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하나님이 사랑을 경험 할때 이 사랑에 기초해서 행동하게 된다. 허용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내 생각과 감정으로 판단하고 구별하고 제한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느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내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판단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수동적이고 열정이 없어 보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실상은 그와 반대로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다.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를 누리고 그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됨은 모든 형상을 분리시키고 비교하여 우월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어떤일을 할때 목적달성에만 초점을 두면 누가 무엇을
했느냐로 판단하게 되고 우리-서로-함께는 사라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사라지게 되고 경쟁. 비교, 투쟁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하나됨을 추구하면
각각의 은사들이 풀어짐으로써 우리의 능력이 상의 탁월함. 즉 집단 천재성이 풀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보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분리비교, 이원성에 기초한 판단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허용함에
기초하여 분별하고 있는지 또 어떤일에 관계함에 있어서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고자
하는지 아니면 하나됨으로 온저함을 더 드러내고 자 하는지
거짓자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즐거움과 풍성함이란 없다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다.
육체가 소망하는 그것은 일시저이고 상대적이다. 그 방식의 삶은 또 다른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는 목마름을 줄뿐이다. (흔히들 2%부족하다..라는 말을 쓰곤 한다. 그것은 목마름에 대한
갈망이다. 어떤 성경모임에서 매번 갈증이 난다. 이유는 그날 성경나눔을 그날 다 해야 한다는
목적때문일것이다. 오히려 그 분량을 다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인정하며 누릴 수 있는데
매번 목적달성때문에 풍성함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진정한 즐거움과 풍성함은 우리가 행하는 일로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 지속적인
즐거움과 풍성함을 찾기에 끝없는 고통과 좌절 그리고 계속되는 결핍과 부족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가장 즐겁고 풍성함을 느끼는 때는 이 보이는 물질 세계에 우리의 몸을 통하여 나타나는
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하는
일 자체가 즐거워하고 만족감을 누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주를 나타냄으로 즐거움과 풍성함을 누릴때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누구인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있다해도 지금 여기에 삶에 머물러야 한다. 이 때 우리의 비전이나
목적이 거짓자아의 나타냄, 욕구, 소유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기때문에 즐겁고 기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자아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이미 즐거움과 기쁨은 하나님의 생며의 온전함으로 주어진 것이다. 즐거워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나님의 생명때문이다. (할렐루야!)
우리의 형혼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낼때 체험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하여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나타내고자 하는 갈망은 실제 행동에 있어서 열정과 지혜로 나타날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 것이다.
열정과 지혜는 함께해야 한다. 이것은 자동차의 운전대와 엔진과 같다. 갈망의식에 기초한
열정과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인받은 통치권의 현현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외부적 소명을
알게 되고 그 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목적을 세워 그 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에너지를 공급
받고 주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정과 지혜로 주어진
일을 행하는 것이다.
지혜는 사람, 사물, 사건,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결국 어떤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기존에 그러하지 않았나)
먼저 하나님안에 거해야 하며 성령과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인도함을 받는것은 과거의 거짓자아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를
포기하고 스트레스(긴장, 분노, 불안등)을 받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은 진정한 열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실 이것이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된다. 지금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기 보다는 목표에
도달하기만을 원할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존재와 행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는 갈망보다는 거짓자아의 욕망이 더 큰것이다.
열정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쓰임받고자 하는 갈망에서(하나님의 본질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식,
)나온것이고 욕망은 거짓자아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거짓자아의 심리적 강박에서 나온 것이다.
(열정이 자신에게로 부터 나온사람들은 봉사를 하다가 픽픽 쓰러진다..하기 싫어진다.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열정과 지혜가 있을 때는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행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이에 반해 거짓자아로부터 나오는 욕망은 다른 삶을 이용하거나 조종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빼앗으려 한다. 열정과 지혜는 적을 친구로 만든다. 우리의 삶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성공은 이러한 삼을 살아가는 자로부터
나온다. 당장은 아니지만 꾸준히 주어진 일에 대해 이렇게 살아온 사람은 그들의 일에 놀라운 창조성과
탁월함이 나타나게 된다 ( 이 말은 성령님이 내게 주는 말같아서 감사합으로 아멘 한다.)
지금까지 해온 행동양식을 묵상해 보면 내 결핍과 부족을 채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지금 하는 일에 열정이 넘치나
또 지금 하는 일에 당신 능력의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지혜와 탁월함이 나타나는가?
아니면 당신이 최선을 다하는가?
거짓자아가 만든 가짜 열정인 욕망을 통해서 일하면 일할수록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목적)을 이루어가는 일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열정을
가질 수록 힘이 생기고 영감을 통해 주의 지혜로 행하게 된다.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고 매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존재적-내부적 변화의 결과로
행동적-외부적 변화가 뒤따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행동양식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 경험에 기초한 열심과 노력이 아니라 자신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로
주어지는 생명에너지에 의해서 열정적이 되며 탁월한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매일 삶의 요소(일,만남, 시간 , 재정, 건강)와 생활요소(가정, 직장, 교회, 문하)와 관계하면서
내적으로는 도덕성, 탁월성, 신뢰성을 훈련하게 되고 외적으로는 새로운 행동양식으로 이 세상에
개혁, 통합,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삶이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우리는 매일 이 세가지 행동양식( 첫째, 모든것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허용하여 하나되고자 한다. 둘째, 어떤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즐거움과 풍성함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즐거움과 풍성함을 나타내고자 한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해서 앞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행동해야지라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짓자아의 결단으로 변화시킬수 없다. 행동양식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 의식으로 들어가 우리의 심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심어야 한다. 거짓자아의 결단은 결단-헌신-우울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나라의 습관이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좋은 방법은 매일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평가 개선하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보는
것과 같다.
서평: 가장 중요한것으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살아야 하며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행동양식을
새롭게 해야한다. 그런데 신앙이 거짓자아에 머문 신앙이 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결단하며 또 헌신하고 낙심했던 적도 있었다. 귀중한 통찰을 얻는 독서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