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7일 수요일
중앙지 ㅈ신문 칼럼 배설(裵楔) 장군을 읽다가 위서 [차원부설원기]를 생각하였습니다.
문화류씨 1000년 시조 대승공 류차달은 차달로 바꿔치기를 당했는데
“2001년 소설가 김훈이 쓴 이순신을 그려낸 밀리언셀러 ‘칼의 노래’ 112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삼년 만에 오일장이 섰는데 달걀 한 개에 감자 세 알씩 바꿔갔다.’ 눈 밝은 독자가 시비를 따졌다. “감자는 1824년 순조 때 조선에 들어왔다. 임란은 16세기 말 아닌가?” 김훈은 아차 싶어 다음 쇄(刷)에 고치려다 멈칫 했다 ‘지적이 맞겠지---그런데 감자가 아니면 글맛이 살지 않으니 어쩐다?’ 올여름 최신판까지 나온 소설속 감자는 그대로다. ➤2005년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도 왜곡 논란에 휘말렸다. 이순신*원균 관계, 선조 임금 성격을 놓고 시비가 많았다. 사료에도 없는 거북선 침몰장면은 비판이 거셌다. 임란사는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이 끊이지를 않는다. 픽션으로 꾸미면 논란 위험은 더 커진다. 그 무렵 소설가 고정욱이 장편 ‘원균’을 냈다. 이순신의 실책을 파헤치고 원균을 맹장으로 치켜세웠다. 작가는 ‘왜곡된 사관과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사상 최다 관객이 몰린 영화 ‘명랑’을 상대로 배설장군 후손이 고소장을 냈다. 역사 속 배설은 명랑해전이 벌어지기 보름 전 병을 고치겠다며 뭍에 내려가 종적을 감춘다. 나중에 영남에서 권률 장군에게 붙잡혀 참수됐다. 그러나 후손들은 영화속 배설이 이순신을 죽이려 하고 거북선에 불을 지르는 악인으로 묘사된 부분을 허위라고 했다. 사자의 명예를 해치고 후손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감독*소설가*각본가 셋에게 책임을 따졌다. ➤‘명랑’ 제작사는 배설장군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야 할 판이다. “창작물은 그냥 창작물로 봐달라” 고 해도 막상 후손들은 그냥 봐줄 수 없는 모양이다. 역사 드라마 영화속 인물의 후손이 고소장을 내는 일은 드물지 않다. 수 백 년 전 살던 인물이라도 직계 자손이라면 고소 할 수 있다. 다만 대법원은 ‘실존 인물에 의한 역사적 사실보다 가상 인물에 의한 허구가 많은 게 드라마라는’ 판례를 남겼다. ➤김훈은 소설 머리말에 ‘나는 절박한 오류들과 싸워 혼자서 살 것’ 이라고 혼자 썻다. 다른 맥락에서 한 얘기지만 마치 ‘감자오류’를 내다 본 듯하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오류가 불가피한 걸까? 반대로 후손은 1700만 명이 본 영화이기에 더욱 ‘허구의 사실’이 자칫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는 걸 놔둘 수 없는 노릇이다. 고소장을 받아든 경찰과 법원도 그 언저리에서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온통 위작과 창작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문화류씨 1000년 시조 대승공 류차달을 삭제하고 차효전으로 바꿔치기를 했습니다. 이는 한국사를, 한국의 족보사를, 부정하고 언론 표현의 자유를 넘어 패륜의 극단적 행태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화류씨가 연안차씨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입니다. ➪ [차원부설원기]라는 소설?속 문화류씨의 정체성을 복원 하는 데 위의 칼럼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 대승공 류차달을 찬탈하는
1. 1,000년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을 찬탈하는 소위 [연안차씨약사]를 살펴봅니다.
38 世 휘(諱) 달(達) : 의 족보기사
묵방사기(墨坊寺記)에 말하기를 공(公)은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조(新羅朝)의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김균(金稛>)의 딸이며 생이남(生二男)과 생일녀(生一女)를 하였으니 윤신달(尹莘達)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公)의 5대조 맡아들 효전(孝全), 둘째 아들 효금(孝金)이며 딸은 고려조(高麗調)의 벼슬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 이신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신라 39대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809년)에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모의(謀議)가 누설(漏泄)되어 실패(失敗)하고 둔적(遁迹)하여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들어 가 조모(祖母)의 성(姓)을 딸아 모성양씨(冒姓楊氏)라 하며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6세를 전(傳)하여 공(公)에 까지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때 공(公)은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며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조(朝鮮朝)의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車雲巖先生雪寃記』의記錄에〔車達丁麗室輸勤之日孝全之於當王事靡盬之時輿興原賑陵定社之勞國以爲辦出車乘繼粮道運米征南特贈其父以車爲達世績之號〕라 하였다 이 문장(文章)의 뜻은『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에 날로 헌납(獻納) 도하여 도웁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이 어려움을 당(當)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爲)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곡식의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 차씨(車氏)로서 세대(世代)를 이어라 달(達)로 이름을 하였다.』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께서는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시고 통합삼한(統合三韓)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封)하시고 특명(特命)의 말씀이『念昔車氏之弘烈旣不可忘也這間柳之冒稱又不可廢也』라. 이 문장(文章)의 뜻은〔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근간(近間 =저간(這間))에 류씨(柳氏)로 모칭(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 고하시며 모성류씨(冒姓柳氏=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姓)하게된것이다.
① ➤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車雲巖先生雪寃記』의記錄에” - [연안차씨약사] 본문의 기록입니다.
② ➤ “景泰 7년 세조 2년 1456 5월17일에 嘉靖大夫 行刑曹參判 신 박팽년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기록한다” --- 국역 [차원부설원기] 의 기록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차원부설원기] 저작자도 헷갈리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6대 단종대왕 어명을 받아, 세조의 하교를 받들어 어느 왕의 명을 받들어서 [차원부설원기]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2. 문화류씨-뿌리 깊은 버드나무 카페
① 설원기 독후록 96 류차달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그 망발의 탐색 2012.12.3
② 설원기 독후록 136 류차달 신분사가 차달 신분사로 복사되었나? 2013.7.15
③ 설원기 독후록 204 류릉 2014. 5.16
등의 기사가 참고 될 것입니다.
위 족보 저자는 세조 임금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는 역사적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합니다. 대승공 류차달을 없애고, 그 자리에 차달을 앉히고, 류차달의 아들 류효금을 삭제하고, 차효전으로 바꿔치기를 하였으니 말입니다. 문화류씨대종회 차원에서 연안차씨중앙종친회에 대응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