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화인물 <3> 조동언
마을 이름이 ‘산골’인 경북 예천 감천의 시골소년에겐 정보도 돈도,백도 없었다. 81년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소년은 소리에 대한 열정을 누르지 못해 당시 유행하던 ‘시골 소년 도망기’에 합류했고 자신을 충동질 했던 판소리계의 스타 ‘조상현’ 선생을 찾아나섰다.
14일 간의 노숙자 생활.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시골 감천에서 의욕만으로 서울을 찾은 그는 14일만에 누군가의 조언으로 114로 전화를 걸었고 서너번의 통화 이후에야 당시 스타였던 조상현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그렇게 시작된 소릿길은 이후 소리꾼으로써 또 지역의 한국음악 교육자이자 기획자로서 오늘의 조동언(40)을 있게 했다.
#소리가 안되니 북을 쳐라
“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만 있던 시절,고향 뒷산에 올라 뽕짝과 동요를 마치 판소리인양 부를때 였어요.들에서 일하던 동네 어른이 내 소리를 듣고 노루가 골무에 걸려 지르는 소리인줄 알고 지작대를 들고 왔지 뭡니까. 동네가 웃음바다가 됐다고 해요. 아무것도 몰랐지만 열정은 대단했죠”
TV만 틀면 나오는 조상현 선생에게 감동해 판소리 길로 접어든 어린 조동언은 서울행을 단행하며 조상현이 아니면 소리를 안배우겠다,만나면 반드시 명창이 되겠다,학교는 반드시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판소리보존회에서 만난 선생은 그에게 사환 자리를 줬고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당시 저는 판소리계에서는 제자를 사환이라고 부르는 줄로만 알았죠. 경비 아저씨가 ‘신부름 하는 놈’이라고 설명해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선생에게 꺼내자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춘향전 처음부터 사랑가까지가 녹음된 테이프였다.방법을 일러주지도 않았다.힘을 주면 되는줄로만 알고 열심히 소리연습을 했건만 선생으로부터 들은 소리는 ‘저 놈은 소리가 안되니 북이나 쳐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시 자괴감은 3년이 흐른 뒤 전수학교였던 서울국악예고에 입학하며 사그라 들었다.늦깎이 고등학생은 고교 2학년 운동회때 군대 신체검사를 받으러가면서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즈음 소리를 들은 스승은 ‘수고했다.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로 그를 울렸다.가능성 없는 시골 촌뜨기의 서울체류기는 그렇게 열정과 노력으로 소릿길을 다져갔다.
#국악은 기생음악이 아니다
중앙대 한국음악과 90학번인 그는 단 한번을 제외하고 과대표와 학생회장 음대학생회장까지 대표 자리를 내준적이 없었다.뜻이 맞는 선후배들과 전통 두루마기를 입고 북과 악기만으로 무전여행을 떠났으며 거리공연을 하며 대중과 만났다.
대학 1학년때부터 3년간 청주에서 진행한 교사강습은 아내를 만나게 해줬고 그가 청주에 자리잡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불모지나 다름없는,정악 중심의 학교교육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청주에서 국악 대중화라는 불씨를 지핀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만 해도 국악은 저급한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심지어 출세했다고 하는 고향에서도 ‘저 집에 기생오래비 났다’는 말을 할 만큼 식민사관으로 인해 왜곡된 부분이 많았죠.”
95년 청주에 정착했을 당시 화두는 국악의 저변확대였다.이후 그는 국악의 질 향상을 위해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국악반 개설을 권유했고 서울동경이 심한 시골의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악체험교실을 열고 어머니·교사 교육을 진행하고 버스를 대절해 서울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예술의전당을 찾아다녔다.
“문화 충격을 완화시켜주고 싶었습니다.허탈감과 박탈감에서 유연해지는 것이 우선 지역문화 흐름을 바꾸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죠.”
방과후 교육을 받았던 1기생들은 이제 대학 4학년이 됐고 그에게도 70여명의 제자가 생겼다. 96년에 충북민예총과 인연이 닿아 전통음악위원회 분리독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2004년 25현 가야금 3중주단인 가야미 음반 출시,계층별 찾아가는 국악공연 등 소리꾼 조동언은 이제 교육자와 문화기획자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올초 조상현 선생은 30여명의 이수자 가운데 유미리,염경애,주소연씨와 함께 남자로서는 유일하게 조동언씨를 이수자로 지명했다.20여년이 흘러서야 스승은 자신의 소리맥을 이을 제자로 그를 주목한 것이다.
최근 그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본격적으로 소릿길에 접어든지 12년.여전히 자유자재로 편한 소리를 내는 득음에는 이르지 못했다.공부를 좀 더 하고 지역의 인적자산으로 예술단을 만들고 끊임없이 대중성을 찾아나서는 한국음악 기획자가 되는 것.그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조동언 1967년 경북 예천 출생.유계초등학교와 감천중을 졸업하고 1992년 조상현 선생 문하에서 판소리 수업을 받은 후 서울국악예고와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를 졸업했다. 1992년 남원 전국 명창대회 일반부 우수상과 전국판소리대회 준명창부문 대상(1997)을 차지했으며 1994년 서울중앙국악관현악단 청주중앙국악원을 설립한 이래 교육과 강좌, 공연무대를 기획해 올리고 있다. |
첫댓글 오우....대단하셔요 !! 감천에서 유명한 명창이 계셨군요... 가야지 ~ 덕분에 잘 듣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