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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개론
- 고백에 대한 방법론적 고찰 -
無恤 이 완 순
꿈속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온화한 날씨 탓에 습기를 먹은 눈은 내리자마자 곧바로 녹아 강둑은 벌써 질척거렸다. 삼삼오오 떼 지어 날아가는 청둥오리의 자유가 너무 아름답고 부러워 눈시울이 시리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삶이 새삼 가슴을 옥죈다. 이제 퇴직을 하고 좋아하는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말년을 아름답게 보내고 싶은데 뒤늦게 미대에 입학한 아내의 등쌀에 56세까지 다니면 도둑놈이라는 오륙도를 지나도 한참이나 지났는데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붙들고 있다. 후배의 승진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부하 직원에게 미안하다. 그나마 우리 회사에는 정년제도가 없어 퇴직을 권유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산모퉁이를 돌자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청승맞게 걷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매일 운동 삼아 걷고, 업무적 스트레스를 풀 마음으로 퇴근 후에 걷기 시작한지가 삼년이 넘었는데, 이 늦은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혼자 걷고 있는 사람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대개 노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거나 마라톤 선수처럼 기를 쓰고 달리는 중년의 사내를 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낭만적인 모습은 요즈음 세태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호기심이 발동해 나는 걸음의 속도를 배가하여 그에게 접근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어떤 연유로 산책하기엔 좀 외진 제방 위를 홀로 걷고 있는지, 그것도 명동거리에서나 봄직한 멋진 정장을 하고 걷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은밀한 것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이 도졌는지 모른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사내의 모습이 왠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베이지색의 바바리코트가 너무도 눈에 익었다. 그늘마다 차츰 어둠이 들어차고 땅거미가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어 그에게 거의 근접해서야 비로소 바바리코트의 색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어어, 저 사람 김 이사 아냐?”
너무나 뜻밖에 이런 상황에서 김 이사를 만난다는 것이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처음부터 사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명문대 음악과를 나와 여고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회장님의 둘째 아들이 사모님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금년 초부터 우리 공장에 이사로 부임하여 근무하고 있는 김 이사와 너무 똑같다. 자수성가하신 사업 1세대가 모두 그렇듯이 회장님의 성격이 워낙 유별나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힘들었나? 나는 또 한 번 부하를 꼼꼼히 챙기지 못하는 내 성격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새 나는 그를 아주 김 이사로 단정하고 안쓰러워하고 있다. 아무리 돈 많은 아버지를 두었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고통이 될 줄은 몰랐다. 일단 학교를 사직하고 아버지의 부름에 응했으니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참고 견디자니 여간한 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그에게 다가설 수는 없었다. 갑자기 내가 들이닥치면 김 이사가 몹시 당황할 것 같아서 나는 한 동안 모른 척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렇다고 못 본 척 되돌아갈 수도 없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의 행동을 주시하며 속도를 늦춰 조용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김 이사에게는 유별난 점이 참 많이 있다. 수천 억 재산가인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음악을 전공한 것도 그렇고, 안정적이고 대우받는 아버지의 회사를 마다하고 10년째 기간제 음악교사를 하고 있는 것도 불가사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나이 40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않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주 술자리를 갖지는 못했지만 가끔 대화를 하다가 느낀 것인데, 김 이사는 요즘에 보기 드문 젊은이다. 몹시 날카롭지만 인정이 넘치고, 회장의 아들이라고 거드름을 피운다거나 전혀 게으르지 않다. 역시 명문대 출신은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행동에 절도가 있고, 절제력이 있다. 시간관념이 철저하여 근무태도에 빈틈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한 사람에게 저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오너는 아니지만 명색이 사장인데 부하직원의 신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면, 말 못할 고민이 있어 혼자 괴로워하고 있다면 묻고 해결해 주는 것이 상사의 도리가 아닌가? 서둘러 만나 소주라도 한 잔 하며 무슨 고민이 있는지 들어주고 가능하다면 풀어주거나 위로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이사! 뒷모습이 너무 멋있어!”
갑작스런 나의 개입에 깜짝 놀라 잠시 주춤하더니, 마음을 가다듬고 돌아서서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씩, 웃었다.
“ 어머! 사장님이 나를 미행하셨네요? 아, 참! 매일 운동하신다고 하셨죠. 반갑습니다.”
전혀 의외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와의 만남이 좀 꺼림칙하기도 할 텐데 전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쾌하게 나를 맞았다.
“그런데 김 이사가 웬 일이야? 내가 그렇게 꼬실 때는 꼼작도 않다가?”
“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뭘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아아, 회사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요.”
“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회사 일이 아니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는데..... 노총각이 바람이라도 났나? ”
분위기를 바꾸려고 일부러 과민반응을 보였다. 일몰 직후라 박무 같은 어둠이 날리고 있어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서는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에이, 사장님도....이 나이에 바람은 무슨 바람이에요? 한 묘령의 여인에게 상사병이 났다면 모를까?”
김 이사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어설픈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은밀한 곳이 노출되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김 이사도 중대한 비밀은 아니라 해도 그냥 무방비 상태에서 노출되는 것은 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한 묘령의 여인에게 상사병이 걸리셨다? 그게 누굴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뭔가 조금 지피는 것이 있긴 한데... 아무튼 소주나 한잔 하면서 오랫 만에 노총각연애상담이나 해볼까?”
“ 사장님이 사주신다면 나야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죠.”
의외로 쉽게 내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민이 되긴 무척 되나 보다. 원래 남녀의 문제란 여간해선 호락호락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닌데, 그것도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는 노총각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 창피하고, 또 자존심이 짓밟히는 문제인데 아주 쉽고 명쾌하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대 여자가 아마도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혹시 정 연희 과장? 그래, 정연희일 확률이 가장 높지.”
“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모처럼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한번 마셔보지 뭐?”
쉽게 의기가 투합 된 우리는 이내 발길을 돌려 다리목에 있는 매운탕 집 구석방에 자리를 잡았다.
소주잔이 여러 순배 돌자 처음과는 달리 오히려 김 이사의 말이 공허해졌다. 고백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것이 분명했다. 가끔 혀를 차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쓸쓸해져 휘청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내보이는 외로움이 그녀를 무척이나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 김 이사! 내가 김 이사 가슴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한번 그려볼까?”
좀 뜻밖이라는 듯이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 나를 모르는 모양인데 나 족집게도사야. 역전에 자리를 깔면 내 밥벌이는 할만 해, 충분히....이거 왜 이래?”
좀 당황스러운 듯 김 이사가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스러워 보이는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생처럼 허둥대는 꼴이 눈에 훤히 보였다.
“ 좋아요. 그럼 서로 각자 종이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돌려보고 맞나 틀리나 시험해 봐요. 만약 맞추지 못하면 사장님이 내 고민을 해결해줘야 하고, 맞추시면 내가 일주일 동안 매일 양주 한 병씩 드릴께요.”
“ 좋았어. 거기다 노래방까지 쏘는 것으로 하지. ”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손을 올려 하이파이브를 했다. 김 이사의 표정에 장난기가 역력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왕 내친 김에 고백하고 나를 중매쟁이로 활용할 심산인가 보다. 사람의 감정은 타고난 사기꾼이 아니라면 반드시 얼굴에 나타난다. 표정을 정확히 읽으면 절대로 예상이 빗나갈 수 없다. 평생을 영업으로 많은 사람을 대하다보니 그 사람의 얼굴 표정만 봐도 나는 계약이 성사될 것인지 아닌지를 안다. 그냥 둘러리로 불렀다거나 대비견적으로 요청한 경우엔 그의 얼굴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초조하고 밝지 못하다.
우리는 종이를 나누어 갖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정연희. 이름을 적어 놓고 생각하니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또렷하게 부각된다. 언제부터인가 김 이사와 정연희 과장의 눈빛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정 과장을 대하는 김 이사의 언행이 비록 업무적인 것이었지만 눈여겨보면 예사롭지가 않았다. 매사에 살가웠고, 특히 정과장의 말꼬리엔 간질거리는 교태가 숨어 있었다. 물론 정과장의 입장에서 보면 회장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게 당연하지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김 이사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도 싱글싱글 웃으며 자세하게 가르쳐줬다. 김 이사도 마찬가지다. 혹여 정과장이 맘 상하지 않을까 여간 조심하는 것이 아니고, 기회만 있으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곤 했다. 삼십을 훨씬 넘긴 사람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과 맆 스틱을 바르지 않고도 항상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선홍색의 입술은 환갑 진갑을 넘긴 내가 보아도 숨 막히게 매력적이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체구에 젖가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듯 풍만하다. 능력 또한 출중하여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실습생으로 입사하여 주인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15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년 전 법원 경매를 통하여 회사를 인수하고 내가 처음으로 부임하여 각종 서류를 점검할 때부터 정과장의 능력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요구하는 서류는 무엇이든 즉시 찾아오거나 새로 작성해 제출했고, 역대 회사들의 내역도 조목조목 정리하여 내가 조속히 회사의 정황을 파악하는데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렇게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이 빼어나고 성격 또한 원만한데 아직까지 배필을 찾지 못하고 독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다고 실연의 아픔으로 고뇌하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언뜻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정이 몹시 궁핍해서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고, 시집가도 자신의 월급을 모두 친정에 드리지 않으면 아니 될 형편이라서 아예 결혼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부양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여러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오히려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해 오래도록 쩔쩔매는 것을 봤다고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 자, 그럼 까볼까? 아니, 김 이사가 먼저 펴보시지. ”
내가 내민 쪽지를 받아든 김 이사의 손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많이 주저하는 눈치였다. 조심스럽게 쪽지를 펼쳐 내가 적은 이름을 확인한 김 이사의 얼굴이 갑자기 홍당무가 되었다.
“어때, 나는 까보나마나지? 저 당황스런 표정을 보니 틀림없는데.....”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김 이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정확히 짚어내 몹시 황당했나 보다.
“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나나 연희 씨의 행동에 빈틈이 있었나요? 여간 조심하지 않았는데...”
“ 아니. 그런 건 전혀 없었어. 나의 신기에 가까운, 동물적인 육감으로 짚은 것이지. ”
“ 놀라워요. 아니, 무서워요. 이제 사장님 앞에서는 언행을 삼가야겠어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우리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말테니까요. 그리고 경고하는데요, 조금만 더 심해지면 사직당국에 고발할 테니 그런 줄 아세요. 하하하.....”
“아이, 그렇게까지 오바할 필요는 없고.......내 안테나와 카메라, 정보원이 도처에 있으니까 어딘가 한 곳에는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조심해...... 자, 그럼 이제 김 이 사는 매일 매일 양주 한 병 대령하면 되고, 나는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
김 이사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물 컵에 가득히 소주를 딸아 러브 샽으로 단숨에 비웠다. 주기가 오를수록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고 김 이사는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김 이사는 좀 숫된 데가 있어 내가 풀지 않으면 전혀 이야기가 진전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연인의 신상은 완전히 털렸고, 대체 김 이사의 고민이 뭐야? 프러포즈는 하셨나? 내 육감으로 보면 김 이사가 고백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ok할 텐데.”
“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 자칫 잘못하면 성추행으로 고발당할 수 있어요.”
“고발은 무슨 고발? 모든 것은 상대적이야. 절대로 그럴 일이 없어. 내가 보기엔 정연희가 김 이사를 더 원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 않아요. 33세가 넘도록 결혼하지 못한 이유가 마음에 걸리고, 또 만약 내가 정색을 하고 고백했다가 정연희가 부정이라도 하면 여간 큰 일이 아니에요.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는 사직할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의 노여움도 걱정이 되고, 나의 허욕으로 업무 능력이 탁월한 정연희 과장을 잃을까도 걱정돼요. ”
“ 정 연희가 no하면 단념할 수는 있고? ”
“ 좀 고통은 따르겠지만 그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상사병에 빠질 정도는 아니니 까요. 단지 정연희씨가 허락한다면 기쁘게 결혼하여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있어요. ”
“그럼 됐어. 나에게 좋은 방도가 있지. 고백했다가 그녀가 싫어하면 아주 유쾌한 유우머 가 되고 성공하면 뜨겁게 안아주면 되는.....”
“그렇게 훌륭한 방법이 있어요? 잘못하면 사장님도 저도 성추행 공범으로 모두 피소될 수도 있는데...... ”
“ 그딴 것을 왜 걱정해. 내가 계룡산에서 5년, 지리산에서 5년 도합 10년 동안 도를 닦아 고안한 방법이 있는데..... 그럼 사랑학개론 제 1장 고백의 방법의 강의를 시작할까? 참, 이것도 성공하면 열흘 동안 하루에 양주 한 병씩인데.....”
“좋아요. 한 달 동안 하루에 양주 두 병씩으로 해요.”
“ 그건 안돼 ”
“ 아니 왜 안돼요? 보상이 여섯 배로 늘었는데? ”
“ 그렇게 마시면 내가 죽지. 왜? 나를 아주 보내려고? 흐흐흐.....”
“우 하하하....그럴리가요. ”
우리는 한 바탕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의기가 투합하니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걱정이 일시에 날아가고 벅찬 기쁨만 남았다. 어린애처럼 한껏 상기된 얼굴로 김 이사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헛기침을 두세 번 하여 분위기를 강의 모드로 다잡은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백할 날을 정하면 먼저 백화점에 들러 좀 고급스런 콤팩트를 하나 구입해. 포장하지 말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컨티뉴“ 같은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분위가 좋은 레스토 랑이나 해질녘 호수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가야 해. 무엇보다 분위기를 잘 타야 하니까 장소 선정이 제일 중요해. 시끌벅적한 곳은 않돼.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삼십 분을 끌어. 가슴 뭉클한 영화 이야기나 감동적인 시나 소설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정연희씨. 내 애인 사진 보여줄까? ”
하고 묻고 얼굴을 한 번 바라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 고백할 필요가 없고, 장난스 럽게 싱글싱글 웃으며
“그래, 한번 보여주세요. 아마 나보다 예쁘지 못할껄요.”
라고 하거나, 좀 황당하다는 듯이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면 대성공이야. 정연희가 그렇게 나오면 사진은 꺼내지 말고 계속 정연희의 장점을 김 이사의 애인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사람은 이상하게 자기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니까, 안색을 살피며 계속 더 깊고 짙게 자랑하는 거야.
“ 우리 애인의 눈은 너무 아름다워 바라만 봐도 숨이 막혀. 초롱초롱한 까만 눈이 어찌나 순수해 보이는지 마치 애기의 눈처럼 맑고 시원해. 입술은 또 어떻고. 항상 촉촉이 젖어 있는 정열적인 입술은 바라보기만 하면 뽀뽀하고 싶어 미치겠어. 아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냐. 총명하고, 야무지고, 깔끔하고, 나긋나긋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면 처음과는 달리 점점 뾰로통해지지.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 앉는다고 했으니까. 만약 대수롭지 않게 실실 웃고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고백하지 말아야 해. 그것은 김 이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또 이야기 중간에 잠시 멈추고 “ 우리 애인 참 예쁘지? ” “ 난 그녀와 꼭 결혼할 거야.” 하고 확인사살 하는 것을 잊으면 않돼. 극적인 성공을 위해 가능한 한 정연희의 질투심을 끌어 올려야 해.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되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정연희의 자존심을 건드려. “ 정연희씨. 진짜 아름다운 우리 애인 사진 보고 싶어? ” 그러면 퉁명스럽게 “그래요.” 하고 말하든지, 잔뜩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거야. 그럼 대성공이지. 정연희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어.
“ 자아, 우리 애인 사진”하며 콤팩트를 정연희에게 줘. 콤팩트를 여는 순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아마 까무러질 거야.
“ 어머!! 어쩜 좋아! 아이, 몰라! 몰라! 정말이죠? 연희를 사랑하죠? 나도 이사님 사랑해요. 너무 너무 사랑해요. ”
라고 외치며 김 이사의 품으로 파고들 거야. 그럼 꼬옥 끌어안고 뜨겁게 키스하면 상황 끝이야. 어때? 멋있지? “
“고맙습니다, 사장님! 나 이제 살았어요. 사실 많이 고민했거든요. 정말 고맙습니다. ”
술집을 나와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강둑길을 다시 되짚어 왔다. 너무 상쾌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즐거웠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던 함박눈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어 온 천지가 짙은 고요 속에 묻혀 서서히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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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소설 작품이 올라왔군요. 고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죠?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소원하여 죄송합니다.
설을 보내고 찾아뵙겠습니다.
꽃늪님은 그런 사랑학을 어디서 공부하셨나요. 샘의 강의를 들으면 성공률 100%일것 같아요. 행복 바이러스짱
연구했죠, 계룡산에서 5년, 지리산에서 5년.......
한번 써먹어 보세요.
시간 내어 다시 읽어 볼게요
작가님 모처럼 뵈옵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늘 평화 누리소서
탄탄함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글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늘 화평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