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실주의
1. 신사실주의의 정의
a.신사실주의에 영향을 끼친 철학
베르그송 - 과정철학이라 부르는 철학 사조를 최초로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정지보다 운동·변화·진화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으며 학문적 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한 문체의 대가였다. 반 이성주의 철학으로 치부되는 베르그송의 철학은 시간과 공간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자신들의 편리에 의해 구분되어 진 것에 불과 하며 아무런 이성이나 지식의 개입이 없이 현상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인 직관으로 파악 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심층에는 삶의 욕구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진실이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면, 그 밖의 복잡한 이론이나 분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생명의 약동자체가 살아있는 것의 전체적 발전의 추진 원리이며, 동시에 생명의 현상 형태의 다양성과 가변성의 원인이라고 한다.
오이켄 - 경제학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과 이론적 방법의 통합이었다. 그가 주장한 바는 현실적인 경제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추출된 개념의 도식을 구성하여, 그에 입각한 이론적 분석이 경제적 현실 체의 인식이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특히 경제체제 그 자체의 분석에 중점을 두었다.
베르그송, 오이켄 등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를 더욱 철저 화하여,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인생의 내면적 진리를 파악 하려고한 예술상의 한 경향.
b.신사실주의의 정의
195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등장한 유럽에 있어서의 새로운 경험의 전위 미술운동.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회화 조류이던 앵포르멜 미술, 추상표현주의, 타시즘 등 일련의 추상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났다. 신사실주의는 공업 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예술이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이 방법은 신사실주의의 가장 주요한 이념으로, 이브클랭의 비물질화 사상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공업화된 사회를 현대의 자연으로 보아, 그 속에서 생산되는 물체를 무매개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 표현주의의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일어난 서정적 추상의 한 경향)을 반대하고 실제 지각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의 오브제를 사용.
신사실주의의 중심이 된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나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라노의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회 선언을 발표하고, '누보 레알 리스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란 호칭이 쓰여 졌으나, 정식으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어 60년 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 미술제에서 최초로 작품을 발표했고, 이듬해 5월 파리 의 제이 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라는 전시회가 조직되어 신사실주의의 존재가 세상에 인정되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과 같은 대량 생산의 공업 제품을 집적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 적인 제시'라는 방법을 구체화시켰다. 한편 다니엘 스포에리는〈타블로 피에지 (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음식물이 남아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 에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음식물이 남아 있는 상태를 현상대로 제시한 것으로 팅겔리의 폐품이용의 작품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 60년의 살 롱 드 메에 출품했던 세자르의 폐물 자동차를 입방체 상태로 고정시킨 '압축 조각'은 소재의 특이성과 메티에의 방기라는 점에서 신사실주의의 미학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신사실주의의 그룹의 최초의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 앵스, 이브 클랭, 마르시안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팅겔리, 텔라, 니키 드 생 팔, 크리스 토 등이 참가했다. 신사실주의의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여 이념적으로는 통일 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의 신사실주의로서의 공통성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통적이라면 '현대의 자연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과 집단적 행위의 일시적인 필요성의 자각'이라는 점뿐이다.
레스타니에 의하면, 기계화되고 공업화되어 광고로 가득 찬 것이 현대의 자 연이므로, 신사실주의 화가는 그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제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그룹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술의 계보중 제일 처음 등장했으며 네오다다이즘/미니멀아트/팝아트/개념미술/극사실주의 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c.사실주의와의 차이점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인본주의적인 내용을 지녔고, 관찰한 실재 사물을 사실로 착각하도록 묘사했으며, 추상에서 나온 평면적인 화면공간을 배격하였음.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리얼리즘-1950년대를 장악한 추상표현주의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한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은 평면화된 공간, 거대한 캔버스, 모더니즘 회화의 단순화된 색채사용 등의 특징을 받아들였음.
2. 신사실주의의 대표 작가와 작품들
a.아르망 페르난데스(Armand Fernandes)
프랑스 출생으로 미국에서 귀화한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 이다.
뉴욕 창작 생활 중 암으로 2005년 10월 22일 타계하였다. 신사실주의 창단멤버인 아르망은 니스의 국립 장식미술학교와 파리의 에콜 드 루브르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1955~1960년까지 종이에 고무인을 어지럽게 찍은 압인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압인 시리즈의 속편격인 보조 시리즈는 현실 물체에 의한 인쇄물을 모아 놓은 것이다. 1960년 에는 그 당시의 폐기물을 유리상자에 넣어 만든 ‘소포’ 시리즈를, 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모아놓은 ‘집적, 시리즈를 발표하여 일상의 물건을 아상블라주(기형적 모음)하여 소비문명에 대한 반문명적 불합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오브제를 쌓아올려 만든 축적 조각품으로 유명한데 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가재도구 예를 들면 물병 다리미 커피 기계 톱 기타 잡동사니들을 모아 강화유리 플렉시글라스로 만든 투명 상자 안에 무더기로 쌓아놓은 것이다. 또한 바이올린 첼로 및 다른 악기들을 부수어 대는 이른바 아르망의 '분노'도 유명하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의 재료와 표현기법의 작품들을 세계 곳곳에 남겼다. 초기 작품에는 포비즘이나 포스트 큐비즘에 동조 하였으나 차차 누보레알리즘의 선두에 섰다.
a-1 아르망의 작품
주차장 - 1982년 그가 파리 근교에 세운 환경조형물 <장기주차장>은 59대의 자동차와 1600t의 콘크리트로 제작된 것인데(높이 19.5m), 거대한 폐차장의 일부를 잠시 옮겨 놓은 듯한 그 모습에서 사람들은 마치 20세기의 피라미드를 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 이 피라미드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백화점 진열장과 공장 창고, 쓰레기 하치장 등에서 우리는 저 하늘의 구름마저 뚫을, 우리 시대 엄청난 대량생산의 이미지를 무수히 접한다. 이와 관련해 아르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사회는 자신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무엇이든 쌓아두는 습관을 통해 충족시켜 왔다.”
바로 자동차의 축적을 통해 아르망은 우리 시대의 ‘참을 수 없는 풍요의 무거움'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풍요의 이미지와 끝없는 소비는 종국적으로 공허함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풍부함이라는 것이 결국 낭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면 대량생산은 인간을 소모적인 존재로만 만들 뿐이다. 여기서 인간은 소비 메커니즘의 단순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그만큼 삶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오늘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수백만 마일 - 96일간의 작업을 거쳐 1989년 6월 27일 완성 되었다. 가로 6m, 높이 20m의 거대한 조형물로 100단 높이로 쌓여 있으며 각 단은 10개의 폐차 차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1000개가 아닌 999개의 차축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천안 터미널에서 시작한 아라리오 산업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것이며 현재 그 과정에 있다는 희망과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또한 폐차의 부품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종합 터미널이라는 장소 특수성을 드러내면서 하늘을 향해 치솟은 형태를 통해 관람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일상의 폐품을 작품화하는 작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 작품은 세계 곳곳의 공공장소에 설치되어 있는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공공성과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b.잔 탱글리(Jean Tinguely)
스위스의 조각가, 실험 미술가.
움직이는 도중에 파괴되는 기계 같은 키네틱 조각으로 유명하다. 1941~45년 바젤 미술학교에서 회화·조각을 공부했으며, 일찍부터 예술소재로 움직임에 관심을 보였다. 바젤의 정체된 예술 풍조에 점점 실망을 느끼고 1953년 파리로 갔다. 그무렵 처음으로 매우 정교한 키네틱 조각을 만들기 시작하여 그것을 '메타메카니크'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철사와 판금으로 된 로봇 같은 고안물로 그 구성부분이 다양한 속도로 움직이거나 회전했다. 1950년대 중반 및 후반에 더욱 혁신적인 그림 그리는 기계 (Machines à peindre) 라는 일련의 조각들을 제작했다. 이 로봇 같은 기계는 끊임없이 스스로 소리와 불쾌한 냄새를 내면서 추상적인 형태의 그림들을 그렸다. 1959년 탱글리가 제1회 파리 비엔날레에 설치한 길이 2.4m의 〈그림 그리는 기계〉에는 동전 투입구가 있어 여기에 동전을 집어넣은 전람회 방문객들에게 약 4만 점의 다양한 그림을 그려주었다.
한편 탱글리는 자신의 미술작품들을 '비물질화' 시키는 수단으로 파괴의 개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1960년 처음으로 〈뉴욕 찬가 Homage to New York〉라는 높이 8.2m의 자체파괴적 메타메카니크를 만들어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 작품의 자체파괴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모터와 바퀴가 복잡하게 뒤얽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파괴되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으며, 작품에 불이 붙자마자 소방대원들이 와서 도끼로 해체해버렸다. 그러나 그다음 〈세계의 종말에 대한 연구 Study for an End of the World〉라는 자체파괴적인 두 기계장치는 상당한 양의 폭약을 사용해 성공적인 자체폭발을 이루어냈다. 1960, 1970년대에는 계속해서 기계류와 잡동사니 및 폐품을 결합해 도발성이 적으면서 경쾌한 키네틱 작품들을 제작했다. 66년 니키 드 생 팔르와 공동으로 스톡홀름 미술관에서 내부를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종이를 겹붙여 만든 여체 <그녀>를 제작하였다. 이 밖에 <극장광장의 분수> 등이 있다.
탱글리의 미술작품은 은연중에 많은 사회적 풍자를 담고 있다. 그의 기발한 기계장치들은 선진산업사회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상품의 부주의한 과잉생산을 교묘하게 풍자한 것으로, 그것들은 또한 그가 대체로 기계와 생명의 미학에 대해 갖고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보였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생명과 예술의 본질이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 불안정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신념이 나타나 있으며, 이런 작품들은 과거의 정적인 미술을 논박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탱글리는 기계장치와 폐품 특유의 미를 완전히 새롭게 평가했으며, 혁신적으로 관객의 참여를 작품에 이용했다. 그의 작품들을 이용한 여러 행사 때에는 관객들이 기계장치의 움직임을 부분적으로 조절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 자기파괴라는 이러한 극단적인 넌센스는 기계와 기계문명 자체에 대한 조롱을 담아 내는 부조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미친 기계들'은 기술 문명에 대한 익살스러운 비평이며, 동시에 어떠한 실용적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기계들은 공허히 움직이며, 신비하고 기괴하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성은 급작스럽고 삐거덕거리는, 복잡하고 둔탁한 움직임을 생산하는 것이며, 그 예상 밖의 효과는 전통적 예술개념을 거부하는 구성의 형식적 가능성과 표현적 힘을 보여준다.
c.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1930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생팔은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다시 프랑스 와 유럽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18세부터 보그, 바자 지의 패션 모델로 활동할 만큼 아름다웠던 생팔은 일찌감치 결혼하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사회 생활을 원했던 생팔에게 이러한 현실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욱이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난 절대로 어머니같이 되지는 않을 거야 라는 결심을 해왔었는데 말이다. “자녀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어머니는, 아들에게는 좋은 직업을 얻기 바랄 테지만, 딸에게는 시집 잘 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들은 훨씬 자유로운 것 같다. 그들은 집 안의 세계와 집 밖의 세계, 두 세계가 있다. 나는 집 밖의 세계를 택하고 싶다.” 라는 생팔의 고백은 그녀의 갈등을 짐작케 한다. 결국 생팔은 내적 갈등과, 공격적 성격으로 23세 때 신경쇠약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치료를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서, 그녀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대 그녀의 초기 작품은, 분노를 표현한다. 릴리프가 묻혀진 캔버스에 물감을 싼 덩어리를 총알 삼아 권총을 쏘아대는 그녀의 `shooting Painting' 퍼포먼스는 금세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1961~1962년 한 해 동안 뉴욕, 미국에서 12번이나 벌어 졌다. 이후 쟝 팅겔리, 펄 올로프 울트베드(Per Olof Ultvedt)와 함께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에서 제작한 <수치 (Honte)>(1966)의 충격으로 그녀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 갔다. `나나'의 하체를 마치 거대한 건축물처럼 제작해 놓은 작품이었는데, 작품을 감상하려면 `나나'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나'의 자궁을 문으로 설정해 놓음은 여성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서 여성을 찬양하려 함이다. <나나>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초기 생팔의 작품에 나타났던 공격적 성향은 사그러들었고, 점차 분노를 넘어서 생의 기쁨과 환희, 여성의 긍정적 면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축에도 많은 관심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조각품으로 건축적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에 제작된 타로 공원(Tarot Garden)이다.
c-1.니키 드 생팔의 작품
스트라빈스키 분수와 니키 드 생팔의 조각작품 - 파리 퐁피두 센터 옆 작은 분수에는 예쁜 조각품들이 놓여 있다. 빙글빙글 돌며 물을 뿜어대는 이 조각품 중 기계 형상의 조각품은 쟝 탱글리의 조각품이며, 유기체 형상을 한 조각품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의 것이다.
새, 코끼리, 하트 등 어린이 놀이터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귀엽고, 밝은 색채의 생팔 조각품들을 보면 절로 미소 짓게 된다.
나 나(Nana)- 너무 뚱뚱하고, 눈, 코, 입도 제대로 없어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여자는 꼭 날씬해야 하나? 예뻐야 하나? 예뻐야 하고, 날씬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하고, 정숙해야 하고, 때론 섹시해야 하고, 지적이고, 그러면서도 순종적이어야 하고, 손을 꼽아 세자면 한도 끝도 없는 잣대. `나나'는 여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고, 아예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좀 뚱뚱하면 어때. 불뚝한 배를 가리려고 코르셋을 입지도 않고, 높은 구두 때문에 밤마다 다리 아파야 할 필요도 없다. 푸른 눈에 금발 머리일 필요도 없다. 검은 `나나'는 자신의 피부 색에 개의치 않는다.
예쁜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나나', 때론 흥에 겨워 커다란 덩치로 물구나무 서기를 하기도 하는 나나. 그런 `나나'를 보고 있으면 숨막힐 듯 하루하루를 계획하며 살아가는 내 일상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슬며시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는 머리 속 근심도 사라지는 것 같다. `나나'는 또 거대하다. 어떤 남성이라도 2미터가 훨씬 넘는 거대한 `나나' 옆에 서면 조그만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다. 남자라고 덩치가 크고, 힘 세다고 잘난 척하는 것을 보면, `나나'보다는 작지 하는 생각에 콧노래가 나올 정도다. 이처럼 생팔은 남성 지배 사회를 비판하고, 박해 받은 여성, 창녀, 여신, 어머니 등 세상의 모든 여성상을 아우르는 진정한 여성상을 제시하려고 <나나>를 제작했다. `나나'는 기쁨과 정열로 가득찬 여신으로, 세계의 모든 여성에게 보내는 긍정적 메시지이다.
타로 공원(Tarot Garden) - 첫 남편과 이혼한 후 재혼한 동료 작가 팅겔리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 조수 등과 함께 1974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98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된 타로 공원은 생팔의 거대한 조각품을 모아 놓은 기쁨으로 가득찬 공원이다. `자아의 반영'과 `자유에의 갈망'을 주제로 제작된 이 조각 공원은 자유로운 개인 `나나'에 멈추지 않고, `나나' 같은 유기체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d.알렉스 카츠 (alex katz)
Alex Katz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중 갤러리에서 특별히 사랑받는 작가이며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팝 아티스트 알렉스 카츠는 뭔가 흥미를 유발하는 얼굴 모습을 가졌거나 아니면 초상화 댓가로 20만달러를 기꺼이 지불할 정도의 부자가 아니면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Alex Katz는 지난 50년간 꾸준히 인물 초상을 그려왔다. 형상 리얼리즘에 있어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가 그려낸 인물은 맬랑콜리 하지만 동시에 쿨하고 감정을 노출하지 않는다. 마치 광고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Alex Katz는 60년대 초부터 이러한 작품을 제작해왔다. 표면 묘사를 강조하기 위해 'cut out' 기법 역시 초기부터 사용된 것이다.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 시켜놓은 상태같은 화면 구도를 처음 시도하였다. 자연스러운 화면 구도와 배경의 단조로움은 그 의 그림의 특징이다.
e.페르난도 보테로 (Bo tero)
1932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매우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 아티스트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계 여러 곳곳 갤러리와 박물관에 전시를 열었으며 많은 상을 수상했다.
회화에 나타나는 보테로 특유의 풍만하고 둥근 이미지는 매우 풍자적인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군인들과 부르주아층의 비도덕과 파렴치한 매너, 권력등을 비난한다. 그러나 테마의 과격함과는 달리 표현은 정치적인 뉘앙스조차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사회적인 논평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장기에 투우학교에 입학한 경력이 있어 그의 그림에서 투우의 영향을 종종 찾아 볼 수 있기도 한다. Fernando Botero는 전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작품으로 그는 일러스트분야에서 예술적 가치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를 탈피하는 과감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줬다.
기존의 날씬함만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던 풍토에서 그의 그림은 풍만함과 유우머로서 표현되었다. 훗날 그의 이런 화풍은 페니미즘 그룹을 낳을 정도로 페니미즘의 사상의 가치로서도 인정 받게되었다.
그가 기존의 날씬함만이 선망되던 패션 일러스트 화보에 등장한 것은 1981년 Vogue였다. 기존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는 호평을 받았고 날씬한 여성이 아닌 뚱뚱하고 풍만한 여성으로서도 충분히 옷의 매력을 발산하였다. Fernando Botero는 '비만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라는 기존의 개념을 무너뜨린 쾌거를 이룬 것 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Nina Ricci, Channel 등의 수많은 명품브랜드를 통해 호평속에서 선보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다다이즘과 과거의 대가와의 조우였다
다다이즘이란 특별한 의미를 두는 용어는 아니다. 다만 그시대에 일어났던 하나의 예술운동이었는데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Fernando Botero의 작품에서도 다다이즘을 엿볼 수 있다. 또한 Fernando Botero는 여러 과거의 화가들에게서 연구를 통해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e-1.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그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차용하여 새로운 미술작품을 창출하고자 하였다.그러나 다른이의 작품을 차용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찬조신화를 거스르는 키치적인 방법인데다 그는 거장들의 작품들에 비하여 야비한 색조와 부풀린 형태로 희화화 시킴으로서 그의 작품을 보면 모작이라는 생각과 함께 차용했다는 의미를 알수 있으며 해학성이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단순한 윤관선 원색의 색조 매끈한 채색기법 크기의 과감한 확대와 축소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나 스페인 정복자를 보면 알수 있듯이 보테로는 동일한 방식을 고수하여 그림의 일관성을 두었다.
그는 입체양식을 취한 것으로서 과거의 거장들의 작품을 형태의 변형으로 재해석한것이다. 모나리자나 스페인정복자의 자화상을 보면 모두 재밌는 모습이다. 회화보다는 일러스트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입체양식은 그전에는 볼수 없었던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에대한 비판일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거장들의 그림에 대한 반란일수도 있겠으며 유럽여행을 하면서 거장들의 작품에 강항 인상을 맏은 보테로가 여행후에 형태를 재해석하고자 시도하면서부터 이런 뚱뚱하고 비만의 유형인 모작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미대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현대적이고 충분히 비판적이고 충분히 익살스런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