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심장 콘스탄티노폴리스 탄생
그리스도교와 제국의 결합은 어느 곳보다 제국의 수도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형성되던 시기의 도시 계획과 기능은 향후 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을 연결하는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비잔티움 제국 역사 연구와 논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이 거의 동일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추진한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는 그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도 완료되지 못하고 이후 10여 년간 이어졌을 것이다. 일곱 개 언덕까지 차용할 만큼 로마를 모범으로 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곧 '제2의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공식 직함[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공식 직함은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자 세계 총대주교'이다. 번역은 한국 정교회 대교구의 용례를 참고했다.]에서 이 칭호를 고수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사가 전대미문의 규모였음은 확실하다. 새로운 건축물이나 공공사업의 규모도 컸지만, 제국 전역에서 끌어모은 수백에 이르는 동상과 예술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 도시 비잔티온과는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춘 존재로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 의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엄격하게 그리스도교의 원칙에 따랐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이교적 요소와 혼재했으리라고 주장한다. 이교의 기념물이 여전히 도시에 존재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편이 이 문제에 적절한 해답이 될 것이다(물론 단순히 역사적 장식물로만 기능했을 수도 있다). 과거의 이교식 의례 또한 마찬가지로 진화하여 이후의 의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몇몇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꼭 필요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애초부터 이 도시를 재창조한 황제에게 모든 것을 빚졌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였기에 도시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교적 도시로 기능하도록 의도했다.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또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원래는 기원전 1490년 고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 시대에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진 것으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 오벨리스크를 셋으로 분할하여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로무스에 설치했다.
황궁과 히포드로무스를 중심으로 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본구조는 사두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사두정 시기 황제들이 기거한 도시들은 모두 같은 형태이다). 황궁과 히포드로무스 인근에 소수의 교회와 성소, 원로원과 같은 공공시설, 태양을 상징하는 왕관을 쓴 나체상이 중앙의 반암 기둥 위에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포룸 같은 의례 시설이 자리 잡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4세기 말과 5세기 내내 규모와 화려함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주었다.
오벨리스크 받침대 북면, 테오도시우스 1세가 히포드로무스에 있는 황실 특별석에공동 황제와 근위병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아래는 조공을 바치는 야만인들의 모습이다.
이 시기 지어진 항구, 수조 시설, 분수, 수도교, 곡창, 육상과 해상의 성벽, 새로운 광장들, 우뚝 솟은 기념비들, 교회와 수도원 들은 하나하나가 역사적 건물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로무스로 오벨리스크를 옮겨 온 것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로마와의 연관성은 아직 중요했다. 서방 제국과 동방 제국은 서로 로마니타스Romanitas(로마인다움)를 경쟁하듯 뽐내면서도 유대감을 지녔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긴 종교 건축물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그 자신의 영묘이기도 한 ‘성 사도 성당’이다. 비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는 반암으로 만들어진 석관 안에 안치된 다음 12사도의 성물이 담긴 12개의 석관에 둘러싸이기를 바랐다. 이는 성인의 유물이 무덤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진 첫 번째 사례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자 이러한 영묘의 배치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로마 황제의 장례식인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례 과정의 중요한 두 기둥은 군대와 그리스도교 전례였으나, 그렇다고 이교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떠난 황제의 얼굴을 새긴 주화의 발행은 이교 시대 로마의 신격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콘스탄티누스 재위 시기의 변화는 고대 전통에 혁신을 더한 것이었다. 막상 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12사도의 중심에 놓여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놓인다는 그의 계획과 달리 12사도와 함께 놓여 사도들과 동격으로 안장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화 이전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곧 신이었고, 이후에는 신은 아니지만 여전히 신성성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재위 시기 변화의 특징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지위는 차츰 성장했다. 교회 사이의위계도 그러했지만, 주요한 성지에 보관된 성물들이 옮겨진 것이중대하게 작용했다. 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살아 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은 주상 고행자[주상 고행자(苦行)는 기둥에 올라 생활하는 고행을 한 수도사를 부르는 칭호이다. 덕이 높은주상 고행자 아래에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병을 치유받거나 가르침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다니엘레가 고행한 장소로 영예를누렸다. 기둥 위에서 생활하는 이 수도자를 보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했는데, 그중에는 황제와 조신들도 있었다. 인력 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생산지보다는 수입처에 가까웠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레고리우스와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까지 궁정에서 주요한 직위를 수행한 이교도 웅변가이자 정치인 테미스티우스가 좋은 예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력과 재화가 집중되고, 이에 따라 후원이 증가하면서 수도를 더욱 수도답게 만들어 주었다.
425년 국가가 제공하는 고등 교육을 위한 학교(과거 학자들은 시대상황에 맞지 않게 '대학교'라 표현했다)를 세워 문법, 수사학, 철학 그리고 법학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교육했다. 당시 법학 교육의 중심지는 베이루트, 약학 교육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철학 교육의중심지는 아테네였으므로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교육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도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429~438년에 걸쳐 실시한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테오도시우스 2세까지 재위 시기에 발행된 모든 법령을 수집하는 작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 작업을 감당할 자원이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5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단지 황제가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제 황제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회 기반 시설과 건축물은 의례와 함께 사람들이 천상의 질서가 지상에 강림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