수업 빼 먹고 운동장에 모였었는데, 그때는 공부 안한다고 좋아했지만 한낮 때얕볕 밑에서 한 두시간 땀 흘리고 교실에 들어오면 반 아이들의 얼굴은 붉으스레 열이 나있고 모두 개죽음의 얼굴들을 하곤 했었다. 그렇게 연습했던것 동네 아저씨, 할머니, 아버지, 어린 동생들까지 다 불러 모았던 운동회는 오늘날처럼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맛볼수없는 재미를 느끼게 하였는데... 청군의 청룡, 백군의 백마 형상을 개선문 윗부분에 걸어놓고 운동장에 나와 시합을 벌이던 청군 백군은 다 이 개선문을 통하여 입장하고 퇴장했었다. 사진에서 처럼이 덤블링은 위험한 연출을 하기에 대부분 6학년들이 담당했었는데 3층, 4층탑을 쌓고 맨 위에 올라선 학동이 마지막 관중을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받치는 거수경례는 해봤던 사람만이 느낄 수있는 우쭐거림이었을것이다.
멀리 횟집센타 조명이 어두운 탑동 바닷가를 밝히고 있다. 예전엔 이곳 탑동이 매립이 되기 전까지 이곳을 탑바레라 불렀었다. 이곳 탑바레마을은 기다란 방파제가 생기기 전에는 검은 몽돌들이 이 해안에 가득찼었고 그 언덕배기 위쪽에 다닥다닥 제주의 초가들이 엉키성키 어우러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던 곳이었다. 전 번 제주를 찾았을 때 시내를 걷다가 처음 발견한 제주어로 된 시들을 나는 보았다. 정류장 칸막이 부스벽엔 제주의 시인들이 쓴 작품들을 보며 몇해 전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제주어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지난 번 방문 때 제주의 시인들은 벌써 시도하고 있다는것을 보고 내가 늦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중 이 탑동에 관한 글을 쓴 시인의 작품이 나의 마음을 울려 이곳에 덧붙여본다.
탑바레 전설 김순이(2014 제주어 문학선집 수록작) 말덜 골을테주 혼백년 후제인 말들하겠지 한 백년 후엔 옌말로 말덜 헐테주 옛말로 말들 할거야 호텔이며 생선회집 주런이 늘어선 이 디가 호텔이며 생선횟집 나란히 들어선 이곳이 바당이라난걸 바다 였다라는걸 새카망혼 보석닮은 먹돌쌩이덜이 새카만 보석닮은 먹돌들이 치데기는 절에 닦이던 바당이라난걸 치덕이는 파도에 닦이던 바다 였다라는걸 아이덜 히영치는거 배웁곡 아이들 헤엄치는것 배우고 보름 부는 날은 바당절이 바람부는 날은 바다 위 파도가 초집 지붕 넘어왕 마당을 적지던 초가지붕 넘어와 마당을 적시던 바당이라난걸 바다였다라는걸 불난가심에 쐬주 멧잔 들이 쌍이네 불난 가슴에 소주 몇 잔 들이켜 밤 바당 물마루에다 과락과락 칭원허게 웨울르던 밤 바다 파도 위에 우렁차게 소리질렀던 열혈청년 눈물 삼킨 바당이라난걸 열혈청년 눈물 삼킨 바다였다라는걸 4.3사태 때 솔째기 곱으멍 궤깃배 타그네 떠난 지세아방 4.3사태 때 살짜기 숨어 고깃배 타 떠난 남편 소식 눈 빠지게 지둘리멍 속절어시 머리터럭 세어가던 소식 눈 빠지게 기다리며 속절없이 머리카락 쇠어가던 아지망 허대던 바당이라난걸 아주머니 머물렀던 바다였다라는걸 말덜 골을테주 옌말로덜 말들 하겠지 지난 얘기로 경허멍 자꾸 그러면 자꾸 벤해갈테주 탑바레 전설은 변해갈거야 탑바레 전설은
탑동 해안가 광장에 설치된 공중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 내벽에 위의 사진들이 걸려있어서 한참을 머무르게 했던 곳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쾌적한 화장실 만들기 운동으로 우리네 화장실은 세계 어느 곳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 심지언 서울시청 지하철 역사내 화장실 입구에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있는 휴식처며 독서를 할 수있게 꾸며 놓아 화장실을 찾던 나를 한참 헤매게 했었는데.... 이 화장실은 내가 제주의 옛모습 이야기를 시작하며 끝을 맺게 했던 곳이라 어쩌면 어이없는 모습이라 하겠지만 이 화장실 안에 지난 날 제주의 역사가 살아있기에 찍어 본 것이다. 사진으로만 보더라도 한번 들어가 보고픈 화장실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