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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다시 미국
a, 휴스턴에서...
휴스턴에서의 열이틀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인야는 날이 밝는 대로, 도착할 신부님의 차를 타고 어스틴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곳에서의 일정은 마치 군대에서의 제대 말년처럼 하루하루 손꼽아 채워온 시간이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고립감 탓에 처음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고, 운전을 못 해 바깥바람 한번 쐬지 못하고 집안에만 처박혀 지내는 것도 악재였다. 더구나 먹거리까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때려치우고 싶던 고비를 넘기고 약속한 열이틀을 다 채운 지금, 스스로 큰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마치 혹독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은 듯한 성취감,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과 동요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야가 이 집에 오게 된 것은 물론 멍 신부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신부님과 각별한 사이인 집주인이 덩치만 큰 새 집을 장만했는데, 마침 내부를 장식할 그림이 필요하던 시점에 화가인 인야에게 조언을 구한 게 발단이었다.
신부님은 삭막한 집의 벽면을 인야의 그림으로 채우면 가난한 화가에게는 큰 보탬이 될 것이고, 집주인에게는 화가의 진품을 소장해 집의 가치를 높일 좋은 기회가 되리라 판단한 듯... 양쪽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야가 미국에서 작업한 드로잉을 확대하고 유화 두어 점을 새로 그리는 선에서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막상 인야가 현장에 와서 본 집은, 그 정도 규모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인야는 화가로서의 솔직한 의견을 피력했고, 집주인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은 예상보다 상당히 커졌던 것으로, 거실 전체를 아우르는 대작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 벽면에 붙일 입체 작품까지 도맡게 된 것이다.
결국 애초 계획에도 없던, 기존 작품들을 챙기러 '한국에 다시 다녀오는' 대대적인 일정까지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가난한 화가에게는 평생 처음으로 찾아온 거대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비록 개인 미술관은 아닐지라도, 인야에게는 자신의 조그마한 미술관을 갖는 기분이기도 했다.
뜻밖의 행운으로 그림을 통해 삶의 밑천을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 눈앞에 다가온 셈이었다.
물론 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파는 쪽과 사는 쪽의 미묘한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결국 신부님의 중재로 모든 일이 매끄럽게 성사되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던 신부님의 이력이 새삼 빛을 발하는 순간일 수도 있었다.
지난 4월, 멕시코에 가기 전에도 인야는 이 집에 며칠 머물며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이 집에 맞는 그림이라기보다 어스틴 시절 작품을 유화로 옮기는 작업('이 인야, 뉴욕에 오다'와 '고목이 있는 집')을 하며 이 집에 어울릴 그림을 구상하는 정도였다.
이후 멕시코에 다녀와 몸을 앓고, 친구를 만나러 간 시애틀에서도 또 탈이 났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 빈집에서 열흘을 더 머물며... 본격적으로 그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것이다.
거실이 높고 큰 만큼 새로운 그림도 필요했고, 그러자면 현장에서 직접 작품제작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도래해... 커다란 캔버스도 새로 사야만 했고, 그런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도 상당히 걸릴 터라... 그건 일단 한국에 다녀온 뒤로 미뤄두었다.
아무튼 일정은 일단락됐고, 인야의 첫 번째 미국행은... 예상치 못했던 일로, 다시 와야 하는 여정으로 이어지며 기간도 늘어나게 됐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인야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밀린 잡무들이었다.
석 달 비운 아파트와 늘어난 지출도 그를 성가시게 했지만, 정작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자신의 무심함이었다.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는 몇 달 동안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쓰고 다녔는데도, 쓴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식비나 공과금 걱정 없이 지냈기 때문에 씀씀이가 단순했던 탓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 돈이 애초에 신부님이 나서서 팔아준 그림값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인야는 생각했다.
봉투째 받아 책상 위에 던져두고 며칠씩 잊고 지내다가, 급기야 신부님이,
"왜 돈을 그렇게 내팽개쳐놓고 다니세요?"하고 핀잔 겸 주의를 주어도,
"나중에 하지요 뭐.." 하거나 "신부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귀찮아 하기 일쑤였던 등,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돈에 무관심했던 게 사실이었다.
평소 돈 때문에 숱하게 고생해온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돈을 등한시하는 처사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쓸 돈은 없고 나갈 돈만 느는 처지가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인야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아차!" 하고 돈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그때마다 "내가 이래선 안 되는데!" 하고 후회를 되풀이하는 사람.
그런데 그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게 천성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웃고 넘길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재개통해놓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공백 세 달 동안에도 별 다른 일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상기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뒤집어 보면, 인야 자신이 한국에 계속 있었어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나날이었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미국에 있었던 게 나았더란 말이지? 적어도 거기서는 마음도 편했고, 그림으로 돈을 만질 수 있는 일도 생긴 거니까......'
작년 세 권의 '까미노 연작' 책 작업을 마친 뒤 멕시코 사건과 건강 문제까지 겹쳐 변화를 찾아 나섰던 미국행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는 결론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내가 죽자사자 매달려 낸 책이 이렇게 잠잠할 수가 있을까? 아, 나는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왜 기본적인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인지......' 하는 생각은, 꼬리를 물다... 결국,
'내가 왜 사나?'라는 데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채 추스르지 못한 채로, 인야는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엔 미국으로의 두 번째 걸음이었다.
그리고 휴스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야가 머문 집은 크고 호화로운 주택이었지만, 집안 시설은 제대로 갖추기 전의 상태여서 인터넷도 안 되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지조차 못하는 생활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작성해 놓았던 며칠 치의 글을 가져와 본다.
(우선, 그 생활을 끝내고 뉴욕에 오자마자 올렸던 글부터 시작해서... 그 뒤에 휴스턴에서 썼던 글이 이어진다.)
카페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말 한 달을 꽉 채우고서야(지난 6월 23일 휴스턴으로 가면서 글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됨) 다시 인터넷과 접하게 되어,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예상하기엔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인터넷과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습니다.
물론 저도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만, 또 이렇게 세월이 가다 보니... 다 지난 일로 되고 마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저는 텍사스 휴스턴에서 일을 마치고, 오늘 뉴욕의 후배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터넷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는데요,
아무튼 다시 만나뵙게 돼 반갑고 또 다행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구요.
우선 인사부터 드리기로 하고,
그동안 작성해 놓았던 얘기가 몇 개 되는데... 그것부터 바로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이 인야
2009년 7월 21일 밤 (현지 시간)
카페 회원 여러분,
다시 '미국'이란 나라에 와 며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짼데요, 아무래도 지난 첫 번째 올 때하고는 조금 다른 기분입니다.
처음엔 입국 자체의 문제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들어왔고, 또 제가 가고 싶었던 뉴욕에 도착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반면 이번엔 이미 한번 와본 곳이라 신선함은 떨어진 데다, 댈러스 공항 입국심사 때 겪은 좋지 않은 기억까지 겹쳐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품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심리 상태는 늘 공항의 입국심사 상황에 따라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손님'으로 오는 나를 이들이 어떻게 맞아주었느냐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컸다는 얘기지요. 그게 그만큼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지난번 뉴욕 JFK 공항에선 첫 입국이어선지 수월하게 통과시켜주더니, 이번엔 상당히 까다롭게 사람을 괴롭히더군요.
댈러스 공항 세관을 통과할 때,
심사대 직원이 무슨 일로 왔는지, 머무는 기간은 얼마인지, 어디서 지낼 건지 물었습니다.
관광비자로 들어온 사람이니 친구를 방문하러 왔고 두 달쯤 머물 예정이며 친구 집 주소를 대고 다른 곳도 들를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자주 미국에 오느냐, 일도 안 하면서 그 비용은 어디서 나느냐, 돌아갈 비행기표는 있느냐는 질문까지 이어졌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들이었지요. 합법적으로 체류하다 돌아가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캐묻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꾹 참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 들고 온 물건도 문제가 됐습니다.
휴스턴에서 할 작업과 관련된 테라코타 작품을 공기방울 포장지로 크게 말아 왔더니, 그게 뭐냐, 가치가 얼마냐, 팔려고 가져온 거냐고 연달아 캐물었습니다.
내 작품을 내가 들고 오는데 무슨 상관이냐 싶어 속이 부글거렸지만, 냉정을 잃지 않고 직접 만든 것이라 값을 매기기 어렵고 친구 집에 걸어둘 선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돌아갈 비행기표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하필 큰 가방 옆주머니에 넣어 짐칸으로 부친 터라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기까지 했답니다.
결국 지문을 찍고 안경까지 벗겨 사진을 찍은 뒤에도, 순순히 보내주지 않고... 나는 재심사 장소로 넘겨졌습니다.
끌려간 곳에는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십여 명 대기 중이었고, 그중엔 한국인도 서너 명 섞여 있드라구요. 심사를 통과한 사람은 짐을 찾아 나가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치 죄인처럼 억류되어 재심사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채,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예전 멕시코에 살 때 미국 비자가 거부당했던 기억까지 떠올라, 이러다 정말 쫓겨나는 건 아닌가... 잔뜩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속은 부글거렸지만 여기서 마찰을 빚어봤자 추방만 당할 게 뻔해, 그저 참고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미국인들도 이런 식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상대적 반감이 치밀었습니다.
스페인이나 유럽을 여러 차례 드나들 때도 이런 식으로 죄인 취급을 당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관광객이란 결국 그 나라에서 돈을 쓰러 가는 손님인데, 대접은커녕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든 만방에 알려 항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세관도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대할까 싶은데, 아마 그러지 못할 겁니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에게 유독 친절한 우리 습성을 생각하면요.)
더 어이없었던 건, 내가 탄 KAL 항공편의 여승무원들조차 예외 없이 까다로운 심사를 받는 모습을 나는 볼 수 있었습니다. 여권만 보여주면 통과되는 줄 알았던 승무원들마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드라구요.
이런 역차별을 겪으면서 우리가 미국과 무비자 협정을 맺은 동맹국이 맞나 싶드라구요.
결국 나라가 강하고 잘살아야 국민도 그만큼 대접받는다는 걸,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며 뼈저리게 느껴온 터라... 그걸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씩씩거리며 입국수속을 마치고 신부님 사제관으로 가는 길에, 문득 이들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가 되긴 하드라구요.
9.11 이후 미국 공항의 검열이 이렇게 철저해졌다는데, 세계 각국에서 특히 어려운 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입국하려 줄을 서다 보니... 이런 식의 검열이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드라구요. 게다가 입장을 바꿔보면 우리나라가 오히려 더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지구상에 중국인이 발붙이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도 있듯, 우리 역시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면이 있는 나라니까요. 그러니 내가 미국에 이렇게까지 불평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현지 교포 말로는, 관광객뿐 아니라 유학생들도 종종 30분 넘게 입국심사를 받는다고 하고, 전직 대통령(Y) 아들로 비리에 연루됐던 인물도 이(텍사스 댈러스) 공항에서 아예 입국을 거절당해 강제 출국당한 사례도 있었다네요.
아무튼 미국 입국 절차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까운 동맹국이나 유럽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온다면, 그와는 전혀 다른 대우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반감이 생겨, 이곳에 머무는 지금도 마음이 그리 개운치만은 않습니다.
'여기서 살라고 해도 안 산다, 나에겐 돌아갈 내 나라가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구요.
그런데 곰곰이 따지고 보면, 저도 '불법(?)'이긴 합니다.
관광객 자격으로 들어와 결국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미국인을 상대로 대놓고 돈벌이를 하는 건 아니지만, 교민과 연결된 일을 하려고 온 것만은 사실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들도 관광비자로 학원 강사를 하며 돈을 버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는데, 저는 체류 기간을 어긴 것도, 미국인을 상대로 일한 것도 아니니... 그나마 다른 경우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미국 입국 시 이런 일을 당할 우려가 많으니, 카페 식구 여러분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 24
어스틴에서 휴스턴으로 온 이래, 요즘 며칠을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도 떨어져 나왔지만, 인터넷과도 단절된 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세상과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인데요.
지난 5월 중순, 한국에 가기 전 여기서 열흘 여 지냈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생활입니다.
날짜가 흘러 계절이 바뀌어 더워졌을 뿐, 그때와 똑같은 생활의 반복인 셈이지요. 그러니 '유배 생활'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지난번 여기를 떠나면서는,
"인터넷이 안 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켜지지 않은, 그 전과 똑같은 조건의 장소에서 다시 반복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은근히 집주인한테 부아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겉으론 불평하지 않고 머무는 건, 제가 조건으로 내걸었던 거실 붙박이장 철거와 인터넷 설치가 아예 무시된 게 아니라 조만간 지켜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될 테니까요.
나야 어차피 이 집 실내 장식을 도맡아 해주려고 온 사람이라, 거실 공간만 차지하고 눈에 거슬리는 그 커다란 붙박이장을 떼어내라고 강력히 추천(사실상 요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주인 부부는 내 의견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했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게 만만찮은 공사인 데다 비용도 적잖이 들 터고... 집을 지을 때부터 맞춰 넣은 가구를 일부러 뜯어내기가 아까운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 점은 저도 이해를 합니다.
게다가 당장 이사할 것도 아니니 인터넷 설치가 급할 것도 없고, 인터넷 하나만이 아니라 유선방송·전화·고속인터넷까지 집 전체 통신 장비를 한꺼번에 놓아야 하는 일이라 비용이 이중 삼중으로 들어가니, 부부간에 의견이 갈려 다투기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이 집 형편도 있는데 제 요구만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첨단의 나라 미국의 호화로운 집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며칠씩 고립되어 지내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그저 집주인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월요일엔 거실 공사를 하러 사람들이 오기로 되어 있으니(그저께 견적을 내러 다녀갔습니다), 그 상황에 맞춰 기다리는 중입니다.
공사가 시작되면 인터넷도 곧 놓이겠지요.
이번 체류가 유독 준비 기간으로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고, 오면서부터 '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야 며칠 지나면 자연히 풀릴 문제지만, 정작 그사이 불편을 겪는 건 나 하나입니다.
인터넷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다던 내가, 21세기 최첨단의 나라 미국에 와서 이런 유배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터넷과 단절된 공간에 뚝 떨어져 지내다 보니, 늘 뭔가 부족하고 어딘가 막혀 있는 기분입니다. 불안하기도 하고 싱겁기도 하고—이런 게 '금단 현상'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시간을 마냥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하는 일이라곤 그림입니다.
저, 화가 아닙니까?
시간을 때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여기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림 그리는 생활에 매이게 됩니다. 스스로에게는 의무적인 일이기도 하구요.
혼자 사는 사람이니 끼니를 챙기는 거야 평소와 다를 게 없지만, 여기가 나다닐 곳 없는 특수한 동네다 보니 그마저 낯설지 않습니다.
건물 밖으론 발 한 짝 내밀지 않고 하루를 온통 이 집 안에서만 보냅니다. 밥 해먹고(재료는 이 집에서 대주니) 나머지 시간은 그림 생각과 작업으로 채우다 보니, 하루가 온전히 내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첫날엔 미칠 것 같더니, 하루하루 지나면서 오히려 안정감이 생기고... 이 생활을 즐겨야겠다는 여유까지 생기드라구요.
그러다 보니, 모처럼 한갓진 작업 생활을 하는 기분이기도 하구요.
생각해 보면 이게 화가에겐 가장 바람직한 생활 아니겠습니까? 일부러 만들려 해도 만들기 힘든 호기일지도 모르구요.
처음엔 인터넷이 없다고 불평하던 제가 이젠 이걸 호기라며 합리화하고 있으니, 이 며칠 사이 저 스스로의 심경 변화도 참 아이러니하구요......
물론 이 생활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디카로 찍은 사진을 포토샵으로 만지는 등—온라인상으로만 단절됐을 뿐, 생활 전체를 아날로그로 되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생활도 막상 겪어보니, 일부러 택한 건 아니었어도... 나름의 좋은 점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갓지게 작업하는 맛을 느끼는 것과, 그 결과물의 질이 좋은 건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어수선했던 데다 작업 리듬도 많이 깨진 터라, 막상 다시 붓을 들려니... 마음먹은 대로 잘 나와주질 않습니다.
그게 지금 저에게 남은 또 하나의 과제랍니다.
6 . 27
여름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장마철일 것입니다만(인터넷이 안 되니 확실한 건 모르는 상탭니다), 여기 텍사스는 기록적인 더위가 지속된다고 하네요. 낮에 바깥에 나가기라도 하면 한낮의 열기가 사람 숨통을 금방 끊어버릴 듯한 기세로 엄습해 와, 섬뜩하고 살벌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화씨와 섭씨의 차이도 인터넷이 안 되니 확실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만, 여긴 화씨 107도까지 올라갔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그게 섭씨로는 몇 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엔 이 집을 위해 준비 중인 입체작업에 쓸 철망 판을 사왔는데요. 표면에 기름기가 미끈미끈해서 그대로는 지점토가 잘 붙지 않을 것 같아(군산 후배의 권유로 새 재료로 작업 중입니다) 비누칠을 해 물로 씻어내는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어차피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이라 풀장 옆 하수도 구멍 앞에서 하다가, 호스 물이 튀어 신발이 젖기에 아예 맨발로 하려는데—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저는 펄쩍펄쩍 뛰고 말았답니다. 어찌나 뜨거운지 맨살로는 도저히 디딜 수가 없더군요.
그나마 물기가 남아 있던 자리라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델 뻔했답니다.
이곳의 열기를 몸으로 직접 체험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열기에 비해 습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그늘에만 들어가면 끈적이거나 후텁지근한 기운은 없습니다. 저는 습한 여름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그래서 동남아엔 아예 여행 갈 생각을 안 합니다), 그 점만은 다행입니다. 근데 여기 기후도 최근 몇 년 사이 이렇게 변해왔다고 하네요. 예전엔 이곳도 덥고 습했는데 요즘은 습기가 점점 사라지고, 게다가 한 달 넘게 가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데(내가 머무는 일주일 사이엔 저녁 소나기가 두 번쯤 내렸습니다),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허리케인이 몰려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바깥에 나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여긴 집집마다 에어컨이 잘 갖춰져 있어서, 멍 신부님 계신 어스틴이나 여기 휴스턴이나 어딜 가든 에어컨을 틀어놓고 사는 게 당연시되더군요. 화씨 74~78도쯤으로 맞춰놓고 24시간 풀가동하는 실내 생활이다 보니, 여기가 더운 곳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랍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선 에어컨을 싫어해서 가급적 피하고 선풍기도 잘 안 켜는 사람인데, 여기선 거의 하루 종일 에어컨 속에서 지내고 있으니 '에어컨 병'이라도 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한 친구는 이따금 전화로, 가끔은 바깥바람도 쐬고 근처 스타벅스라도 가서 인터넷을 하라고 하지만...
저는 원래 밖에 잘 안 나가는 사람 아닙니까?
서울에서도 특별한 일 없으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집에 처박혀 지내는데, 여기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더구나 이 동네는 넓은 주택가 한복판이라 한참을 나가야 가게 하나 만날까 말까 하고, 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도 잘 안 보이는 한적한 곳이라... 나야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는 처지니 집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이런 생활에 거부감이 없는 성격이라, 서울이든 미국이든 장소만 바뀔 뿐 사는 방식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때도 있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건, 이 집엔 커다란 야외 풀장이 있는데도 제가 그 안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같이 기온이 높으면 수온도 알맞을 텐데, 발 한 번 담가본 적조차 없습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정기적으로 와서 소독도 하고 나뭇잎도 건져내니 물은 늘 깨끗한데 말이지요.
왜 그러냐고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집주인을 비롯해 다들 수영이라도 하라고 권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드라구요. 바로 코앞에 있어서 오히려 그런 건지, 초저녁 무렵 풀장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정도는 해도... 그 안에 들어간다는 생각 자체가 잘 들지 않습니다.
지난번엔 완연한 여름이 아니라 그랬다 쳐도, 이번엔 이렇게 푹푹 삶는 더위 속인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지금 그리고 있는 유화(100호, 아직 미완성)에는 수영을 마치고 해먹에 몸을 던진 사람의 모습이 들어갈 예정이라, 며칠 전엔 밑그림용으로 직접 해먹에 누워 사진까지 찍고 드로잉으로도 옮겨놓은 참이거든요. 그런데도 정작 풀장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니, 어째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저는 애초에 수영장 딸린 집을 가질 팔자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갖고 싶지도 않습니다(수영장보다는 차라리 연못이라면 몰라도요).
생각해 볼수록 우스운 노릇입니다.
평소엔 이런 생각조차 없이 지내다가,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새삼,
'내가 왜 이런다지?' 싶어지기는 하네요.
풀장은 풀장, 나는 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놀이인데, 언젠가 한번 들어가 볼까(한번 발을 담그면 매일, 혹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니면 말까... 그 정도로만 풀장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셈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만간 정말 한번 몸을 담가봐야겠습니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나는 왜 이리 무심한지. 이러다 이곳을 떠난 뒤에야 '수영 한번 해볼걸' 하며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좀 더 지내보고 나중에 하지요, 뭐.
돌아보면 이래저래 아이러니한 나날입니다.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도 전혀 덥지 않게 지내는 것도 그렇고, 코앞의 야외 풀장을 소 닭 보듯 하는 것도 그렇고, 인터넷 없이는 하루도 못 산다던 제가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혹시 텍사스의 더위가 너무 심해서, 제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요?
6 . 29
제가 요즘 21세기 현대판 '유배 생활'을 하고 있잖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텍사스 휴스턴의 한 주택가 집 방 한 칸에서 지내고 있으니까요. 이유야 어떻든 이 집은 지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통신 시설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은 물론 TV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구요.
오늘은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근처 한국 슈퍼 체인점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입구에 놓인 한국 신문을 이 집 안주인이 저에게도 한 부 집어 주기에 카트에 싣고 다니다가, 음식 코너에서 냉콩국수를 먹자며 식탁에 앉은 김에 신문을 들춰봤다가,
"어!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구요?"
나는 깜짝 놀라, 마치 혼잣말처럼 지꺼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셨어요?" 하고 안주인이 되묻더군요.
세상 소식을 통 모르고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요.
신문 발행일이 26일이었으니, 벌써 5일이나 지난 소식이었습니다.
약간 충격을 받은 채로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을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랬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이제야 알았답니다.
그게 현실로 다가오면서, 가슴 한편이 아련하고 허전한 상실감도 밀려왔습니다.
아, 아까운 사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던 아주 귀중한 사람 하나를 잃은 것입니다.
같은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인종도 다른데 제가 왜 이러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것도, 평소 그의 노래에 미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그의 사생활이나 이런저런 행실이 구설수에 오르며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명 이 시대의 큰 별이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저 역시 그 잡음들엔 눈살을 찌푸렸어도, 그의 업적과 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 나이가 비록 20대 청춘은 아니지만, 그의 빠른 템포의 곡들엔 지금도 소름이 돋을 만큼 감동받곤 했으니까요.
그러니 열광적인 팬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는 이미 제 가슴속에 한 예인(藝人)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럴 만한 가치와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는데—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언뜻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언젠가 새로운 노래,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접할 가능성을 품은 채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런 기대조차 접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품을 수 있었던 기대감이, 이제는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상실감이었습니다. 더구나 제 개인적으론(비록 내가 훨씬 더 늙어 보일지언정) 그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같은 50대 동년배로서의 동질감도 있었는데......
만약 그가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종과 국적이 달랐어도 그의 노래가 제 가슴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득한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어쩌면 그에 대한 경외감일 수도 있습니다.
아, 아까운 사람.
평소엔 잘 몰랐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이클 잭슨.
그의 존재가 이 세상에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 그러하듯이......
7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