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호온 닭과 우리 가족
유해용
흰색, 하양, 白色
나는 하얀색을 좋아한다. 흰색을 좋아하게 된 건 유년기의 잊지 못할 추억이 있어서다
흰색은 미술에서 색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청결, 평화, 성스러움을 뜻한다고 한다.
하얀색하면 나에겐 떠오르는 세 가지 일이 특히 잊히지 않는다. 첫째는 부모님이 병아리를 사서 키웠던 레그호온 닭 99마리와 하얀 달걀.
두 번째는 시골 신작로에서 지나가다 첫 대면했던 하얀 칼라깃 수녀 분들.
세 번째는 유년기 겨울철 자고 일어났을 때 밤사이 하이얗게 소복소복 쌓인 첫눈이자 흰 눈.
모두가 하얀 색상이다. 때마침 창밖엔 흰 눈이 펑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다.
어릴 때, 우리 부모님께서는 병아리에서 닭으로 키워서 팔으려고 집 앞의 넓은 빈 터에 커다란 양계장 축사를 신축하셨다. 그리고 닭을 키우고 그 닭들을 부모님께서 다 처분해 판 일들까지의 지난날을 나는 지난 밤의 꿈처럼 더듬어 본다.
그리하여 오늘은 ‘레그호온 닭과 우리 가족’에 대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아버지께서는 직업이 없으셔서 뭔가 돈을 벌어야 했기에 빈터를 활용해서 닭을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일이 있으셨다.
아버지께서는 〇〇 시내에서 어린 병아리 100마리를 사 오셔서 방을 두 칸으로 나뉘어서 반 칸은 우리 가족들이 생활하고, 그 반 칸방에서 어린 병아리들을 키우셨었다. 한 마리만이 죽어서 총 99마리를 키웠다고 하셨다.
반 칸방을 따뜻하게 하려고 전구로 노랗게 방을 밝혔으며 그 반 칸 방에서 노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을 자고 병아리 소리에 맞추어 아침 일찍 잠에서 깨곤 했던 기억도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키운 병아리들이 조금씩 자나는 동안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옆의 빈터에 닭장(양계장)을 만드셨다. 천장과 아래쪽의 4면은 기둥을 세우고, 철사로 된 그물망이 단단히 고정되었으며, 그물망 아래쪽은 송판을 세워서 고양이나 쥐가 또는 산짐승들이 접근을 못하게 했던 걸로 기억한다. 닭이 좋아하는 사료를 주는 V자형의 판도 만들었다. 시간에 맞추어 어머니나 아버지가 정해 놓은 시간엔 사료들이 담긴 포대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사료들을 고르게 그 V자형에 부어놓으셨다. 쪼르르르 일제히 달려와 구구구구 소리를 내며 사료들을 먹는 닭들의 표정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부모님이 키운 닭 모두는 하얗고 덩치는 제법 단단해 보이며 닭벼슬은 붉은 볏이 돋보이는 레그호온종 닭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에게 어떤 때는 개구리를 잡아오라는 심부름도 시키셨다. 나와 남동생. 때론 여동생까지 개울가로 가서 덩치가 제법 큰 개구리를 맨 손으로 잡아오면, “애썼다” 하시며 아버지께서는 닭장 안으로 들어가 개구리들을 닭들에게 던져 놓으셨다. 놀란 개구리들이 이리 폴짝 저리 폴짝 뛰지만, 곧 그 많은 닭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닭의 먹잇감으로 희생이 되곤 했다.
이른 새벽이든, 낮이든 밤이든 “꼬끼오 끼오” 잘 울던 건강한 레그호온 닭들!
그리고 요술을 부리듯 하루에 한 번씩 달걀을 쏘옥 쏘옥 낳아주던 닭들!
나와 동생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꼬끼오 끼요’ 하는 소리가 울려 새벽잠을 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흙으로 둘러쳐진 작은 닭장축사에서, 닭들을 마당가로 몰아내어 보내곤, 닭둥우리에서 조심스레 달걀을 꺼내어 바구니에 하나 둘 담는 일이었다. 닭이 놓은 달걀은, 대체로 하얀 달걀이었는데, 드물게 어떤 것은 갈색 달걀이었다. ‘어랏! 이것 보아라.’ 달걀이 왜 어때서 어느 달걀색은 하얗고, 어떤 건 갈색일까? 신기했다. 금방 낳은 달걀이라 닭의 깃털이 묻어있던 달걀도 있었다.
그 달걀을 꺼낼 때는 따끈따끈한 달걀의 촉감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어떤 달걀은 약간 금이 가 있어서, 아마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런 달걀들은 상품성이 떨어져서 우리 가족들에게 그냥 깨먹으라고 주셨던 듯하다.
이렇게 공을 들여 받아낸 달걀을 어머니와 할머니께선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20~30분이 걸리는 거리를 가시면서 쉬고, 또 일어나 이고 팔러 가셨단다. 아랫마을 장이 열리는 날에, 어떤 날엔 ○○ 시내까지 가서, 달걀을 머리에 이고 조심조심 걸어가셔서 달걀을 팔아 돈으로 바꾸어 오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1년인가 2년을 달걀을 팔고, 닭을 키우다가 어느 날에 그 키워온 닭을 다 팔아 정리를 하셨다. 나는 레그호온 흰 닭이 모두 사라지고 난, 텅 빈 닭장을 바라보며 쓸쓸해했다.
닭을 팔아 모은 돈이 몇 만원은 되셨을 터였다. 나는 그 닭들을 왜 팔게 되었는지? 어느 사람에게 팔았는지?
‘그 닭을 판 액수가 얼마인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 물어볼 걸, 왜 그 과정을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았지?’ 하는 후회가 된다.
이유가 어떻든 그 닭을 판 돈을 저축해서 가지고 계셨을 무렵, 어느 날 서울에 사시던 고모께서 찾아오셨다. 당시의 고모부가 사업을 하는데 사업자금이 없다고, (아마도 닭을 판 것을) 고모는 알고 서울에서 내려오셨으리라.
닭들을 처분하고 난 뒤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모께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겠지만, 당시에 서울에서 최종적으론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고모부가 돈이 너무나 필요했겠지(추측) 어쩐지는 어렸던 나는 그 당시엔 몰랐고, 고등학생이 된 뒤에 닭을 판 그 돈 전부를, 그 돈을 빌려주셨다고, 고모께서는 ‘이자를 쳐서 몇 년 안에 꼭 갚는다’는 조건으로 빌려가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돈을 나중에 받지는 못하셨다고 했다.) 고모부의 하는 사업이 잘 안되었는지, 한번 돈을 가져간 고모부와 고모에게서 우리 부모님은 이 돈을 평생 받지 못했단다.
“엄마요. 어릴 때 양계를 해서 닭 키우던 생각이 나요.” 라고 생존해 계실 때,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내가 꺼내놓으면, 어머니는 우리들 어린 그 때, ‘너희들 건강하게 자라라고 닭이라도 실컷 잡아줄걸… 아니면 계란으로 반찬거리라도 넉넉히 해 줄 걸…’ ‘그게 내내 걸리는구나’ 라는 말씀을 하셨다. 참 바보였다며, 달걀이나 닭이나 잘 키우고 팔 생각만 했으니, 참 어리석었다는 말씀을 되뇌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그 당시에 금이 살짝 가서 깨진 달걀을 먹고 자랐으니까 오늘날 이리 건강한 거지요. 어머니!” 하며 나는 엄마의 허전해하는 마음을 달래 드린다.
내가 빙긋이 웃으며 이리 말하고 났어도, 어머니께서는 다 돈이 없었으니까 그렇겠지만 그 당시에 “왜 그리 알뜰히 돈을 모으려고 발버둥 쳤는지 모르겠다!” 라며 지난날을 후회하시는 말씀을 종종 되풀이 하셨었다. “집에 워낙 돈이 없었으니 모으려고 그랬을 터이지만, 너희들에게 그 많은 계란을, 너희들이 좋아할 계란찜이나 계란말이나 계란 프라이 같은 반찬거리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한 푼이라도 안 쓰고 아껴 오직 돈을 아껴 모을 생각만 했으니… ” 라며 자신이 참 바보였다고 고개를 숙이시며 아쉬운 말씀을 하신 적이 몇 번이나 있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