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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로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민문자
박두진 작품 토론회 스케치 / 민문자
한국문인협회는 2009년 5월 25일 오후 2시에 예총회의실에서 한국현대시인협회 직전 이사장을 역임한 신규호 시인을 연사로 모시고 박두진 작품 토론회를 가졌다.
김년균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 직접 사회를 보면서 연사 소개를 하였다. 참석자는 김병권 문협 부이사장, 김송배 문협시분과 회장, 한분순 문협시조분과 회장, 오양호 문협평론분과 회장 심재언 원로 소설가 외 문협회원 다수와 박두진 선생의 마지막 제자 조남철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등이었다.
신규호 연사는 대학교 입시에서 공대를 지망했으나 녹색 색신검사에 걸려 포기하고 좋아하는 국문과를 선택하게 되어 대학에서 문덕수, 박목월, 양주동, 미당 서정주, 박두진 선생을 만나 그분들의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다음은 신규호 연사의 말씀이다.
작품지도를 제일 많이 해준 분은 박목월 선생이고 현대문학에 처음 추천을 해준 분도 목월선생님이었다. 박두진 선생과의 인연은 한 학기 지도 받은 것과 현대문학 천료에 작품평을 써주신 일이다. 공군장교 4년 복무를 마치고 나오니 현대문학 추천방법이 3인 공동추천으로 바뀌어서 미당과 박목월과 박두진의 추천으로 천료가 되었다. 이때 작품이 <등뼈>였는데 박두진 선생께서 역사의식이 강한 작품이라고 칭찬을 해 주셨다.
박두진 선생님은 금테안경너머로 바라보는 깐깐하고 강직한 분이었다.
박두진(朴斗鎭) 시인의 아호는 혜산(兮山)이며 1916년 경기도 안성 시골 빈농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공부하였다.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고 교수가 된 후 우석대학교를 뒤늦게 졸업했다.
혜산은 1939년과 1940년 《문장文章》지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작품이 정지용 시인 추천으로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시단에 나왔다. 정지용 시인은 작품에 대하여 ‘혜산의 새로운 자연에의 발견은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체취를 풍겨서 어떤 법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는 일제 말기로 시인으로 등단하자마자 암흑기였다.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는 가혹한 시대로 대부분이 창씨개명을 하고 변절하는 사람이 많았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세 분은 친일문학, 친일 작품이 없다. 광복 후 친일작가가 힘을 못 쓸 때 3인이 신풍으로 《청록집靑鹿集》 같은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 우리 시단의 대표작가로 활동하였다.
박두진 시인은 주로 산과 바다 등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산문적 율조에 담아 읊었고 기독교적인 이상과 윤리의식이 얼비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초기 시 <향현> <묘지송>부터 기독교의 성서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입증해 준다.
시집 《사도행전 1973》, 《에레미아의 노래 1981》,《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1982》, 신앙시집 《폭양에 무릎을 꿇고 1995》등에는 기독교적 의식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후기 작품에서도 현실적 좌절의식과 함께 기독교적 염원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신앙인으로서의 종교적 의식은 박두진 선생의 시 세계 전반에 걸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카프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초자연적인 세계, 이상적인 1930 년대 증류수(맥물)같은 시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시세계를 연 것이라는 생각이다.
좌익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 측과 맞선 우익에 앞장선 지도자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박목월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1946.4.4)에 참여하고 이어서 한국문학가협회(1949.12.9) 결성에 참여해서는 시분과위원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에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던 문인들 대부분 휴전 직후 대학교수로 봉직했는데 순수문학으로 사회비판 작품이 없었다. 자유당정권에 무비판적이었는데 혜산은 5.16 이후 자유와 민주화, 정의에 대한 강한 작품을 썼다.
6.25 전쟁 후 4.19 와 5.16을 거치며 시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자유와 민주와 같은 정치의식을 담아 발표한 작품은 초기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반공의식, 민족의식과 같이 열정적으로 노래한 《거미와 성좌》《인간밀림》은 정치적 사건과 함께 현실의식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기독교정신에 바탕한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작품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혜산은 4.19 의거 무렵 학원분규 때문에 연세대 교수직을 사직하고 우석대, 이화여대에 있다가 연세대에 복직되어 1981년 정년을 맞아 은퇴하였다. 그 후 문단에서는 멀어진 채 교육과 창작, 수석 수집과 서예에만 열중하다가 1998년 9월16일 83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혜산작품의 특징
● 수사적 특징
* 반복법, 영탄법, 설의법
<향현> <나무처럼> <너는 왜 노래하지 않니?>
* 돈호법, 청유법, 명령법
<청산도> <청산에> <산아> <샘이 솟아> <오도> <해의 품으로> <해> <너를 만나면>
<햇볕살 따실 때에>
● 문체적 특징
* 산문적 리듬으로 길고 가쁜 호흡의 산문율
● 어휘의 특징
* 관념어, 한자어, 기독교적 용어의 과다한 사용, 성경구절까지 인용한 특징
●작품 인용
* <향현> 자연예찬과 낙원의식
* <묘지송> 부활 의식
* <해> 구약적 기독교 의식
*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4.19의거를 노래한 현실의식
* <갈보리의 노래 1> 이상적 현실에의 좌절과 그에 따른 절규와 기원
<바다로 간다> <선언> <아, 조국> <빙벽무한>
4.19의거를 노래한 작품, 4.19 데모에 동조하는 작품에 대하여 시의 순수성 예술성으로 보면 좀 아쉬운 점이 있다. 기독교적 관념적인 시를 쓰신 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간 박두진시인은 우리시단의 큰 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규호 연사의 혜산과의 인연, 시인 박두진과 작품세계 이야기가 끝이 났다. 사회자 김년균 문협이사장의 사회로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어졌다.
― 초기는 순수예술작품 후기는 참여의식의 시, 기독교의식의 시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요.(김년균 사회자)
“문학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분들은 6.25와 4.19 이전 작품 <해> <묘지송>을 순수시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봅니다. 4.19 이후 동원된 언어 조사법을 보면 자유 민주 등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간접적으로 대단히 많이 기독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분은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시란 언어예술입니다. 형상화작업, 비유적인 상징적인 언어를 써서 많은 감동을 주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바람직하지 않고 안타깝습니다. 끝까지 초기 시 경향을 유지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신규호 연사)
― 지조가 있는 시인이라 하는데 혹시 알고 계신 에피소드가 있는지요? (윤고영 시인)
“연세대 교수로 계실 때 문제가 좀 있어 떠나셨다가 다시 연세대에 복직하셨습니다.
본부인과 이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연대에서도 4.19 이후에 그런 문제에 어려움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규호 연사)
“박두진 선생님을 연세대에서 5년간 조교로 모신 마지막 제자입니다. 1981년 전두환정부 시절 문화공보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선생님께 수여한다고 할 때 그걸 단번에 거절하고 받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 (조남철 교수)
― 혜산과 여름방학 때면 남한강에서 수석 수집을 하면서 2년 동안 함께 활동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대단히 깐깐하고 강직한분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비문을 써달라고 하는데 ‘전두환이 누구야!’ 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왜 돌을 수집하시느냐고 물으면 ‘모든 것은 죽으면 떠나버리는데 돌은 그대로 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혜산은 끝까지 자기신념대로 사신 분인데 혜산작품이 평가절하 되지 않았나요? (오양호 평론가)
“박두진 선생님은 수석 수집을 세계와 만나는 통로로 활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시단의 훌륭한 분으로 평생문단의 명예를 탐하지 않고 좋은 시를 쓰고 정직한 신념으로 사신 분입니다. 시와 삶이 일치한 분입니다. ” (조남철 교수)
“시인과 지조는 인간적으로 보면 지조를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가 작품위주로 평가합니다. 박두진 시인과 박목월 시인 두 분 다 기독교문학가인데 비교 해 보면 박두진 시인은 신선한 이미지이고 박목월 시인은 품성을 느낍니다. 박목월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있던 장로장립식에 갔었습니다. 그분이 남긴 유고집《크고 부드러운 손》은 신앙심으로 작품성을 살리려 애썼습니다. 박두진 선생님은 말년에 취미생활로 세월을 보내며 수석과 서예에 일가를 이룸으로써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규호 연사)
“박두진 시인의 글씨 한 점 갖고 있습니다. 이 어른께서 순수시 <해> <묘지송>등 을 열렬히 평가받던 시경향에서 돌아선 것은 선생의 어떤 신념이 있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 (김년균 사회자)
해마다 10 월이면 2004년 정부가 문화인물로 선정한 박두진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고향 안성 문예회관에서는 박두진 기념주간으로 선정하고, 문학제 기간 동안 혜산의 문학적 업적과 위상을 기리고 문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학술대회와 혜산 박두진 문학상 시상식과 전국백일장 시상식이 열린다.
필자는 고 정공채 시인 문하에서 시 창작을 공부하다가 스승님의 스승이신 혜산 박두진 문학제 심사위원으로 참가 중이라 하여 애정을 가지고 2007년 문학제에 참석하였었다. 문학제 운영위원장은 박두진 시인의 연세대 시절 제자였으며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남철 교수였다. 이분은 늦게 국문학을 공부한 나의 은사이기도 하다.
제1회 2006 년 혜산 박두진 문학상의 수상자는 신대철 시인)이었고, 제2회 2007 년 수상자는 천양희 시인이었다. 제3회 2008 년 수상자는 최문자 시인이었다.
제1회 때의 본심 심사위원은 김용직, 유경환, 유종호, 정공채, 조남철이었고, 신대철 시인이 「압록강」 외 9편의 시로 수상하였다.
제2회는 혜산 박두진 문학상의 수상자는 천양희 시인이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외 7편의 시로 수상하였고 상금은 1,000만원이었다. 제2회 본심 심사위원은 유종호 심사위원장 김용직, 유성호, 정공채, 조남철이었다.
제2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유종호 심사위원장의 심사 보고와 시상식에 이어서 수상 시인의 소감 발표로 이어졌다. 유족 대표 장남의 감사 인사도 있었다. 그 뒤 제7회 전국백일장 심사 이승하 교수의 보고와 시상식이 있은 다음 문학제 운영위원장 조남철 교수의 인사말과 시장의 축사가 있었다. 중앙대 음대 현악사중주단의 축하 연주와 박두진 시 가곡 발표가 있고 박두진 시 낭송회로 이어졌었다.
제3회 혜산문학상 수상자는 현재 협성대학 총장인 최문자 시인이 <그 해의 꽃구경> 외 8편으로 수상하였다고 한다.
아직 혜산 박두진 문학관은 아직 건립되지 못하고 안성문예회관 3층에 혜산자료실이 마련되어 유품과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운영위원회는 문학제가 몇 년 내로 문학관을 만들기로 하고 안성시와 협의중이라고 한다. 1회, 2회 문학상 심사위원 이었던 혜산의 제자 유경환, 정공채 두 분도 고인이 되었다.
필자는 생전의 혜산 선생님을 뵌 적이 없지만 두 분 은사 고 정공채 시인과 조남철 교수의 혜산에 대한 숭모정신을 보고 각별한 애정을 느꼈었다. 2007년 제7회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 문학제(文學祭)에 참가하고 당시 느낀 소회를 여기에 옮겨본다.
제7회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 문학제(文學祭) 참가하고
문화관광부가 2004년 문화인물로 선정한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 제7회 문학제(文學祭)가 제2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0월 20일 오후 3시에 안성문예회관에서 열렸다. 혜산문학제는 2007. 10. 13(토) ~10. 20(토) 8일간 혜산 박두진 기념 주간이었다.
문예회관에 들어서자마자 혜산 박두진 기념사진과 시화가 전시된 것을 보았다. 문인, 제자들과의 모습과 수석, 서예를 하는 부인과의 모습 등 사진 35점, 시화 20점 등이었다.
혜산문학제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성지부 주최, 혜산 박두진 문학제 및 문학상 운영위원회와 (사)한국문인협회 안성지부에서 주관했다.
서경대학교 국어국문과 조정래 교수의 사회로 맨 먼저 심사위원장 유종호 예술원회원의 심사경과보고를 들었다. 제2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은 동아일보사와 월간 현대시학에서 후원하였는데 상금 일천만원과 상패를 받고 천양희 시인이 소감을 말했다.
혜산문학제 운영위원장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조남철 교수는 이념과 가치의 혼돈, 위선과 거짓이 도처에 넘쳐나는 역사의 자리에서, 항상 정의와 원칙의 편에서 단아하게 그러나 산처럼 우뚝 서 시와 생활이 하나로 시 정신을 실천한 우리시대의 정신적 스승인 시인이라고 소개하였다.
2007. 7. 15~9. 15까지 두 달간 공모한 제7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에서 뽑힌 전국의 문재(文才)들의 시상식이 초 중 고 대학 일반부에게 각각 장원, 차상, 차하, 참방으로 시상식이 있었다.
혜산의 시「하늘」은 시낭송가의 낭송으로,「마법의 새」는 모춘자 시인의 낭송으로, 「꽃구름속에」는 권미희 소프라노,「도봉」은 정민호 테너로,「청산에 살리라」는 권미희, 정민호 듀엣 등 음악으로 혜산의 시 세계를 감상하였다.
2006년 제1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 국민대 교수 신대철 시인과 2007년 제2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 천양희 시인을 나란히 세워 사진을 찍고 혜산 문학상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했다.
행사가 끝난 후 지난해에는 참석자 전원이 저녁식사와 안성 쌀 1Kg 을 대접받았는데 올해에는 대통령선거 60일을 앞두고 선거법 저촉 시행 첫날이라고 모두 배고픔을 참고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전에 한국시인협회(회장 오세영)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과 교수 10명에게 작고 시인을 대상으로 「한국 현대시 100년 10대 시인」 및 대표작 선정을 의뢰한 결과, 김소월 <진달래꽃>, 한용운 <님의 침묵>, 서정주 <동천>, 정지용 <유리창>,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수영 <풀>,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이상 <오감도>, 윤동주 <또 다른 고향>, 박목월 <나그네>가 뽑혔다고 보도되었다.
내가 아는 혜산 박두진 시인이 「한국 현대시 100년 10대 시인」에 뽑히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각처에 여러 훌륭한 문인들의 문학관과 시비가 세워져 문학제를 열고 추모행사를 하는 곳이 많아 관광지 코스로 문화상품화 되기도 한다. 여타 문학제에 비추어 혜산 문학제가 안성시 문예회관을 빌려서 가장 열악한 모습으로 열리고 있는 것은 고고한 혜산 선생님의 시 정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못내 안타깝다.
안성시 시립도서관 앞에는 혜산의 시비가 있었다.
신규호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단국대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1966. 박목월 추천, 1972. 박두진, 서정주, 박목월 3인 추천 《현대문학》지로 등단
*동국대 예술대학원, 한양대 강사를 거쳐 성결대 국문학과 교수
*성결대 부총장 역임.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
*저서:《한국현대시연구》《이상문학연구》《한국현대시와 종교》《한국기독교시가연구》
*편저:《한국인의 성시》《샤론의 《들꽃》
*시집:《입추이후》《어둠의 눈》《사랑아 사람아》《맨발의 사람》《보라빛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