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봉과 무릉계, 산과 숲과 계곡과의 여름 대화
1. 일자: 2022. 7. 9 (토)
2. 장소: 노인봉(1,338m)
3. 행로 및 시간
[진고개(10:00, 960m, 노인봉 4.2km)) ~ (고위평탄면) ~ 노인봉(10:30~40) ~ 대피소(10:50~11:00) ~ 낙영폭포(13:07) ~ (광폭포, 삼폭포) ~ 백운대(14:15~25) ~ 만물상(14:37) ~ 구룡폭포(15:05) ~ (삼선암) ~ 식당암/금강사(15:24) ~ (연화담) ~ 소금강탐방센터(16:00) ~ 상가(16:08) / 17.7km]
< 노인봉/소금강 산행을 준비하며 >
대학 신입생 여름, 멋모르고 선배들 따라나선 산행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수용소 같던 오대산장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을 내달려 동대산 넘어 진고개 다시 소금강으로 내려서던 기억. 저질 체력에 일상복 입고 땀범벅, 이러다 산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던, 식빵에 쨈 발라 먹는 초라한 음식, 숨이 목에 차오르는 고통과 그 끝에 맞은 황홀한 계곡…. 지금도 그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또 하나의, 이번엔 즐거운 기억, 백두대간 진고개~대관령 구간. 소황병산~매봉의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비탐구간을 넘어 동해전망대와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이름하여‘태풍전야, 안개에 젖고 바람에 누운 초원’그 꿈 같은 여행에도 진고개~노인봉이 연결된다.
다시 간다. 오늘 주인공은 노인봉이 아니라 소금강이다. 나라 최초 명승1호로 지정된 명주 청학동 소금강은 노인봉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나 흘러내리며 이룬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명품 계곡이다. 만물상, 금강문, 취선암, 구룡연, 비봉폭, 삼선암, 세심폭, 청심폭, 구룡연, 상팔담, 식당암 등 명소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걸어 본 길이지만 기억은 희미하다. 진고개~노인봉은 어둠 속 정상석 말고는 그 과정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소금강계곡은 식당암 부근의 너럭바위 만이 기억된다. 기억의 부재가 도전을 더 자극한다. 그간 기록이 없음이 맘에 걸렸는데 오늘은 그 숙제를 하려 가는 기분이다.
소금강은 숲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사진으로 본 풍경은 물푸레나무가 계곡을 푸르게 물들이고, 바위에 붙어 자란 소나무는 멋지다. 수직 절벽 약간의 틈만 있으면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사는 강인한 소나무들이 저마다 관록을 자랑한다.
가야 할 길을 삼등분 해본다. 진고개~노인봉대피소 3.9km 90분의 진득한 오르막으로 땀깨나 흘릴 각오를 한다. 노인봉까지는 0.2km 거리인데 굳이 가지 않을 작정이다. 낙영폭포 지나 만물상까지는 5.8km, 식사 포함 2시간 30분, 이후 만물상~주차장 4.6km 2시간. 총 14km, 6시간의 만만치 않은 산행이 예상된다. 그래도 노인봉대피소만 오르면 내리막 계곡이라 부담은 적다. 선답자의 동영상을 살핀다. 노인봉 길은 큰 부담이 없어 보이고, 계곡은 무척 길게 다가온다. 길을 대하고 느끼는 바는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리라. 소금강은 여름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임에는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다르리라.)
< 희망사항 >
몇 번의 취소 끝에 소금강과 인연의 끈을 잡는다. 추억을 반추해 새롭게 하고 싶다. 내가 경험한 계곡 중 소금강이 최고였다. 장마는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 말랐던 계곡에도 넘치도록 풍족한 물을 흐르게 할 것이다. 청학동은 이 계곡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제철 과일 맛나게 먹듯 계절의 풍요를 만끽하고 싶다.
< 진고개 ~ 노인봉 대피소 >
서울에서 진고개까지는 175km 거리다. 잠시 멈춘 횡성휴게소에는 비가 내렸으나 들머리에 도착하니 해가 난다. 예감이 좋다. 10시, 계단을 따라 길을 시작한다. 곧 고위평탄면이 나타난다. 너른 고원이 펼쳐진다. 기억에는 없는 지형이다. 오대산에 짙은 안개가 걸려있다. 멋지다.
오솔길 따라 야생화가 지천이다. 초롱꽃이 희고 커다란 꽃망울로 존재를 드러낸다. 1km 편안 길을 걷고 나자 오름이 시작된다. 기온이 높지 않아도 습기가 많아서인지 땀이 쏟아진다. 역시 1000미터급 고산을 거저먹는 건 있을 수 없지. 하늘을 가린 우거진 숲을 진득이 걷는다. 성하의 숲은 초록이 짙다. 그 푸르름이 위안을 준다.
오름은 2.5km 지점까지 계속되더니 잠잠해진다. 평지가 나타난다. 농밀한 여름 숲은 그윽했다. 고도는 1200미터가 훌쩍 넘었다. 길이 순해지자 맘에 여유가 생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아베의 죽음, 회사에서의 일들, 옛 기억, 부모님 생각…. 힘들고 지칠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만, 생각이란 여유의 산물임을 틀림없다.
갈림이 나타난다. 0.2km 란 표지목 알림에 이끌려 발은 저절로 노인봉으로 향한다. 10여분 발품 끝에 정상에 오른다. 잔뜩 구름 낀 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도도한 산줄기, 초록의 거대한 존재가 시원하고 늠름하게 흘러가고 있다. 오길 잘했다. 긴 줄을 선 끝에 인증 사진 한 장을 얻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상석 뒤편으로도 속이 확 뚫리는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산정에서 굽어보는 풍경은 그 중심에 내가 있음에 확인해 준다. 백두대간의 길도 읽혀진다. 점점 잊혀져 희미해지고 있지만 한 때는 그 종주가 삶의 가장 중요함 이었다.
정상 바위 밑은 그늘지고 쉴 곳이 많아 좋은 식당 터가 되어 주었다.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참고 대피소로 내려온다. 무인대피소는 아담했다. 벤치에 앉아 준비한 음식을 먹는다. 오늘은 호두과자가 주 메뉴다. 언제부턴가 산에서의 식사에 관심이 덜 가 진다. 그래도, 쉼과 음식은 힘을 준다. 시계를 본다. 막 12시가 지난다.
< 노인봉 대피소 ~ 만물상 >
비가 오려나 날이 흐려진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싶었는데 낙영폭포 가는 길의 초입에는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오기 전 살핀 지도에는 대피소에서 낙영폭포까지는 2.3km 거리에 고도 차가 500미터가 넘어 보였다. 긴장하며 걷는다. 아무 먼 기억도 되살아난다. 이제 힘겨움은 끝났겠지 했지만 점점 거칠어지는 하산 길에 몹시 힘겨워하던 20살의 내가 보인다. 무모하고 초라한 산행의 트라우마는 아주 길게 상흔을 남겼다.
첫 계단이 등장한다. 꽤 길다, 기억엔 없는 곳이다. 덕분에 편하게 고도를 줄였다. 거친 돌길이 나타난다. 비도 한 두 방울 후두둑, 불길한 느낌이 일자 걸음은 빨라진다. 다시 등장하는 긴 계단과 돌길…. 동일한 패턴이 3~4번 더 반복된다. 멀리서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낙영폭포가 멀지 않았나 보다. 긴장의 끈을 잠시 내려놓는다. 걱정만큼 어렵지 않게 첫 고비를 넘겼다.
폭포 위에 잠시 머문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살이 빠르다. 내려가는 계단 옆에서 또 자리를 잡는다. 삼각대도 편다. 계곡을 배경으로 찍힌 내 모습에 만족하며 내려오는데 진짜가 나타난다.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짓누르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포수가 떨어진다. 장관이다. 앞선 멈춤은 조바심이 되어 버린다. 한참을 바라본다. 삼각대는 이곳에서 세웠어야 했다. ㅋㅋ
순식간에 고도가 700미터 대로 떨어진다. 광폭포, 삼폭포 등 시선을 잡아 끄는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여느 계곡 같았으면 하나 하나가 명소였을 폭포와 소들이 그저 무명의 공간이 되는 곳, 무릉계는 천하명소임에 틀림없다. 만물상까지는 3.5km를 가야 한다. 시원하던 물소리가 소음으로 들려오더니 이제는 덤덤해진다. 웬만한 폭포에도 감흥이 없다. 그저 흐르고 바라볼 뿐이다.
너른 반석과 바위가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백운대다. 긴 계곡 길의 절반을 올 건 같다. 쉬어 가자. 바위에 앉는다. 신발을 벗는다. 계곡물에 몸을 맡긴다. 소금기 많은 얼굴에 시원한 물이 닿으니 살 것 같다. 방울 토마토를 입에 문다. 툭 터지는 과즙이 시큼하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개의치 않는다. 잠시 산과 물과 숲과 한마음이 된다. 행복했다.
백운대를 지났으니 만물상이 멀지 않았으리란 예상은 적중했다. 계단을 내려서 데크 길 좌우로 거대한 암괴가 서 있다. 다가가니 점점 커진다. 주변에는 붉은 색을 띤 소나무 거목도 있다.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해서 만물상이라 했나 보다. 바위와 소나무와 계곡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에 넋을 잃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지나는 이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바라본다. 바로 만물상이다. 10km가 넘는 무릉계의 랜드마크는 기대보다도 멋졌다. 길고 힘겨운 계곡 길에서 맞는 보석 같은 짧은 휴식과 감동을 주었다.
길가 안내판 곳곳에 율곡 이이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이곳에 다녀가고 글을 남겼나 보다. 선인들에게도 무릉계곡은 명소였나 보다. 소금강, 무릉계, 청학동…. 명소에는 별칭도 많다.
< 만물상 ~ 소금강 탐방센터 >
가야 할 길의 반을 지났고, 고도도 400미터 대로 낮아졌다. 등로가 좀 더 평탄해지겠지 하는 기대는 나만의 것이었다. 패턴화된 등로는 조금의 평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내심 덕유산 구천동계곡과 같이 어느 정도 내려서면 도로도 나타나겠지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초지일관, 물과 바위의 잔치였다.
사람들의 소리가 커진다. 또 하나의 폭포가 등장한다. 별 기대 없이 폭포 앞에 섰는데 이건 여느 것과 차원이 달랐다. 구룡폭포다. 그 크기와 주변 풍경이 참으로 멋지다. 폭포 위 반석에는 사람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낙영폭포와 함께 무릉계의 대표 폭포라 할 만하다. 잠시 넋을 잃고 폭포가 만든 담 앞에 서 있었다.
구룡폭포를 지나자 길이 조금 순해진다. 여전히 돌길이지만 간간이 흙 길과 평지도 등장한다. 산과 계곡에서의 풍경과 길의 변화는 산꾼을 덜 지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변화에 눈이 뺐기는 동안 발걸음은 나를 조금 더 먼 곳으로 데려다 준다. 옛 산장 터를 지나고 마주한 식당암은 내 머릿속에 기억된 것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감동적인 계곡 반석이다. 가까이 보다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풍경이 더 근사했다.
식당암을 지나자마자 기대하지 않았던 사찰이 등장한다. 금강암이다. 절 내 풍경보다 길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석축이 더 매력적인 곳이다. 절을 지나자 비로서 길이 넓어진다. 탐방센터를 지나고는 도로도 등장한다. 트랭글의 거리 안내는 이미 17km가 넘었다. 처음 노인봉 갈 때부터 그랬는데, 도상의 거리보다 실제는 훨씬 더 멀었다.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지만, 마음과 몸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소금강 계곡을 내려오면 낭패를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에필로그 >
상가 주차장에 선다. 오후 4시가 지났다. 계곡에도 땅거미가 드리워진다. 음식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눈과 코를 자극하는 유혹을 받자, 떠밀리듯 들어가 식탁에 앉는다. 식당 안 작은 식당암에는 비빔밥과 된장이 차려진다. 검은 된장이 눈을 자극한다.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보는 건 모험이다. 특히, 검은색 음식은 맛이 사납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된장찌개는 그렇지 않다. 칼칼하고 뒷맛이 개운하다. 강원도 토속의 맛이 느껴진다. 맛나게 먹었다. 혼자지만 고생한 내 자신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버스가 출발한다. 식곤증에 몸이 나른해진다. 눈을 감고 지나온 길을 추체험해 본다. 노인봉과 소금강은 만만치 않았다. 오르막 고도 차가 400m 미만이고 이후는 계곡 따라 룰루랄라 라고 생각했는데, 1000m가 넘는 고산에서의 오르막 산행은 숨을 멎게 했고, 내리막 고도 차 1000m와 10km 거리는 막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진고개 탐방센터에서 공단 직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쉽게 볼 곳이 아닙니다. 특히, 무릉계는 무척 길고 험합니다. 체력 안배 잘 하셔야 합니다.”내려서고 나니 더 실감이 나는 말이다.
그럼에도 참 좋은 산행이었다. 옛 기억을 더듬고, 진고개 고원도 보고, 노인봉 정상에서의 막힘 없이 확 트인 전망도 좋았고, 무엇보다 모처럼 제대로 계곡을 경험했다. 최고였다. 계곡 산행은 물도 좋지만 소리도 매력적이다. 특히, 폭포와 협곡에서의 우렁찬 물소리는 여름 계곡 산행의 백미다. 오늘은 이를 제대로 확인했다.
버스가 주문진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안개 자욱한 진고개를 다시 오른다. 이게 뭐지 하는 사이에 고갯마루를 지나 진부를 향해 내려선다. 안개는 언제 그랬나 싶게 말끔히 개었다. 꿈을 꾼 느낌이다.
오늘 산행을 요약하면 노인봉과 무릉계에서의 산과 숲과 계곡과의 여름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