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9일 수요기도예배 가정예배>
찬 송 - 428장 - 다같이
성경봉독 - 레7:11-20(구약 155쪽) - 인도자
말 씀 - 감사의 결심이 있는 가정 - 인도자
찬송&결단기도 - 559장 - 다같이
주기도 - 다같이
레위기 7장 11-20절_감사의 결심이 있는 가정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김용호씨의 <그도 세상 中에서>라는 책에 보면,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베풀지 못함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둘째, 참지 못함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셋째,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함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화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 화목하지 못함을 가장 후회한다고 하면, 우리네 삶에서, 특히 가정에서 화목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급선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화목이 없으면 가정과 일터에서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일을 추진해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두를 아시고 우리에게 화목제라는 제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레위기 7장 11-20절에서는 화목제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사와 달리 드리는 사람이 가족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제물을 먹는 제사입니다. 3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기에 고기는 다 먹지만 기름과 콩팥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3장 16절을 보시면,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기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힘이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한 콩팥을 드립니다. 콩팥은 사람의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라 여겼습니다. 즉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립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각각 제 몫이 할당되는 식사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화목이 되고 회복됩니다. 이 화목의 시작이 사람에게 비롯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나아가 레위기 7장에서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감사함으로 드린 경우는 그 날에 먹어야 하지만 서원이나 자원이면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왜 하루나 이틀 만에 먹어야 합니까? 이 규정은 음식물의 부패 때문이 아니라 제물이 거룩하기 때문이며 더렵혀짐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는 음식의 양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하루에 다 먹습니까? 혼자 먹지 않으면 됩니다. 나눠 먹으면 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제 이웃과의 화목으로 이어져야 하며, 이웃과의 화목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제물에 대해 7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또한 15절에도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이라고 합니다. 여기의 감사함이 무엇입니까?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를 통해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직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자면 뭔가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사가 받아들여질지 아닐지 모르는데 어떻게 무엇이 감사합니까? 일단 화목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가 과연 화목을 만들 수 있습니까? 처음에 사람이 죽을 때 하는 3가지 후회라고 했습니다. 죽을 때라는 뜻은 한편 이런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동안 인간은 그렇게 내내 살면서 화목에 대해 관심도 없고, 해보려 하지도 않고 화목을 이룰 능력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화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화목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바로 화목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화목제를 허락했으니 여기에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화목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소나 영이나 염소의 희생으로 드립니다. 즉 화목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그냥 말로 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예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10억 엔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잘했다 하며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뭐라 하면서 아니라고 했습니까? 돈만 주면 끝이냐 이었습니다. 이는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와서 엎으려 절하며 눈물로 사과해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돈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용서에는 그렇게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화목에도 역시 그런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보상을 위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책임이 지시고 희생하십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를 죽이십니다. 이 역사로 화목을 이루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사함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마땅히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를 모른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화목을 이루셨는지 모른다는 뜻이고, 이를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감사는 믿는 사람의 신앙의 잣대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어떤 착한 이발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신부가 찾아와 이발을 했습니다. 이발사의 마음에 '이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주의 종의 이발을 내가 해 드렸으니 오늘 신부님의 요금을 받지 않아야겠다.' 생각해서 그저 "그냥 가십시오.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신부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너무 고마워서 그 다음 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문 몇 권을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배달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은 또 경찰관이 머리를 깎으러 왔습니다. 이발을 해 주었더니 또 그는 말합니다. "제가 지역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냥 가시지요." 돈 내겠다고 실갱이를 하다가 결국 "그러시지요." 하고 갑니다. 그렇지만 경찰관은 또 너무 고마워서 편지 한 장하고 도너스 몇 개를 봉투에 넣어서 이발소 문 앞에 놓고 갔습니다. 그 다음 날은 국회의원이 이발소에 왔습니다. 역시 이발을 해 드린 다음에, 돈을 내겠다고 하니까 "아, 내지 마십시오. 저도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갔습니다. 그 다음 날 이발소 앞에 국회의원들이 줄을 섰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는데, 국회의원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당연한 삶 아닙니다. 누군가의 보상으로서의 희생이 있어, 참아줌과 기다림과 베풀어 줌이 있었습니다. 고3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갑니다. 그 자리까지 혼자 왔고, 혼자의 싸움이었습니까? 맞습니다. 참 잘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돌아보면 혼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참고 기다려준, 기대해 주고 응원해 준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우리 일터와 가정은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닙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환난과 병든 몸과 상처 앞에 낙심하지만, 이미 지금까지 혼자 살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화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없는 화목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미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에 그 화목이 있습니다. 이 화목을 두고 모든 일에 감사로 나아가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이미 주어진 화목에 감사하시고, 더욱 감사함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화목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