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2-3).
사도는 8:1절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폭탄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찌하여 정죄함이 없는지 말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8: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이제까지 내가 말한 복음을 이해하였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왜 정죄함이 없는지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는”(2상) 하고, 또다시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빌 3:1) 때문입니다.
① 첫 절에서 “정죄함이 없다” 하고 선언한 사도는 이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고, 설명을 합니다. “이는” 이란 말은, “왜냐하면” 이라는 뜻입니다.
㉠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원리적(原理的)인 선언을 한 다음에, 어째서 정죄함이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앞에서도 여러 각도에서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교수법은 반복입니다. 사도는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는 그마만큼 중요한 교리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없다 하겠습니다.
② 사도는 그 이유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하고 말씀합니다.
㉠ 이 말씀은 어렵게 들리지만 이미 6: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한 말씀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 “은혜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고,
㉯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 물론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 계명을 악용하여 우리를 정죄하고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점을 고린도후서 3:6절에서도,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 “죄와 사망의 법”이란 말을 문맥은 무시한 채 문자만을 보고, 7:23절의 “죄의 법”과 혼동(混同)하여 2절을 “성화”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본문의 주제는 성화가 아니라 “정죄함이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문맥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근거해서 정죄를 당했습니까? 율법에 의해서였습니다.
③ 그런데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하) 합니다. 여기에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가 있다 하겠습니다.
㉠ 만일 본문을 “성화”로 본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직 “해방”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불완전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은, 이미 해방이 되었다는 과거시제(過去時制)입니다. “해방되었다”는 표현을 7:6절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기”(6:14) 때문에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정죄할 수 없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이지, “성화”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7:14-24절의 사람은 “의문의 묵은 것”, 즉 율법을 행함으로 정죄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이 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본문과는 정반대의 사람인 것입니다.
④ 그러면 우리를 “해방”시켜준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다시 강조합니다만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은,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뜻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해방될 수 있었던 근거(根據)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3:24)이고,
㉯ 구속의 은총을 나에게 적용을 시켜주셔서 해방시켜주시고 생명을 주신 분은 “성령”이시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조(對照)가 나타나는데, “생명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고, “죄와, 성령”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죄들”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7:11) 한 죄의 권세자를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이 외에 본문이 다른 해석을 용납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⑤ 그렇다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어떤 방법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단” 말인가? 그 대답이 3절인데,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3상), 여기서 잠시 멈추고,
㉠ 우선적으로 생각해야할 점은, “율법(律法)이 할 수 없는 그것”이 있다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반대로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정죄(定罪)입니다.
㉯ 정죄해서 죽이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 의롭다고 여겨주는 일을 못합니다.
㉯ 그래서 결국 살리는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⑥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해주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율법이 이런 일을 못하는 것일까요?
㉠ 갈라디아 3장에는 “살리라” 하는 말이 2번(갈 3:11, 12) 등장합니다. 즉 살 수 있는 길이 둘이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는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길이고,
㉯ 다른 하나는 “행하는 자는 살리라” 하는 길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행)할 수 없는”(3상),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살게 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러나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 요구를 따라 주지를 못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⑦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3중) 합니다. 그러니까 살 수 있는 방도는, 하나님이 행해주신 것을 “믿는” 것뿐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해주셨는지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도 연약한 우리 육신을 통해서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려 하셨다면 율법처럼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것은 우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해서였습니다.
⑧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3하) 하십니다.
㉠ “자기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즉 인간의 몸을 입게 하여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 2:14절에서는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血肉)에 함께 속하심은” 하고 말씀합니다. 왜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했는가?
⑨ “육신의 죄를 정하시기”(3하)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 오셨다면 우리의 대표자가 되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한 대속제물로 죽어주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여”(2하) 주셨다는 것입니다.
㉠ “육신에 죄(罪)를 정(定)하사” 한 3절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定罪)함이 없다” 한 1절을 대조해보시기 바랍니다. “죄와, 정”을 결합하게 되면 “정죄”(定罪)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정죄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고 선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음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누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마땅한 죄를 범한 현행범입니다. 그런 자를 어떻게 정죄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대답은 오직 하나, 그 여인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정죄(定罪)를 당하러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우리를 대신해서 그를 정죄하심으로 행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심으로 우리를 해방(解放)시켜주셨고, 율법이 할 수 없는 문제(問題)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⑩ 오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시오며, 나는 무엇이 관대 이렇게까지 행해주셨나이까!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5:6, 8, 10) 행해주셨습니다. 송아지나 양과 같은 생축이 아니라, 흠 없으신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정죄하시지 않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자기 아들에게 정죄하셨습니다.
㉡ 하나님이시라도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있으셨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해주시고,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 하고 선언하시는데도, 그래도 정죄감에 빠진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일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여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⑪ 사도는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하고 말씀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하) 하고, 이인칭 단수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꼼짝을 못하도록 “너희”라 하지 않고, “너”라고 지적을 합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남을 판단하는 자들을 책망할 때에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 하고 육박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고, 말씀하던 사도가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갈 4:6, 7) 하고 가슴에 심어줍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대신 행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것은, 도리어 우리가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깨닫고, “하나님의 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이를 감사함으로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형제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행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