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년.
당나라 황실에 급보가 날아든다.
당대 최강의 십만 대군이 제음으로 이동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 이었다.
당 조정은 경악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집결지는 제음벌판,
갑작스런 병력 이동 이었다.
제음벌판, 낙약까지 단 며칠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수장은 고구려 유민 이정기 였다.
고구려 패망 64년만에 등장한 이정기
그것은 또다른 고구려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정기를 아는 게이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중국내 광대한 지역을 총괄했던 고구려 유민"
이라고밖에 기록이 안되어있고
역사공부때 언급도 안됨.
반면에 중국역사서
자체통감,책부원기,문원통고,신당서,구당서
에는 모두 이정기의 기록이 모두 적혀있다
특히 구당서에는 이정기를 열전으로 분류해서
(열전: 여러 사람의 전기(傳記)를 차례로 벌여서 기록한 책. )
아주 자세하게 기록.
첫 시작 문구가 "이정기는 고구려인이다."로 시작함.
당시 중국에서는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있었다.
왜 무서운 인물이었냐 하면.
이정기가 관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황제의 명령을 안따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상관이 "이거해","저거해"명령하거나
부하가"이거 해도 되요?""저거 해도 되요?"
이렇게 흘러가는게 아니고
이정기는 윗대갈이 뭘 시켜도
"ㄴㄴ 안함" 혹은 "나 이거 하고있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런 패턴..
당시에도 황제의 명령을 어기면서
자신의 권역을 확대하기 때문이었다..
이정기의 이런 행동에 당은 무력했는데.
그 이유는 이정기의 새력이 강해서 건들수 없는 이유..
그래서 당은 이정기에게 당나라 최고 벼슬을 주면서 달랬다
이밖에도 이정기가 받은 관직은 화려하게 많음..
그가 엇나가면 엇나갈수록 당 조정은 계속 달래오면서
수많은 관직을 줌
그러나 이정기는 이미 당나라 신하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태생부터가 고구려출신이고
그를 따르는 많은 새력들도 고구려 출신이라
그 정체성과 관련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고있던것
이정기가 관리하던 본거지는 청주.
그가 관리했던 청주는 당시 가장 강성했던 주였고
그곳의 수장이 반항아 이정기였으니
당나라도 골치 꽤나 아팠을껄로 예상됨.
명목상 당의 신하였던 이정기는
사실상 그때부터 당과 독립된 국가를 건설했던거나 다름 없었다..
당시 기록에 보면...
15개 주를 다스렸다고 나와있다
또한, 그렇게 넓은 곳을 다스리면서도
당 조정에게는 충성을 안함;;
조정에 세금도 안내고
지 꼴리는대로 관리를 정하고
지역법까지 따로만듬.
이정기는 당나라 황제를 포함해
당나라 모든 권력자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당시 당나라 위박지역의 절도사 "전승사"라는 인물은
한때 이정기에게 대항했다가
이정기군의 파죽지세에 당황해서
항복한 기록도 있음;;;
신하로 복속함ㅋ
이후 초상화를 걸고 향을 피움..
이건 황제를 대할때 하는 행동이었다
이밖에도 반란진압 등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이정기는 이름을 떨치게 됨.
16년간 이정기의 병력은 3만에서 10만으로 늘어나고
그 10만 군사는 당대 최강이었다
누가 고구려 출신 아니랄까봐
그 군대를 통해 불과 10년만에
포풍 영토확장;;
10년전 이정기의 세력도
10년후.
더구나.
남부의 모든 식량과 물산을 모두 집결하던 용교라는 지역을(지금 이름은 숙주)
먹게되면서 당 황실의 숨통을 조이게 됨
이로인해 낙양과 장안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여기서 의문점.
고구려 출신 이정기는 어떻게 이런 막강한 힘을 키울수 있었을까?
또한 명목상이긴 해도 당나라신하가 국가에 대항한 이유는 무었일까?
이유 1. 당나라의 변방 방어 정책
당시 당나라 주변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로부터 방어하기위해
경계지역을 절도사들에게 맏겨
이정기도 지역 절도사중 한사람이었음
(절도사:지금의 도지사)
그중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형성된 절도사 새력을 "번진"이라 불렀음
여기까지가 이정기가 세력을 키운 이야기
(써놓고 보니 이유라기보단 세력을 키운 과정이라 할수 있겠다..)
본질적으로 이정기가 당에 적계심을 품게된 이유는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핍박때문이야 (이유2)
당시 영주라는 지역에 고구려 유민들이 끌려가서 살았는데
이정기도 그곳 출신이었어
패망한 국가의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한 당나라는 20만 고구려 유민을 당으로 끌고왔는데.
이때 반드시 거처가는 지역이 영주.
지금의 "조양"시
당시 고구려 유민 대부분은
끌려가서 당나라 사람들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구려 출신이 신분상승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인이 되는 것이였는데
"노예의 삶을 사느니 신분상승을 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군인이 되었다고 함.
그리고 당에서도 고구려 유민들의 군사능력이 탁월했던걸
알고 있었기때문에 여러가지로 활용가치가 많아서
두손들고 환영하게됨..
또 당의 기본적인 정책이 대국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다문화 국가)
한족 중시의 사회가 아닌
"능력있는 인물은 이민족 출신이라도 뽑는다" 는 주의
이정기도 이때 군인이 됨
그리고 황제의 편에서
많은 반란을 진압하면서
점차점차 신분을 상승시킴
그렇게 커가면서 세력을 키우게 되고
그 세력으로 고구려 유민들이 결집하면서
강해지게 됨
(당시 이정기 군대의 고구려 유민 출신은 3분의 1, 수뇌부는 대부분 고구려인)
이정기는 군인으로써 초고속 승진을 하게된다.
27살에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30살에는 치청번진 병마사가 됨
(오늘날 군단장 바로 아래급)
이정기는 또한 인격이 훌륭해서
수하들이 잘 따랐고
그때문에 당시 절도사(오늘날 군단장)가
두려움과 시기를 했다고 함
이후, 이정기를 질투한 절도사는
이정기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직위를 해제시키고 옥에 가두게됨..
옥에서 죽을날만 기다리던 이정기는
765년 무렵,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안타깝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됨ㅠㅠㅠ
뜻밖에도.
따르던 부하들이 이정기를 구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킴 ㅎㄷㄷㄷ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았음ㅋ
이 사건을 통해.
이정기는 구사일생 하게되고
765년 7월 절도사 자리에 오르게 됨.
(이전 절도사는 도망감)
당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측근몇몇이서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는 일은 종종 있었는데
이정기 처럼 많은 부대가
상관을 구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경우는
"절도사"케이스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음
당시 절도사 라는 직위는 당 조정에서 내려주는건데
이정기는 쿠데타를 통해 오르게 되면서
이때부터 사실상 당과 틀어지게 됨
여기까지가 이정기가 당과 틀어지게된 이유임.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실 이민족 출신이 이름을 떨친 경우는 많았다고 하는데
(고선지,장보고)
이들은 대부분이 변방에서 활약한 경우였고
이정기는 당의 중심부에서 활약하면서
더구나 조정에 맞서는 인물이라 위험도가 컸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나라는 이런 이정기에게 계속 직위를 주는데
그러면서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직위도 얻게되고
발해와 무역독점을 하게되면서
발해의 명마를 수입
한해에 1만마리 가량을 수입하면서
군대의 기동성을 높히는데 쓰기도 하고
때로는 매매를 하면서 여러모로 돈도벌고 군사력도 증강시켰다고 함.
당시 당나라는 이정기의 군대를
이렇게 기록
유격군,기습이나 교란등 빠른 기동성을 가진 게릴라군대를 뜻하는 말
자신이 관리하는 번진을
다스리는것에도 훌륭했고..
이렇게 이정기는 당에 맞설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무역 거점이나 생산요충지 절반이 장악당한 상태라
체스로 따지면 '체크메이트'직전 상황이고
장기로 따지면 '장군'이 된 상황이라 '멍군'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는게 다 였다..
그러다 이정기는 777년.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로 옮김
단순히 거점이동이 아닌.
그의 일생일대 목표를 실행에 옮기게됨.
당대 최강의 10만 대군을 키워냈고
위에서 말했듯이
수도로 이어지는 운하를 차단(용교라는 지역)해서
당의 생명줄을 조여놓은 상태.
781년. 칼을 빼어든 이정기의 십만대군이 당 황실의 군사력이 미치는 마지막 경계선인
제음벌판으로 집결
당 황실은 변방을 지키던 군사 9만2천을 황급히 빼돌려 제음벌판 근처에 전진배치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려
당시 구당서에는 제음벌판에 집결한 10만대군을 이렇게 기록해 놨다
그러나,
당과 전면전을 준비하던 이정기의 군대는
전투를 앞두고 뜻밖에 일을 당하게 됨.
이정기가 갑자기 죽어버림...
안타깝게도 이정기가 죽으면서
흐름은 급변하고,
세력들도 뿔뿔히 흩어짐;;
다져놓은 기반도 모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됨 ㅠㅠㅠ
(후계자가 없었던듯)
결국 전투는 없었지만
782년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제나라"라는 독립국를 건국
그리고 다시 당을 압박해 나감.
그렇게 40년간 당과 접전을 벌여왔던
제나라는 안타깝게도
819년 건국 55년만에
내부 반란 (이때 4대 왕이었던 이사고가 피살당함)
에 의해 멸망함 ㅠ
제나라 멸망 후
당의 보복은 잔인하고 처참했다.
피가 강을 이루고
피안개가 피어날정도로 대량학살 ㅠㅠ
제나라 백성들을 죽인 명목은 이러했다
그렇게 제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짐.ㅠㅠ
한줄요약
고구려 출신 이정기가 당나라에 대항함.
자료조사: 한국사 傳,네이버
p,.s
사실상 제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는 아님.
구성 인구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이고
당과 적대하고 발해와 피를나눈 형제국이라 칭하며
친하게 지낸건 사실이지만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언급한 기록이 없다..
그냥 고구려 정신을 계승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choice6/20172100739 제나라 이정기|작성자 입
첫댓글 오 신기한 내용이네요.
당나라는 고구려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죠.발해 역시 고구려에서 파생된 나라이죠.게다가 또 엄청난 나까지 일으났으니 이정기가 병만 안걸렸어도 당나라는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