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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지어진 수종사 다실 삼정헌은 시·선·차가 하나되는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 구름 따라 여기에 와 그윽한 곳 사랑하니 / 언덕에 끌린 정, 아직 끊지 못한 것이 우습구나. / 곱디고운 초승달 맑게 갠 저녁에 떠오르고 / 엷은 안개 서린 언덕엔 석양 노을 비친다. / 뜻 높은 선비야 누가 오겠나 / 자리가 높아지고 좋을 땐 소원해지기 쉬운 것 / 강 가까이 숲이 깊어 찾는 이가 드무니 / 이 중에 좋은 벗, 반은 물고기와 새이라
다성(茶聖)이라고도 불리는 차의 거인 초의 선사(1786~1866)가 석옥 화상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 ‘수종사차석옥화상운’ 12수중의 하나다. 시 속의 수종사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남양주시 운길산 기슭에 있다. 1830년 가을부터 초의 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렀고, 그 해 겨울에 위의 시를 썼다. 초의 스님이 지나치지 못하고 머문 것을 보면 수종사는 차향이 깃든 도량임을 짐작케 한다.
수종사 가는 길 큰 도로에서 수종사 밖에 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들면 그 때부터 가파른 길이다. 5월의 숲이 그 가파른 길을 거뜬히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버린 아이처럼, ‘봄비’라고 하기엔 너무 묵직해진 봄비가 숲을 적시고 있다. 약 1.7km 쯤 걸으면 일주문이다. 일주문까지는 차량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차량 10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숨이 턱 밑에 가득 찰 때쯤, 숲 너머에서 목탁 소리와 예불 소리가 들려온다. 일주문에서 300m쯤 걸으면 미륵불상이 보이고, 200m 쯤 오르면 절 마당이 드러난다.
詩·禪·茶가 하나되는 도량 짐작대로 수종사는 차향이 깃들어 있는 도량이다. 역사적으로 그렇고, 문화적으로 그렇다. 차의 거인 초의 선사와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곳에서 함께 차를 즐겼고, 그들처럼 차를 ‘누릴’ 수 있는 삼정헌(三鼎軒)이란 다실이 있기 때문이다. 수종사는 조선 중후기에 차인들의 ‘터’였다. 초의 스님을 비롯해 다산, 추사, 추사의 아우 김명희, 정조의 부마 홍현주, 다산의 아들 학연 등 차를 좇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다. 이처럼 많은 차인들이 수종사를 찾았던 이유는 수종사의 석간수 때문이다. 물맛이 일품이다. 맛뿐만이 아니라 물 자체가 명품이다. 세조는 자신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수종사를 찾았다고 한다. 단 한 평의 차밭도 없는 도량에 많은 차인들이 차를 들고 모여들었다. 그렇게 수종사는 차향이 이어져오는 도량이다. 일지암에서 많은 세월을 보낸 초의 스님도 수종사를 지나치지 못했다. 다실 삼정헌은 지난 2000년에 지어졌다. 삼정헌은 시(詩), 선(禪), 차(茶)가 하나가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삼정헌은 차를 파는 곳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절에 딸린 찻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당이나 후원처럼 사부대중이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차를 체험하고 누리는 곳이다. 곧 수행의 공간이다. 묵언까지는 아니어도 말을 줄이고 낮춰야 하며, 차와 더불어 있는 동안이 의미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수종사가 삼정헌이란 공간을 마련한 취지다. 삼정헌 벽에는 ‘자연방하(自然放下)’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글이 걸려 있다. 수종사는 등산로의 산장 같은 도량이다.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운길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수종사를 거쳐 간다. 삼정헌은 늘 만원이다. 등산객이 많은 철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포천에서 왔다는 한 방문객은 다른 종교인이지만 수종사엔 삼정헌이 있어서 자주 온다고 했다. 특히 오늘같이 비라도 오는 날엔 삼정헌이 생각난다고 했다. 맑은 차 한 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종교를 떠난 치유의 시간이라며 수종사를 알게 된 것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수종사는 다도반 수종다회도 운영하고 있다. 사찰예절과 다도예절을 배울 수 있다. ‘차’는 음식인 동시에 ‘세계’다.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찻잔을 들고 있는 시간의 의미는 달라진다. 그래서 ‘다도(茶道)’라고 하는 것 같다. 물안개 밑으로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찻잔 앞에 앉아볼 일이다. 차를 몰랐던 사람이든 알고 있는 사람이든 수종사에 가면 찻잔 앞에 앉을 수 있다. 그리고 찻잔 속에 담긴 나를 보고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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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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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앞 세조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 수종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439년(세종 21) 세워진 정의옹주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59년 세조의 명으로 크게 중창되었다. 세조가 신병치료차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물머리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운길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숲을 따라가 보니 천년고찰의 사지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있고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냈다. 이에 세조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복원하게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했다. 해탈문 앞에는 그 때 세조가 심은 은행나무가 있다. 정약용의 <유수종사기>에는 “수종사는 천년의 향기를 품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온 누리에 울리며 역사 속으로 걸어온 셈이다.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고사인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고 적혀 있다. 1939년 태욱이 중수하고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뒤 1974년 주지 장혜광 스님이 대웅보전 등을 복원했다. 1981년에 산신각, 종각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주변보기
<사찰> ▲봉선사 / 진전읍 봉선사길 32 전화-031-527-1956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승과시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묘적사 / 와부읍 월문리 222 전화-031-577-1761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 때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세종 때 학열 스님이 중창했다. 일설에 따르면 국왕 직속의 군사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로 썼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스님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썼다.
<가볼 만한 곳>
-다산유적지(다산 정약용 생가) / 조안면 능내리 산 75-1 전화-031-590-2837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산이 생을 마친 곳이다. 수종사에서 약 8km에 위치한 유적지에는 생가 여유당,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 조안면 북한강로 855번길 138 전화-031-579-0605 한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로 불리는 곳이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 대표적인 한국영화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총 132만㎡ 부지 위에 10만㎡ 크기의 야외 세트를 갖추고 있으며 운당고택 및 한옥, 초가 세트, 실내촬영장까지 볼거리가 가득하다.
<숙박> -축령산자연휴양림 / 수동면 외방2리 280번지 전화-031-592-0681 -스타힐리조트 / 화도읍 먹갓로 96 전화031-594-1211
<식당> -운길산장 / 031-576-5952 가마솥 순두부, 백숙, 우렁쌈밥 -운길산 국수촌 / 031-577-0717 잔치국수, 비빔국수 -두물장어 / 031-576-8727 참숯불 장어구이, 곤드레밥 정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