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로 부터 이어오는
한국 전각의 정통맥을 잇는 전각장

전각장 안정환은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상촌마을 광주안씨 진사댁 후손으로 7세때 부터 조부 (안우진)로 부터 천자문부터 배웠다.
그리고 소학, 명심보감, 사서오경을 익히면서 모든 서체와 필법을 익혔다.
연산동 시청 앞 길 건너 청계(晴溪)서각구실에는 5월 18일부터 부산박물관에서 전시하는 ‘명장 8인전’에 출품할 작품들이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러는 돌에 새기고(石刻), 나무에 새기며(木刻), 기왓장과 동판, 철, 죽간(竹簡) 등에 새긴 갑골문·전서·해서를
망라한 각종 서각들이다. 그중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이다. 가로 180cm, 세로 45cm의
참나무 위에 칼로 새긴 <세한도>는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한 폭의 그림과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적은 추사의 친필 글씨로 구성되어 있는 <세한도>에는 한 겨울, 창문 하나만 나 있는
허름한 집 한 채,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 그리고 ‘세한도’란 그림 제목과 구하기 힘든 서책을 청나라에서 구해다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준다는 내용의 글씨 몇 자와 함께 인장 몇 방 이것이 전부이다. 보통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배경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간단한 그림이다.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몸통은 썩고 가지 끝에 남아 붙어 있는
솔잎 몇 닢이 애처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절개를 지킨 이상적의 모습이자 유배생활에 지친 추사 자신의 몰골임에 분명하다.
그림과 글씨는 5개의 크고 작은 인장들과 더불어 자유스러움과 고졸함이 함께 묻어난다. 화선지에 그린 느낌 못지않게 서각의
따사로운 느낌이 풍겨온다.
전각(篆刻)이란 돌이나 나무·금·옥 따위에 도장(印章)을 새기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전각은 일종의 인장을 새기는 예술행위이다. 전각의 ‘전(篆)’ 자는 원래 ‘옥새길 전(전)’으로 써서 옥이나 돌 위에 올록볼록한 화문(花文)을 쪼고 새기는 것을 뜻한 말로서 고대의 옥을 쪼거나(雕玉), 돌에 새기거나(刻石), 대에 새기거나(鑄竹), 구리에 새기는(銘銅) 것을 전각이라 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옥(玉)을 죽(竹)으로 고쳐 쓰게 된다.
진(秦)대를 거쳐 명청(明淸)대에 이르면 전각가들은 전서(篆書)에 기초를 둔 조각방법으로, 그 소밀(疎密)한 표현과 필치의
신기스럽고 기품이 흘러 넘치는 운치(韻致)를 위주로 하는 예술형태를 갖추게 된다. 갑골문과 금문(金文)·석고문(石鼓文)·
소전(小篆)·대전(大篆)들을 아우르서 전각으로 통칭하였다.
전각장(篆刻匠) 안정환(安定煥·72)은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詩禮里) 상촌마을 광주 안 씨 진사댁 후손으로 7세 때 조부(안우진)께 천자문부터 배웠다. 그리고 소학, 명심보감, 사서오경을 익히면서 서체와 필법을 익혔다. 조부는 부친(安光碩)을 일제 말기 보도연맹을 피해 동래 범어사에 출가시켜 동산(東山) 혜일(慧日) 큰스님에게 맡겨진다. 법명을 대희(大喜)라 했다. 청남 오재봉과 동문 수학한다. 동산스님은 손재주가 빼어나 글을 잘쓰고 인장을 곧잘 새기는 대희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서울 조계사로 보내면서 “저녁 예불이 끝나면 주지스님 허락받아 외삼촌 오세창 문하에서 서예와 전각을 배우도록 해라”는 동산스님의 편지와 대희의 작품을 본 오세창이 문하생으로 거두었다.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와 와당, 갑골문과 전각에 있어서 당대의 일인자 오세창(吳世昌, 오경석의 아들)에게서 배웠다. 이로 말미암아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과 이상적(李尙迪·1804~1865, 한어역관, 김정희 문인), 추사로 이어지는 학맥과 서맥을 잇게 된 것이다.
부친은 해방 후 부산의 대각사를 비롯하여 창원 등지의 절에서 주지로 근무했으나, 불교정화운동 때 환속하여 부산에서 한성여대 등의 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치기도 한다. 때맞춰 고향에서 중학 과정을 마친 안정환이 부친으로부터 서예와 전각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침 받는다.
배운대로 전각하였지만 잘못된 칼품이 보이면 나무람과 동시에 애써 새긴 전각을 도려내어 버려 다시 작업하게끔 훈련 받았다.
어른(부친)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잘못 새겼으니 파내어 버려야 해”라는 환청을 듣고 마음가짐을
다시한다. 그야말로 엄격하고 철저한 도제식(徒弟式)교육이었다.
1967년 해군제대 후 해외선박회사 매니저로, 무역회사와 선박회사를 설립(1980)하여 생활인으로서 모범을 보이면서도 붓과 칼을 놓지 않았다. 틈틈히 부친이 머물고 있는 대구·서울 등지에 가서 부친의 예술세계를 배우고 작업의 완성을 위한 예(藝)과 도(道)를
깨쳤다. 그러기에 안정환은 그의 부친의 공부를 닮아 전각의 기법뿐 아니라 서법도 바로 체득함으로써 각(刻) 기능만 앞세우는
여타 장인들과는 달리 전각의 자법(子法)·장법(章法, 문장구성법)·도법(刀法, 조각도 다루는 법)들을 모두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6년 서울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백제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도 수상하였다. 1993년 금정구 남산동에
전각연구실 ‘安之居’를 개설하였다. 편액은 부친이 이름지어 전각해 주었다.
대스승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를 익히고 연구하여 자신의 서체 ‘청계서체(淸溪書體)’를 만들었다(1999). 추사체를 닮아 글에 힘이
뻗치고 기운이 흘러 넘친다. 1980년 제1회 안정환 서도전을 부산일보 전시실에서 연다. 그가 속한 예비역 해군동지회 창립기념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였다. 이를 계기로 통영 앞바다에서 인양된 총통(銃筒)에 새겨진 14자 ‘一射敵船必水葬 龜艦黃字驚敵船’(한 번 쏜 화살은 적의 배를 장사 지내고, 거북선의 누런 글자만 보고도 적의 배는 도망간다)를 2.1m 종이게 써서 해군본부에
전달하게 되었고 해군본부는 이를 영인하여 ‘복사 불허’란 지시사항으로 각 함대에 배부하였단다.
88년 이후 일본의 각 지역을 돌면서 전시한다. 2000년 일본 구마모토 전통공예관 개인전, 2001년 대마도 예원전을 비롯하여
나가사끼전, 벳부시 우좌신궁 등의 개인전 초대전을 통해 한국의 서예와 전각의 우수성을 일본 등지에 알렸다. 이와 함께 근대일본
미술협회와의 교류전도 어느듯 십수 회에 달한다. 국내 보다 일본에서의 활동이 컸다.
2008년 11월과 2012년 6월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청계 안정환 서도전」을 열어 반백 년 서예와 전각작업의 결실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의 도록에서 보는 청계의 글은 품위 있으면서 활달 경쾌하다. 1951년부터 64년 간 닦아온 외길 서예인의 장도(長途)
위에 45년 간의 전각인생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갑골문을 비롯한 전서와 예·행·초서를 망라하였다. 특히 그만의 필치로 만든
글(그림글자(?))은 아름답기까지하다. 꾸김살 없는 사군자와 군더더기 없는 전각은 작품성으로서도 빼어난다.
그의 전승계보가 독특한 서예경지와 전각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 이상적, 이상적의
제자 오경석,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 오세창의 제자 안광석 그리고 안정환으로 이어졌으니 서예에서와 전각에 있어서 한국 정통맥의 일가를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안정환에게 전각은 새기는 것이 아니라 찢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각칼은 칼이 아니라 철필이어서 돌을 찢어야 글을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서예에서 붓을 바로 세우듯이(中峯) 칼끝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붓에도 중봉과 측봉(側峯)이 있는 것처럼 칼에도 중봉과
측봉이 있어서 칼 쓰는 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칼을 잡는데(刀法)도 집도(執刀)와 칼을 움직여 나가는 운도(運刀)를 적절히 운용해야 한다. 오른손에 나무망치 들고 왼손의 칼 각도를 맞추어 조심스레 새겨 나가는 안정환 장인의 꼭 다문 입술은 순간 모든 기운에서 벗어나 오로지 판각을 응시하는 시선의 촛점으로만 집중하고 있다.
안정환은 증조부대로부터 진사집안으로, 영남의 이름난 한학자였던 조부에게서 한문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추사의 맥을 잇는 부친으로부터 서예와 전각의 도를 깨쳤다. 그의 안광에서 예기(藝氣)가 흘러 넘친다. 붓을 쥔 손이 화선지 위에서 춤을 추면 붓따라 글이 기운차게 뻗고, 칼끝으로 새겨내는 전서는 새로운 서법을 탄생시킨다. 전각장으로서 스승들께 부끄럽지 않는 경지의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