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일생을 걸고 무너뜨리고 싶은 적(敵)이 있는가!”
“남자의 일생을 걸고 사랑하고 싶은 적(敵)이 있는가!”
홍대 부근 한 카페에서 김탁환을 만났다. 홍대 앞 거리를 좋아해 1주일에 한 번꼴로 홍대 앞에 온다는 작가는 색 바랜 고서가 빽빽이 꽂힌 이 카페를 마음에 쏙 들어했다. 느릿느릿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했다. 그에게 물었다. 왜 하필 호랑이인가.
“직관적으로 깨달은 건데, 작가로서 호랑이한테 배워야 할 게 네 가지 정도 있는 것 같아요. 혼자 살아가야 하는 단독자로서의 자세, 자기 세력권을 돌면서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면서 유랑하는 노마드적 자세,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집요한 추격자로서의 자세, 먹잇감을 잡으면 놓지 않는 강력한 포식자로서의 자세 말이에요.”
그의 소설 속 캐릭터는 캐릭터의 전형을 띤다. 《밀림무정》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 최고의 포수이자 백호를 추격하는 주인공 ‘산’은 남성 에너지가 철철 넘쳐흐르는,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카리스마를 지닌 남성이고, 백호 ‘흰머리’는 지구상의 어떤 맹수보다 빠르고 강하고 영리한, 고산의 유일한 지배자다. 생물학자이자 산이 그토록 사랑하게 되는 여인 ‘주홍’은 지성과 미모를 갖춘 완벽한 여성이다. “산의 캐릭터는 판타지 아니냐”고 묻자, 작가는 껄껄 웃으며 “남성의 로망인 동시에 여성의 로망이죠”라고 답한다. 캐릭터의 극단을 추구하듯, 작가는 상황 역시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작가란 독자나 관객에 앞서서 먼저 체험하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쓰면서 단독자로서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예술가뿐 아니라 리더십과 창조력을 가진 사람은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잖아요. 《불멸의 이순신》을 쓰면서도 많이 느꼈어요. 이순신이 무슨 일을 벌여도 아무도 몰라요. 거북선을 만들자고 해도 가장 친한 유성룡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죠. 실패해도 주변 사람은 실패인지조차 모르고,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삶.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를 산이나 백호를 통해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카이스트 교수직을 벗어던지고 본격 작가의 길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작품 《열녀문의 비밀》과 《노서아 가비》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제작 중인가 하면, 직접 영화 기획도 한다. 손예진・이민기 주연의 〈오싹한 연애〉라는 작품으로, 2011년 1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열녀문의 비밀》을 원작으로 한 영화 〈조선 명탐정〉은 김명민・한지민 주연으로 2011년 1월 말 개봉할 예정이고, 〈노서아 가비〉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를 소재로 한 팩션으로, 〈접속〉 〈황진이〉를 연출한 장윤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의 작품이 줄줄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그의 작품을 어설피 읽은 사람은 종종 오해한다. ‘영상을 의식한 글쓰기’가 아니냐고. 하지만 그의 역사물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안다. 김탁환이 얼마나 전통 서사를 고집하는지.
“오해받을 때가 많아요. 영화나 드라마를 의도하고 쓰는 게 아니냐는. 아니거든요. 오히려 문학 자체가 가진 파워를 신뢰하는 고전적인 작가예요. 좋아하는 작가나 작업 방식도 그렇죠. 《밀림무정》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내 문체로 끌고 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흰 설원을 얼마나 잘 표현해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아침 바람소리와 저녁 바람소리가 어떻게 다르고, 호랑이가 접근했을 때의 공기와 안정된 공기가 어떻게 다른지 쓰고 싶었어요. 5년 전에도 시도했는데 써지지 않았죠. 사람・마을・도시가 나오는 소설은 쓸 수 있었지만 호랑이와 대지와 나무에 대해서는 그 차이를 잡아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 후 그는 3년간 자연을 공부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프로그램을 빨려들 듯 보고, 자연도감을 외우듯 했다. 추위와 호랑이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야생 호랑이가 사는 러시아 라조 자연보호구에 다녀오기도 했다. 호랑이의 자취를 따라다니며 호랑이의 흔적을 보고 느꼈다. 호랑이가 먹은 음식, 발자국, 배설물 등을 보고 전문가로부터 암컷인지, 수컷인지, 체중은 몇 킬로그램인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렇게 철저한 고증을 거쳐 18개월 만에 《밀림무정》이 탄생했다.
그에게는 상반돼 보이는 두 이미지가 붙어 있다. 시대를 앞서 가는 ‘디지털’과 전통 그대로의 가치를 중시하는 ‘아날로그’. 소설 쓰기 방식도 양 극단을 오간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독특한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글쓰기를 하는가 하면, 황진이・이순신・고종 등 역사 속 인물을 끄집어내 시대극을 쓸 때에는 전통 서사 작법을 따른다. 전자로서의 그는 한 번은 과학자와, 또 한 번은 사진가와 융합적 글쓰기를 시도했다. 과학자 정재승과는 뇌과학과 로봇공학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에서 벌어질 가상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눈먼 시계공》을 썼고, 사진작가 강영호와는 드라큘라를 소재로 사진과 소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괴한 책 《99: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를 펴냈다. 그런가 하면 ‘기존의 잣대로는 포착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창조력과 규칙을 비트는 상상력’을 표방한 문화 계간지 〈1/n〉을 창간했다. 일찍이 본 적 없는, 낯설고도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시도하는 그에게는 ‘융합형 스토리 디자이너’ ‘별종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또 한편 그는 아주 아날로그적이다. 운전면허증도 없고, 하루 한시간씩 산책을 즐기며, 작업 노트를 손으로 꼼꼼히 기록한다.
“삶을 단순화해요. 삶이 복잡하면 생각을 깊고 넓게 못하죠. 삶이 단순할수록 이야기가 복잡해져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삶을 단순화하려 노력합니다.”
김탁환은 “어린 시절 무슨 책을 읽었느냐가 지금 무엇을 쓰는가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물 동화책을 많이 보면서 컸고, 귀신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고, SF소설을 읽으며 몽상을 즐겼다 한다. 그 결과 《밀림무정》 《99》 《눈먼 시계공》이 탄생했다. 그는 단독자로서의 소설 3부작을 펴낼 계획이다. 《밀림무정》은 그 첫 작품이다. 세 편 다 5~10년 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스스로 생각하는 ‘대작’ 개념의 작품이라면서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꾸준히 자료만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 첫 시리즈인 이 작품은 “단독자로서 갈 데까지 간 자들의 이야기”라고 함축한다.
“끝까지 밀어붙여서 맞짱을 뜰 수도 있었지만, 막판에 산의 마음이 바뀌죠. 호랑이를 최고 위치에서 최악의 위치로 떨어뜨리고 싶었어요. 근대에 들어서 맹수들의 처참한 모습은 초원과 고산의 지배자였던 호랑이가 동물원 우리에 갇히는 겁니다. 그건 죽음보다 모욕적인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까지 호랑이의 지위를 떨어뜨려보고 싶었어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독자들도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잠깐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심각하게는 말고요. 이야기책은 밤에 읽고 잠깐 자기 인생을 생각해보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