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0, 11일 이틀간 파리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인 파리’에 관한 뉴스를 처음 본 것은 아마 멀건 국물에 밥을 말아먹던 아침 식탁에서, 구독하고 있던 일간지의 첫 면을 펼쳤을 때였을 것이다. f(x), 소녀시대, 샤이니,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1만4천여 명 관객 동원… 몇몇 큰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뭐, 음,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또 여러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음, 그렇군, 아, 이런 일이…, 하하, 흥미롭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군. 식사를 마친 나는 신문을 접어 식탁 한쪽에 밀어두고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의 평범한 식사, 그리고 평범한 신문이었다.
자립음악가 주체적 국외 교류 활발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가량 지난 지금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한 달간 나와 내 친구들은 SM타운이라든가, 한류라든가, K팝 전사라든가, 유럽 정복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다(아, 가끔 f(x)의 새로운 음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있다). 간단히 말해, 한류 같은 것은 전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소녀시대가 파리의 여신이 되건 말건, 동방신기가 환상적인 공연을 보여줬건 말건 우리는 여전히 홍대앞에서 가장 싸고 양 많은 밥집에서 3500원짜리 밥을 먹고 밤에는 대충 술안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는, 어찌되었건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런 것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사람에 따라선 “국익이 달린 것인데…”라는 식으로 냉소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오히려 이 정도의 냉소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기당하지 않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정도가 아닐까. 어차피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예술인 복지법’도 통과되지 않아 가난한 전업 예술가들에게 ‘자발적 실업’이란 허울 좋은 명목을 씌워 사회안전망 바깥으로 ‘자연스레’ 내몰고 있는 한국이란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우리같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국가로부터 ‘얻어낼 건덕지’가 없다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K팝 전사가 전장(유럽)에 가서 잘 싸워 이기든 말든 우리에게 돌아올 게 하등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온건하게 현실론을 펼치며 국내 시장이 아닌 국외 시장을 노려보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한 선택 아니겠는가, 라고 충고해줄 이도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권리도 없는데 자구책(시장 확대)이라도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그렇지, 그렇지. 어차피 사회주의도 사민주의도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최소한 자기 입 풀칠할 만큼의 돈은 벌어야 할 것이고 그 방편 중 하나로 국외 시장을 뚫어보자는 정도엔 누가 동의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이미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장에 7월 9, 10일만 해도 작년에 이어 두 해째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존 바틀리의 솔로 프로젝트 ‘하르코프(Kharkov)’ 한국 투어 공연이 열린다. 8월 중순 쯤에는 일본의 2인조 사이키델릭-얼터너티브 록 밴드 ‘교라이교(魚雷魚)’도 일주일 정도 한국에 머무르며 한국 음악가들과 투어를 진행할 계획이다. 우리가 직접 가는 경우도 적잖다. 지난 2월에만 해도 언더그라운드에서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이 일주일 정도 일본 투어를 다녀왔으며, 그중 어쿠스틱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는 H는 지난 5월 가난뱅이 활동가 마쓰모토 하지메 등이 기획한 ‘반핵 사운드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 한 차례 더 비행기에 오르기도 했다. Kharkov의 한국 투어를 전반적으로 디자인한 P가 오랫동안 국외 언더그라운드 신과 한국 언더그라운드 신의 접속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왔다면 마쓰모토 하지메는 작년 동교동 삼거리의 철거농성장-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공연장, 그 외에도 다양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두리반을 방문했던 것을 인연으로 떼지어 두 나라를 오가고 있다. 어찌되었건 알아서 잘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금 ‘웃기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뭘 하건 말건 미디어에선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다는 것 자체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한류 유럽 정복’을 외치면서 한편으론 마치 누구나의 교양인 양 ‘문화 다양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실제로 ‘다양성’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엔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허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어찌되었건 지나치게 ‘시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 생각되진 않는다. 심지어 진보 언론들에서도 이 이상의 관점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데, 국내와 국외의 언더그라운드가 교류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시장을 넓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분명히 있다. 이를테면 투어 과정에서 만나는 풍경들, 사람들, 문화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미적 체험이 될 수 있으며 평소 만나보기 힘든 국외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과 공연하면서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테크닉이나 사운드와 조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 음악가의 세계가 다양한 다른 세계들과 만날 수 있다.
이를 자칫 낭만적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그 모든 것이 모두 ‘쓸데없다’면 과연 음악은 왜 듣는가? 음악은 왜 연주하는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음악은 콘텐츠도 아니다. 음악은 돈이 아니다. 음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음악은 국가의 이득이 아니다. 음악은 무언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겠으나, 때로는 그 모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아닐 수 있다’에 나는 음악의 포인트가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음악답게, 또 예술을 예술답게 만들어주는 비밀은 어쩌면 그 점에 압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적인 것’으로 귀환하라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원점으로. 나와 내 친구들은 왜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인 파리’에 아무런 흥미가 없을까? 아마 그것이 전혀 ‘음악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반면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아무 관련도 없는 어떤 음악가들의 작업에 열광하기도 하는 것은, 그것이 ‘음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효과가 얼마라느니 따위의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세금을 엄청나게 걷어 우리 가난한 음악가들 용돈이라도 준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바보 같은 조세제도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미디어에 기대하는 것도 사실은 없다. 말했듯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보다는 그저 ‘뉴스’로 소비되고 싶진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내가 발딛고 선 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꾸준하게, 조그맣고 소소한 작업들을,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해가는 것, 그렇게 차근차근 나와 주위의 삶을 조금씩 더 ‘삶다운 삶’이 될 수 있도록 꾸려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은 전사의 방식이 아니라, 농부의 방식이다. 다만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 수확하는 것이다. 때로는 여행을 떠나 옆나라 농부들의 방식을 배워오고, 또 새로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잘 익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동네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일까. 오히려 이런 삶이 과도하게 낭만적이라 생각되는 지금의 사회가 너무 비정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조금 당황스럽겠으나 내가 지금 갑자기 연단에 올라 “농부질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정부는 각성하라!”라 외쳐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은가? 자긍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농부질을 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한류 같은 음악적으로도 뭐로도 별 시답지 않은 것에 끌릴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글 · 단편선
‘독립’(Indie)보다는 ‘자립’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자립음악가. 대중음악 웹진 <보다>에 비평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