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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 새벽, 만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야마다 연대 선봉이 안개 낀 백운평 고지 아래로 진입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빈 산이 아니었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이미 고지를 선점한 채 매복해 있었다. 기습 사격이 시작됐고, 일본군은 순식간에 제압됐다. 이것이 청산리대첩의 첫 전투, 백운평 전투였다.
그 뒤 엿새.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천보산, 고동하. 골짜기마다 이름이 다른 10여 차례의 전투가 이어졌고,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전연승했다. 청산리대첩 직후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공식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합계 1,257명으로 기재됐다.
연성대장 이범석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약 3,300명으로 추산했다. 어느 숫자를 택하든,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비정규군이 근대 제국 정규군에 맞서 이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전투를 김좌진과 홍범도, 두 영웅의 이야기로 기억해 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반도 설명이 안 된다. 그 엿새 뒤에 쌓인 10년이 있다. 그 10년을 세 갈래로 따라가야 청산리가 비로소 온전히 보인다.
서간도 신민회의 무관학교, 북간도 대종교의 군사조직, 그리고 두 흐름을 하나로 묶은 길림의 독립운동 네트워크. 세 흐름이 1920년 10월 화룡현 골짜기에서 만났다.
1910년 국권 침탈 직후,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김대락. 이들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한 것이 1910년 말이었다.
이듬해 4월 이들은 그곳에 경학사라는 민단 조직을 세우고, 부속 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개설했다.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불리게 되는 그 학교의 출발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산전을 개간하다 수토병에 걸려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1912년에는 비옥한 토지를 기대하고 산림으로 들어갔다가 반년 만에 많은 이들이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중국인으로부터 평지를 빌려 논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경제 기반이 잡히자 인구가 늘었고, 학교가 들어섰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유하현과 통화현 일대에만 소학교가 30개에 달했으며, 1916년 기준으로 그 두 현의 학생 수는 1,287명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 소학교들에 졸업생을 교원으로 파견하고, 소학교는 신흥무관학교에 신입생을 공급했다.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운동 생태계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됐다.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러시아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운동가들이 서간도로 몰려오면서, 서간도는 독립운동의 전략 거점으로 부상했다.
1914년 가을, 신흥학우단은 통화현에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군영, 백서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학교이자 군사기지인 이중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이 흐름의 한 축을 떠받친 인물이 여준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그는 이회영·이시영 형제가 1913년 일제의 체포 기도를 피해 서간도를 떠난 뒤, 그 빈자리를 묵묵히 채웠다. 학교를 지키고, 부민단을 운영하고, 조직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16년 어느 자료는 친일 단체인 조선인조합 지부 일부가 부민단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사무를 폐쇄하고 부민단 사무에 합류했다고 기록한다. 10년의 축적이 만들어낸 힘이었다.
같은 시기, 북간도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조직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11년 함경북도 경원 출신의 교육자 서일(본명 서기학)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했다. 처음엔 의병 잔류 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했고,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그의 독립운동은 종교적 신념과 결합됐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체계화한 민족 종교로, 1909년 나철이 경성 재동에서 중광한 이래 만주·연해주 한인 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호산 박명진의 기록에 따르면, 1914년 무렵 대종교 교도 수는 30만에 달했고, 그중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상태였다. 박명진 자신도 서로군정서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서일은 입교 후 3년 만에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 명의 교우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우들 중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편입하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 조달 임무를 맡겼다. 신앙 공동체를 군사 공동체로 전환한 것이다. 독립군으로 편성된 청년들에게는 대종교의 교리, 단군으로부터 이어지는 민족혼을 정신무장의 근거로 삼았다. 훗날 북로군정서 장병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5월, 서일은 중광단을 기반으로 대한정의단을 조직했다. 계화, 현천묵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 공교회(孔敎會) 인사들이 결합한 이 단체는 무장투쟁을 목표로 했다.
기관지 『일민보』와 『신국보』를 발간하여 항일투쟁의 당위를 설파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종교와 공교회 중심의 대한정의단에는 실제 전투를 이끌 군사 지휘관이 없었다. 신앙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전술을 짜고 부대를 훈련시킬 전문 무관이 부재했다.
이 두 흐름을 연결한 것이 1919년 길림에서 태어난 대한독립의군부였다. 상해의 신규식이 봉천에 있던 정원택에게 밀서를 보내,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만주에서도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라고 지시했다. 밀서를 받은 정원택이 이틀 만에 길림으로 달려가 박찬익을 만났고, 1919년 2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출범했다.
여준,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조소앙, 정원택, 손일민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속도 자체가 이들이 이미 오래된 네트워크 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명자 39인 가운데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상룡, 이시영, 이탁, 허혁,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등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직간접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은 결성 다음날 5가지 진행 방침을 결정했다.
상해에 길림 대표 파견, 마필과 무기 구입, 선언서 국내외 발송, 서북간도 및 노령과 연락, 자금 모집을 위한 국내 밀사 파견. 외교와 무장투쟁을 동시에 추진하는 이중 전략이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4,000부를 인쇄, 서북간도와 러시아령, 구미 각국, 북경·상해와 국내 및 일본에까지 우편으로 발송했다. 선언서 말미는 분명하게 무장투쟁을 촉구했다. 그리고 곧 길림군정사로 재편됐다.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기관으로의 전환이었다. 역시 여준이 단장이었고, 이상룡·박찬익·조성환·김좌진이 핵심을 이뤘다.
1919년 10월, 길림군정사의 군사 전략가들이 서일의 대한정의단과 합작하여 마침내 북로군정서를 탄생시켰다. 이 결합에는 냉정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대한정의단은 대중적 기반은 탄탄했지만 군사 지휘 능력이 없었고, 길림군정사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군사전략가들이 집중돼 있었다.
대한정의단 측은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요직을 길림군정사 인사들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이 총재로 대중적 권위와 종교적 구심을 맡고, 김좌진이 총사령관으로 군사 지휘를 맡는 구도였다. 신앙의 대중성과 군사적 전문성의 결합. 이것이 북로군정서라는 조직의 실체다. 이것이 가능했던것이 김좌진 또한 대종교도였기 때문이었다
북로군정서 간부진을 들여다보면 이 구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1917년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신민회 계통의 대한독립의군부 군무부장을 거쳐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참모장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이었다. 연성대장 이범석, 사령부 부관 겸 연성소 학도단장 박영희, 제4중대장 오상세, 종군장교 김훈·백종렬·강화린·이운강 등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거나 교관 출신들로 채워졌다.
1920년 9월 9일,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에 설치한 사관연성소에서 298명의 제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사관연성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좌진이 대한정의단으로부터 독립군 창설을 위임받자, 1919년 8월 서간도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와 신흥학우단에 연락하여 교관과 졸업생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에 응해 이범석을 비롯한 교관들과 졸업생 다수를 북간도로 보냈다. 청산리에서 싸운 사관연성소 1기 졸업생 298명은 바로 이 연쇄의 산물이었다.
무기 확보도 중요했다. 북로군정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던 체코 군단으로부터 무기를 매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 출신인 체코군은 한국 독립군에 동정적이었고, 귀국 과정에서 무기를 팔았다. 이 무기 구입 교섭에 직접 나선 것이 서일 총재였다.
청산리 직전 북로군정서의 전력은 대원 약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수류탄 780발로 집계된다. 비정규군으로서는 상당한 화력이었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는 졸업식을 마친 뒤 백두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한 달에 걸쳐 450리 산길을 걸어 10월 12~13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다. 일본군 동지대가 이미 추격 중이었다. 독립군이 이동하는 동안 한인 동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전책(避戰策)을 택했던 독립군 지휘관들은 결사항전으로 방침을 바꿨다.
10월 19일, 묘령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 수장들이 만나 연합작전회의를 열었다. 홍범도 연합부대에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된 이청천의 교성대가 합류해 있었다. 교성대는 1920년 7월 일본군의 수색작전을 피해 유하현을 떠나 안도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홍범도 부대를 만나 합류했고, 홍범도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북로군정서에도, 홍범도 연합부대에도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
10월 21일 새벽, 백운평전투로 시작된 엿새의 전투는 이렇게 전개됐다. 같은 날 완루구에서 홍범도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타격했고, 어랑촌에서는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동지대 대병력과 혈전을 벌이는 중에 완루구 전투를 마친 홍범도 부대가 긴급 연락을 받고 달려와 협공을 펼쳤다.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 기병연대장 가납(加納) 대좌가 전사했다. 10월 22일 천수평에서는 북로군정서가 야영 중인 일본군 기병 1개 중대를 포위하여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 사살했다. 이후 천보산, 고동하 전투에서도 독립군은 연승했다.
이 모든 전투에서 1920년 9월 졸업한 사관연성소 1기 298명이 주력으로 싸웠다. 그들은 신흥무관학교가 보낸 교관들에게 훈련받은 병사들이었고, 서일과 대종교가 결집한 대중적 기반 위에 서 있었으며, 여준과 길림군정사가 이어준 네트워크의 산물이었다.
청산리대첩 이야기는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추격 대신 방향을 틀었다. 간도 일대 한인 마을을 향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간, 상해 임시정부가 집계한 피살자만 3,469명이었다. 민가 3,209채, 학교 36개교, 교회당 36개소, 곡물 54,045석이 불탔다. 3~4개월에 걸친 학살의 전체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일부 연구자들은 경신참변 전 기간에 걸쳐 1만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한다.
박명진의 기록에는 대종교 교옥 50여 개소와 학교 30여 개소, 민가 3,000여 호가 소각됐다고 적혀 있다. 경신참변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서간도와 북간도에 한인들이 쌓아온 것들 - 학교, 교회, 곡물 창고, 지역 공동체 - 을 물리적으로 지우려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 이면에는 1932년 만주국 수립을 향한 일본의 대륙 침략 구도가 깔려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청산리는 대첩이었지만, 그 대가는 무고한 민간인 수천 명의 목숨이었다.
경신참변 이후 북로군정서를 포함한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 밀산으로 이동,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치타 정부의 군사 원조 약속을 믿고 자유시(스보보드니)로 향했으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러시아 적군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군대가 독립군을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고 무수한 인원이 포로가 됐다. 그것은 청산리의 영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을 받은 서일은 그해 8월 27일, 흑룡강변 당벽진 삼림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식법(調息法), 대종교의 수행 방식을 통한 자결이었다.
마지막에 남긴 글귀는 이러했다. "나라 땅은 유리조각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그는 북간도에서 중광단을 세운 지 만 10년 만에 그렇게 사라졌다. 박명진의 기록은 "이에 크게 상심한 서일종사는 마을 흥개호 당벽진 뒷산 삼림 중에서 망국의 대한을 품은 채 순명함"이라고 적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여름 폐교됐다. 일제가 중국 당국을 압박해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 근거지를 습격했고, 유하현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911년 개설부터 1920년 폐교까지 약 10년. 그 사이 배출한 졸업생은 약 3,500명으로 전해진다.
그 3,500명이 청산리로, 봉오동으로, 의열단으로, 서로군정서로, 임시정부로 흩어졌다. 의열단 창립 13명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도, 통의부·정의부를 이끈 여러 간부들도, 임시정부의 군사 실무를 담당한 인물들도 이 학교의 계보 안에 있었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독립운동의 중추가 됐다.
청산리대첩은 두 영웅의 즉흥적 용기가 아니었다. 신민회원들이 서간도에서 10년 동안 쌓아온 인적 자원과 교육 인프라, 서일과 대종교가 북간도에서 구축한 종교적 대중 기반과 군사 조직, 그리고 여준과 신규식이 길림과 상해를 연결하며 짜낸 독립운동 네트워크. 이 세 흐름이 대한독립의군부 → 길림군정사 → 북로군정서라는 계승 구조를 통해 마침내 하나로 합류했고, 1920년 10월 엿새의 전투에서 폭발했다.
박명진은 1964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한 손에 단군한배검의 종경을 들고, 한 손에는 정의의 총을 들고."
대종교의 신앙과 무장투쟁이 결합된 북간도 독립운동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말이었다. 그 말이 가리키는 구조 속에, 신흥무관학교의 훈련과 길림 네트워크의 조직력이 함께 있었다.
청산리를 두 영웅의 이야기로만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 전투를 진짜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있는 이름들 -여준, 서일, 이장녕, 이범석, 박찬익, 황상규, 이청천,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의 청년들과 그들을 먹이고 재운 간도의 수많은 한인 민간인들 - 이 모두가 청산리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경신참변으로 스러진 수천~수만명 이상의 이름 없는 죽음들이, 그 승리가 얼마나 가혹한 대가를 치렀는지를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