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崔漢綺의 <허무성실학虛無誠實學>
최한기崔漢綺(1803, 순조 3∼1877, 고종 16)는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실학자이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17세기 이후 조금씩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조류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큰 파고를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19세기 서세동점을 인식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인물로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박규수 등이 있는데, 최한기는 기학氣學이라는 학문체계를 통해 동서양의 학적 만남을 꾀했고 이를 통해 조선이 처해있는 난국을 헤쳐 나갈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본관은 삭령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기화당氣和堂 등을 사용했다.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한 집안이었다.
부친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그러나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이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 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최한기 집안의 경제력은 막연하게 부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으로 부인 반남 박씨, 장남 최병대, 차남 최병천과 며느리 손자가 있고(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집안 노비로 여자종 11명과 남자종 13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아주 안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었다. 최한기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하였다. 이들은 분명 19세기 조선사회의 선각자들이었다.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 앞날을 전망한 새로운 지식인들이었으나, 당대에는 그들을 받아들일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최한기는 기학이라는 학문을 제창했다.
최한기는 과거 유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던 유교경전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중요시했다. 다산 정약용이 탈성리학을 외쳤다면, 혜강 최한기는 탈경전을 외친 것이다.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맹자가 인간의 본유적本有的인 것이라고 규정한 인의예지仁義禮智조차 경험으로 얻게 되는 습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앎이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 경험을 통하여 배워 얻어지는 것이다.
천지의 만물은 모두 같은 기氣를 받아 서로 다른 질에 따라 서로 다른 신기神氣를 갖게 된다. 사람마다 신기가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이해할 수가 있다. 또, 이런 신기의 만남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이때 한 사람의 신기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통해주는 것이 그의 감각기관이다. 즉, 인간은 눈·코·입·귀 등의 감각을 통해 경험을 쌓음으로써 그의 신기를 더욱 밝혀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한가지보다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감각경험을 통하여 확인된 지식일수록 그 확실성이 높아진다. 이들 감각의 감각경험을 그는 이통耳通·목통目通·구통口通·수통手通 등으로 부르고, 보강된 경험을 주통周通이라 불렀다. 인간은 경험과 그것이 쌓여진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확장하여 갈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추측이다. 그의 추측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기를 바탕으로 이를 추측하는 것推氣測理, 정의 나타남을 미루어 성을 알아내는 것推情測性, 움직임을 보고 그 정지 상태를 알아내는 것推動測靜, 자기 자신을 미루어 남을 알아보는 것推己測人, 물을 바탕으로 일을 짐작하여 아는 것推物測事 등이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추측록推測錄≫·≪신기통神氣通≫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물산·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이미 나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가 1866년에 지은 ≪신기천험身機踐驗≫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신기천험≫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중국명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편수하여 만든 것이다.
自古流傳之學자고류전지학: 예로부터 전해오는 학문에는
有虛無誠實유허무성실: 허무한 것과 성실한 것이 있다.
願學虛無者원학허무자: 허무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不知其虛無之無實效有妄誕불지기허무지무실효유망탄: 그 허무가 아무 실효는 없이 망령되고 허탄한 것임을 모르고
反以爲無上大道반이위무상대도: 오히려 그것을 무상대도無上大道로 여기니
將焉用哉장언용재: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人生於世인생어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自有所當行之人道자유소당행지인도: 자연 마땅히 행해야 할 인도가 있으니
自修齊至治平자수제지치평: 수신·제가로부터 치국·평천하에 이르기까지
承順運化승순운화: 운화에 승순하는 것이
爲誠實之學위성실지학: 성실한 학문으로
得之於身득지어신: 이것을 몸에 얻으면
而身有榮焉이신유영언: 몸이 영예로워지고
敎之於人교지어인: 남을 가르치면
而人有惠焉이인유혜언: 남에게 혜택이 있게 된다.
不學此無以爲人불학차무이위인: 이것을 배우지 않고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學此自有無窮之用학차자유무궁지용: 이것을 배우면 스스로 무궁한 용도가 있다.
天下之人천하지인: 천하 사람이
盡學誠實진학성실: 모두 성실을 배우면
可致泰平가치태평: 태평泰平을 이룰 수 있으니
而猶恐一人之不學이유공일인지불학: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배우지 않을까 염려해야 한다.
天下人盡學虛無천하인진학허무: 만약 천하 사람이 모두 허무를 배운다면
人無以生活인무이생활: 사람이 살아갈 도리가 없게 될 것이므로
勢不得已세불득이: 부득이
去虛無而趍誠實耳거허무이추성실이: 허무를 버리고 성실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誠實之中성실지중: 성실한 학문 가운데도
未盡其宜者미진기의자: 그 본령本領을 얻지 못한 경우는
或有淺陋固滯之學혹유천루고체지학: 혹시 저속하거나 융통성 없는 학문이 되기도 하니
是當磨琢遷改시당마탁천개: 이런 경우는 마땅히 탁마琢磨하여 고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虛無之中허무지중: 허무한 학문 가운데도
或有得其實者혹유득기실자: 혹 실다움을 얻을 경우는
學雖虛無학수허무: 그 학문은 비록 허무하더라도
行有實事행유실사: 행동에는 실다운 점이 있기도 하니
於此可見誠實之不可廢也어차가견성실지불가폐야: 여기에서 성실한 학문은 폐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