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1655)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성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흔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자기 신앙을 대변하듯 성화를 열심히 그렸다.
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빛은 무겁고 은은하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 광채는 어찌 보면 신비롭고 오묘하기까지 하다.
많은 사람이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빛과 어둠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작품의 인물들에게서 표현되는 긴장감은 외형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강조하며 물리적인 현실보다 영적인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말년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이고 영적 깊이가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온화하고 평온하며 겸손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낮추며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진리를
더욱 간결하고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을 주제로 적어도 세 점 이상 유화를 그렸는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는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은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동판화를 바탕으로 그의 제자가 유화로 그린 것을
렘브란트가 마지막으로 수정해서 서명을 남긴 작품으로 추정되며,
요한복음 4장 1-42절이 그 배경이다.
이 작품은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을 때,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는데, 야곱의 우물이 있는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을 때를 그린 작품이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6-7)
가운데 우물을 사이에 두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고 있다.
작품에 표현된 사마리아 여인의 표정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인자하고 평안한 얼굴과는 대비되게 경계하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유다인들은 아시리아에 멸망한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의 혼혈 정책으로 유다인의 혈통을 잃어버렸다며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유다인들을 향한 거친 감정을
그녀의 얼굴에서 감출 수 없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도 드릴 수 없게 배제되었기에
그리짐 산에 세워진 신당에서 예배드리는 변형된 형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인들은 그들과의 교류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다인인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마음의 변화를 표현한다.
처음엔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라며 예수님을 유다인으로 보고 있고,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한 후에는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요한 4,19) 하며 예수님을 예언자로 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예수님과 예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4,:25) 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말하게 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하시며 당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배경에 사마리아 마을과 허물어진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 예수님 뒤로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 돌아오면서 서로 웅성거리고 있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요한 4,27)
그런데 렘브란트는 ‘낮’이 아닌 ‘밤’을 풍경으로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는 장면은
성경의 표현대로 정오 무렵이 아니라 어둠침침한 해 질 녘이다.
해 질 녘에는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고,
육적으로 지치고 배고픈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과 악을 구별하기 힘들고 영적으로 배고파야 더 깊이 묵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