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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무지개! 황순덕 입니다
 
 
 
카페 게시글
의정활동 스크랩 전동면의 역사, 지명, 유래
복숭아 추천 0 조회 164 10.01.27 06: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동면(全東面)

  조선시대에 연기(燕岐)와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을 때 그 영역이었고 또한 태종 16년(1416년)에는 다시 전의현에 속했다. 대대로 선비들이 묻혀 사는 지역이었으며, 조선 말 고종32년(1895년) 전의군(全義郡)의 동쪽 지역에 속했다가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의 동쪽에 위치(位置)한다 해서 전동(全東)이라 하여 연기군에 편입되었다.


청송리(靑松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地域)인데, 이 곳에 예전부터 세 그루의 노송(老松)이 이곳 사람들의 신앙(信仰) 대상(對像)으로 모셨으므로 청송(靑松)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쇠성

전동면과 서면(西面) 경계에 있는 산이다.  곧 까치성 위에 있는 산성인데 높이가 383m이며 돌로 쌓은 성(城)이 견고하여 철옹성과 같다 한다. 단단한 산성(山城)이라 하여 쇠성이라 부른다.


배일

운주산 남쪽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학자 권주(權柱)가 임진왜란 때 의병 300명, 군량(軍糧) 450입(?)으로 금산(錦山) 싸움에 이르렀다가 별세(別世)하였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일본(日本)을 배척하는 의미(意味)에서 배일(排日)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 한다.

뒷산이 높고 골이 아늑하므로 배일을 이곡(梨谷)이라 하였는데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이 살면서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고쳤다. 이곡(梨谷) 즉, 배나무가 많은 골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권복은 일본을 배이(梨)로 비유하여 일본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이일(梨逸)이라 하였다.


이일동천비(梨逸洞天碑)

아랫배일 입구에 있는 비(碑)를 이일동천비(梨逸洞天碑)라 부른다.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의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하고 마을 앞에 비(碑)를 세웠다.


삼송정(三松亭)

배일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엔 소나무 정자가 세 그루 있다 해서 삼송정(三松亭)이라 부른다.


대재

아랫배일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쪽에 큰 고개가 있다 해서 큰 재라는 뜻에서 대재, 대티 라고 부르며 또한 대자라고도 부른다.


도청(都靑)

삼송정 남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거창(居昌)신씨가 살면서 서로 의좋게 모이는 도회청을 두었으므로 도청(都廳)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쉬운 글자를 취하여 도청(都靑)으로 변했다.


강당터

아랫배일 청룡 쪽에 있는 강당 터를 지칭한다.


벼루모통이

도청이 동쪽에 있는 모통이로서 산이 벼랑으로 되어 있다.


벼루잿들

도청이 앞에 있는 들로서 벼루모퉁이가 있다.


숯골

도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숯가마가 있었다.


안배일(내이일  內梨逸)

배일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배일(외이일  外梨逸)

배일 아래, 곧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청당(靑堂)골

안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점골

깊은골 좌측에 있는 고랑이다. 그릇을 구었던 곳이라 하여 점골이라 한다.

이곳에서 토기가 나온다.


도둑골

골이 깊어서 이곳에 도둑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도둑골 이라고 한다.


뒴박골

뒴박 처럼 둥그렇게 생겼다 하여 뒴박골 이라 한다.


순넘어

이곳은 숨가쁘게 넘어간다 하여 순넘어 라고 한다.


부처지골

부처가 있었던 곳으로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부처지골 이라 하며 이곳에 옛 절터가 있다.


화털구덩이

은골, 승지골 순으로 골이 있다.


모종

서당처럼 글을 배우는 곳으로 도청에 있었다 하며 1950년(50년 전)쯤 없어졌다.


섭장골

자연부락중의 하나이다.


새뜸

새가 떨어져 있다하여 새뜸이라 부른다.


보도막

서당골과 안말 사이에 있다.


박산

너덕골 옆에 있는 산으로 박씨네 산이라 하여 박산이라 불렀고 지금도 박씨네 산이라고 한다


공산

박산 옆의 산을 공산이라 하는데 공동산 이라 하여 공산이라고 부른다.


산제당

박산 옆에 있는 산으로 산제를 지내는 산이라 하여 산제당 이라 하였다.


너덕골

보도막과 안말 사이의 골로 예전에는 덕대골 이었는데 발음상 너덕골로 변하여 불린다.


안골

서당골 뒤쪽의 골이다.


고장골

운주산에서 제일 깊은 고랑이다.


망난골

회관 뒤쪽에 있는 고랑으로 옛날에 낭군과 이별을 하고서 여자가 이곳에서 매일 산에 올라가서 기다렸다 하여 망날골 이라고 한다.


개미고개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대내미고개

십리고개라고도 하며 운주산 너머 목천으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남문턱

공산 위의 운주산성의 남문이다.


속개울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로 가운데로 내려갔다 하여 속개울 이라고 불린다.


벼락바위

너덕골로 올라가면 바위가 있는데 벼락을 맞아서 반이 갈라져 있다하여 벼락바위라고 한다.


황새바위

이 바위에 황새가 많이 앉아있다 하여 황새바위라 부른다고 하며, 송정 이라는 고개에 있다.


병막바위

운주산에 있는 바위로 바위 3개가 있어 삼형제 바위라고도 부르며 옛날에 군인이 이곳에 막을 짓고 보초 서던 바위라 하여 병막바위 라고 한다.


송정이고개

섭장골에서 자루맥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둥구나무

서당골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1980년도쯤 고사했다.


청람리(靑藍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남면(南面)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동막리, 상남포리,하남포리, 청산리를 병합하여 청산과 남포의 이름을 따서 청람리(靑藍里)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청산(靑山)

증미 밑에 있는 마을이다. 증미라 하던 것이 변하여 청미 또는 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버드나무말

쪽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버드나무말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엔 냇가뿐만이 아니라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인데, 하남포(下藍浦)라고도 부른다. 남포(藍浦) 아래편에 있는 골이고 아래고개라고도 부른다.


아래고개

아래조캐 라고도 하며 쪽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냇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


위조캐(상남포 上藍浦)

쪽개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시루바위

시루봉 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다. 큰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바위라 부르며 중암이라고도 부른다.


시루봉(증미, 증봉 甑峯 )

청람리 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142m가 되는데, 시루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었다.


동막(東幕)골

버드나무말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처음 여기에 마을이 형성(形成)될 때 움막을 짓고 살던 것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동막, 또는 동막골 이라고도 부른다.


도리말

큰말 옆 산을 돌아가서 자리한 마을을 도리말이라 부른다. 산을 돌아서 마을이 있다 하여 도리말이라 부른다 한다.


개미기 고개

청산에서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미기고개라고 부른다. 고개가 잘룩하여 개미허리와 비슷하다 하여 개미기고개라 부른다 한다. 의현(蟻峴)이라고도 부른다.


개미굴

개미기고개 남쪽에 있는 경부선(京釜線)철로의 굴이다. 길이가 200m가 되며 작은 굴이 잇대어 있는데 개미기고개에 있다 해서 개미굴이라 부른다.


쪽개

청미 남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앞 냇가에 쪽이 많이 있었다 하여 쪽개라 부른다. 조캐, 남포라고도 부른다.


양지말

버드나무말 산등성이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등성이에 있어 양지를 받는 마을이라 해서 양지말이라 부른다.


버드나무말

양지말 아래쪽에 있는데 버들이 많아서 버드나무말 이라 한다.


동막골

청람리 중 제일 윗동네로 이곳에 경주김씨가 동막을 짓고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동막골 이라 한다.


남포

쪽개 라고도 불리우며 큰말, 도라말, 양지말, 버드나무말이 이에 속하며 이곳이 옛날에 뻘이었다 하여 남포라 한다.


둥글봉

연수봉 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동막골 뒷산을 가리킨다. 이 산에는 큰 광산 1개와 작은 광산 1개가 있다.


국사봉

남포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이곳에 봉화대가 있었다.


서낭당골

동막골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되는데 이곳에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당골 이라 한다.


절터골

꼬장산 밑의 골로 절이 있었다 하여 절터골 이라고 한다. 기와가 나오며, 예전에 빈대가 많아 이 절이 망했다고 한다.


날근터

국사봉 밑에 있는 곳으로 집터자리가 있고, 기왓장들이 나온다.


진골

남포 동쪽에 있는 골로 골이 길다 하여 진골이라고 한다.


방축골

지금의 돼지막 있는 곳을 방축골 이라 부른다.


말뜰

마른들 이라는 의미로 물이 귀하다고 하며 그래서 물이 말라 있다하여 말뜰 이라고 한다.  마을 들어와서 우측으로 보이는 논이다.


서당골

국사봉 밑의 골로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


평절미

동막골에서 저수지 가는 쪽의 밭이다.


모이골

평절미 있는 곳의 밭으로 연수봉 가는 쪽에 있다.


도깨비펀돈

서낭당이 있는 곳을 도깨비펀돈 이라 한다.


홈도러

지금은 저수지에 잠긴 곳으로 동그랗게 돌아가는 곳이라 하여 홈도러라 한다.


송정리(松亭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선비 한 사람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솔밭부근(附近)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불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송동과 사정, 그리고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정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솔재

송정리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가 있는 고개마을이라 해서 솔재라 부른다.


신대(新垈)

상소골 남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 마을이 새로이 생겼다 하여 새터, 신대(新垈)라 부른다.


안터

연수봉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안터라고 부른다. 새터 안쪽에 위치하는데 내기(內基)라고도 부른다.


사장골

구리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던 곳이다. 사장동(沙場洞) 사정리(沙亭里)라고도 부른다. 사장골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사장골이라 부르고 바깥 편에 있는 마을을 또한 바깥사장골이라 부른다.


상소골

송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송곡리 소골 위쪽에 있다. 상송동(上松洞) 상송곡(上松谷)이라고도 부른다.


절텃골

연수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연수암(延壽岩)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텃골이라 부른다.


연숫골

절텃골 옆에 있는 골짜기를 연숫골이라 부른다. 송정리 동남쪽 계곡(溪谷) 절텃골에서 지금의 송곡천(松谷川)까지의 400여m의 골짜기를 말하는데 절텃골에 있던 연수봉(延壽峯)의 이름을 따서 연수골이라 부른다.


연수봉(延壽峯)

상소골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큰중소골

상소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지금의 능골 마을 보다 큰 마을로서 인가가 많았으나, 집터가 나쁘다 하여 지금의 상소골 또는 외지로 이주하고 권씨(權氏)의 산직집만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수호(數戶)가 살고 있고 옛날의 집터 자리가 남아 있을 뿐이라 흔터골이라고도 부른다. 대중송동(大中松洞), 대중송곡(大中松谷) 이라고도 부르는데, 큰중소골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흔텃골

전에는 중소골 보다 컸던 마을인데, 점점 쇠퇴하여 4~5호가 남았으므로 흔텃골이라 한다.


독송정(獨松亭)

상소골 앞 냇가에 있던 독송정의 터로, 지금은 예전의 독송정이 없어졌지만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는데 그 정자(亭子)가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한다.


동곡(銅谷)

새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구리가 많이 나왔다 하여 동곡(銅谷), 동곡동(銅谷洞), 구리내, 구리골 이라고 부른다.


송정리

소나무가 많고 400여년 된 정자가 있다하여 송정이라 했다. 근래에 송정에 정자가 없다하여 연기군수가 새로 정자를 지어주었다.


소골 골탱이

보덕 1리, 송곡 1, 2리, 송정 1, 2리를 통 털어서 소골 골탱이 라고 한다.


상소골

소골골탱이 꼭대기라 하여 상소골 이라 한다.


솔재

상소골에서 솔재 넘어가는 고개를 솔지고개라 하는데 그 밑의 마을을 솔재라고 한다.


행골

솔재고개 옆쪽인데 상소골 서북쪽의 골을 행골이라고 한다.


들가운터

쟁미뜰 가운데에 집을 짓고 살았고 들 가운데에 집을 지었다 하여 들가운터 라고 한다. 1950년경에 집이 들어왔다.


사정골

모래사(沙), 정자정(亭)자를 써서 사정동(沙亭洞)이라고 했는데 모래가 많은 곳에 정자가 있다하여 사정이라 했다.


구리굴

정고개 있는 저수지 앞쪽의 마을을 말하는데 동곡 이라고도 하고, 예전에 구리가 많이 나왔다 해서 구리굴이라 했다.


절텃골

절이 있었던 동네라 하여 절텃골이라 한다.  연삭골 고라당에 있다.


연삭골

연산굴 이라고 하는데 박팽년의 할아버지 묘가 있는 곳을 말한다.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닌데 지금 집 한 채를 짓고 있으며, 상소골 동북쪽에 있는 골을 말한다.


당골

송곡리와 송정리의 경계에 있는 골을 말한다.


소탁골

마을회관 뒤쪽을 소탁골 이라 한다.


아낙박골

상소골 동네의 구서기 마을로 동네 동쪽을 말한다.


호룡골

덜골 고라당에 있다.


함장모퉁이

상소골로 나가는 모퉁이를 말한다.


신도비강변

양주조씨 신도비 있는 곳을 신도비강변 이라고 한다.


덕대골

아이들을 묻는 애장터가 있다하여 덕대골이라 한다.


서담네

솔재 앞뜰 앞에 있는 내를 서담네라고 한다.


미리산

송정 1리 정면에 보이는 산을 말한다.


당이마

미리산 자락에 붙어있는 곳을 당이마 라고 한다.


연수봉

송정 2리 안터 뒷산을 말하는데 예전에 바다가 되어 연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바위가 되었다 하여 연수봉이라 한다.


딴통리

숲진거리 밑에 동그랗게  떨어졌다 해서 딴통리 라고 한다.


옻샘

웃골과 북단골 사이에 있는 샘을 말한다. 물이 차고 작은 바위틈에서 물이 나왔는데 옻이 든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낫는다 하여 옻샘이라 하였다.


새터고개

상소골에서 새터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큰고개

송정 2리에 있는 정고개를 큰고개 라고 한다.


송정리고개

안터에서 송정리, 청람리, 송정 3리로 갈 수 있는 고개를 말한다.


연삭굴고개

연삭굴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장내미고개

연삭굴 고라당에서 보덕 2리로 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헌터골

박만기 이장님 공덕비 옆쪽에 위치한다


솔재

마을회관 서쪽을 말한다.


상소골

마을회관 동쪽에 있으며 소골에서 제일 꼭대기라 하여 상소골 이라 부른다.


행골

솔재고개 옆, 서북쪽의 골이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다


사정동

모래사(沙), 정자정(亭)자를 사용하며 모래사장에 정자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 남쪽에 위치한다.


조케고개

행굴에서 청람리(조캐)가는 고개이다.


솔재고개(솔재너머)

숲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습징거리 ,습징이라고도 부른다.


정고개

저수지 옆의 고개로 송성 3리와 송정 2리의 경계이다.


송성리(松城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원래가 백제 때부터 솔이 울창했고 또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송성(松城), 금성(金城)이 여기에 있어 여기를 솔티와 성곡의 이름을 따서 송성리(松城里)라 하여 이웃마을을 병합하고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가 되었다.


요골

예전에 이 마을에 한 가구가 살 때 어느 해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흔적도 없이 없어지자 그 곳에 요란스럽게 흐르는 물을 보고, 지나던 한 선비가 말하기를 요곡(물댈 요(?), 골 곡(谷))이라 말한 것이 그렇게 전해 내려오다가 요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예산이씨(李氏)들이 집을 짓고 많이 살고 있다.


주막뜸

예전 전의군(全義郡)당시 남면을 거쳐 서면으로 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주막이 있어서 마을을 주막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무드리

잿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물이 흐르면 뱅글뱅글 돌아 때로는 강바닥까지 보였다 하여 물도래, 무도리라 부르다가 무드리라 부르게 되었다. 물이 뱅글뱅글 돈다해서 수전(水田), 수전리(水田里), 수회(水回), 수회리(水回里)라고도 부른다.


잿말

작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산아래 마을이 있다 해서 처음은 재말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잿말??이라 부르게 되었고 성곡(城谷), 성곡리(城谷里)라고도 부른다. 파주 염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솔티

중말 남서쪽에 있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솔티라  부른다. 솔티고개는 고개가 길고 험하여서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솔티마을은 조선시대 때 사기소가 있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솔티동이라고도 부른다.


작성산(鵲城山)

이성산(李城山)위에 있는 산이다. 예전 난리 때 이 근처 사람들이 이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오랑캐들이 바라다 본 즉, 마침 까치가 많이 짓고 있으므로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그대로 갔으므로 이 곳에 피난 온 사람들은 무사하였다. 까치가 많은 산성이라 하여 작성산 또는 까치성이라 부른다.


이성(李城)

전동면 송성리(松城里) 이성산(李城山) 위에 있는 성을 이성(李城)이라 부른다. 성안에 여단(檀)이 있고, 여조태사(麗朝太師) 이도(李棹)가 기거(起居)하였던 곳으로 남북(南北)으로 단(檀)을 일정식(一亭式) 쌓았으며, 겨울에는 남정(南亭)에 거주하고 여름에는 동정(冬亭)에 거주하였다.


이성산(李城山)

전동면 송정리, 신방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돌로 쌓았는데 고려 때 이도(李棹)가 살았다 하여 이도(李掉)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중말

무드리와 솔티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일명 백의도사(白衣道師)로 알려진 학관 이정식(李定植) 차남(次男) 이완규(李完珪) 선생의 자손과 백의장(白衣長)하여 민족(民族)혼을 심은 마을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무드리와 솔티 중간에 마을이 있다 해서 중말이라 부른다.


각골(각곡 角谷)

무드리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뿔처럼 생겼다 한다.


통소리고개

통소리에 있는 고개로 육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이 고개로 가면 금이산에 올라갈 수 있다.


바위봉

마을입구의 골로 바위가 많아서 바위봉 이라고 불렀다


참샘골

재피골 옆의 고랑을 말하며 차가운 샘이 이곳에 있었다 해서 참샘골 이라고 부른다.


개미고개

산이 개미허리처럼 생겼다 해서 개미고개이다.


짐바골

새터말 앞 요골 뒤에 있는 골짜기로 박을 자르면 바가지가 되는데 바가지처럼 가운데가 움푹 들어 갔다 해서 짐사골 이라고도 한다.


작은 뒴박골

각골 들어오는 곳의 좌측 고랑이다. 뒴박 처럼 생겼다 하여 뒴박골 이라고 불렀다.


서낭당

꼬장산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돌무더기가 있다고 하며, 현재 무속인들이 와서 제를 지낸다. 또 근처에는 옛날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재일말

성재를 사용해서 재일말이라 하고, 이성이라는 성이 있었다. 지대가 높아 물이 부족해 농사가 잘 안되어서 부자가 없다.


벌말

개미고개벌에 마을이 있었는데 옛날에 홍수가 나서 마을이 벌말 쪽으로 떠밀려 와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안산

재일말과 벌말 사이에 있는 산으로 앞쪽에 있다는 뜻으로 안산이며, 김씨 종산이다.


이성산

이 산에 이성이 있었다 하여 이성산 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성은 없고 돌무더기 같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하며 이도라는 사람이 이 성의 성주였다.


통매

재일말 안쪽으로 둥그스런 언덕이 있는데 둥구스름 하다고 해 통매이며 이곳에 묘가 있었다. 이 묘는 새마을사업으로 꽃밭을 만들려고 공동묘지로 이장했는데 꽃밭을 만들고 마을에 사고가 생겨 통매 옆 둥구나무에다가 제를 두 번 올렸었다. 제는 고사 지내는 형식으로 지냈다.


거미덕골

이성산 밑의 골짜기이다.


수박고개

육계리 사람들이 수박고개로 많이 넘어갔으며 현재 육계리는 전의지역에 속한다.


대추나무골

이곳에 1958년도쯤 주막이 있어서 주막뜸 이라고도 부른다.


금이산(성제)

큰말 뒤에 있는 산을 말하며 금이성이 있어 금이산 이라고 하며 성제라고도 한다.


통미산

큰말 뒤에 우측으로 조그맣게 나 있는 산으로 모퉁이에 산이 있다 하여 통미산 이라고 하며 또 통미산 밑으로 물이 흐르는데 산을 돌아서 흐른다 하여 통미산 이라고도 한다.  산이 둥글게 되어있어 통미산 이라고 부른다.


토옥골

통미산 아래의 골 이름이다.


소고리미

대추나무골 뒤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장사꾼이 소에 소금을 싣고 대추나무골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잠시 쉬어가려고 물가 있는데서 쉬는데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물가에 갔는데 소금이 그만 물이 떨어져 소금을 잃고 소에게 물을 먹이니, 소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소가 죽었다고 해서 소고리미 라고 한다.


엄줄

대추나무골 안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칡넝쿨이 많이 자라서 마을까지 칡넝쿨이 내려왔다.


뒤펀산

성제 올라가는 산길로 큰말 뒤에 있는 산길이다.  뒤쪽에 있다해서 뒤편 산 이라고 한다.


불당골

뒤편 산 좌측으로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뒷골

통소리 좌측에 있는 골로 뒤에 있는 골이라 하여 뒷골이라 부른다.


큰뒷골

작은뒷골 옆에 있는 골이다.


작은산막실

큰뒷골 옆으로 나 있는 골이다.  해송나무가 산막처럼 둘러싸여 있다하여 산막실 이라고 부른다.


큰산막실

작은 산막실 옆에 있는 고랑이다.


도독골

큰산막실 좌측의 골짜기를 가리키며 옛날 이곳에 도독이라는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다.


바위봉

불당골 좌측으로 차례대로 바위봉, 진골, 재피골, 참새골 이라고 부른다.  산에 바위가 많아서 바위봉 이라고 한다.


펀돈

구살양달 근처에 있는 논으로 위쪽으로 평평한 곳이 있는데 평평한 곳 밑에 있어 펀돈 이라고 한다.  평평한 곳을 풍적새라고 하며 연자방앗간이 있었는데 1950년경 사라졌다.


구리골

송현원 옆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금을 캐던 굴이 있었다. 1980년경에 길이 생기면서 사라졌다. (1983년쯤까지도 금을 캤다고 한다.)


엄줄

대추나무골 지나서 바로 안고랑이다.  칡이 많아서 이곳까지 내려오며, 지금도 칡이 많다.


연동마루

양지원(송현원)가는 길에 있는 논과 밭으로 이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자고 하는 말이 같이먹고 영을 쌓자고 해서 연동마루라고 했다.


치시미

연동마루 위에 있는 논과 밭으로 옛날에 동네사람들이 뜯어가도 남을 만큼 치나물이 많이 자랐다.


송곡리(松谷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보평안쪽 골짜기에 자리함으로 속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소골, 또는 송곡(松谷)이라  불렀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가재골

송곡리(松谷里)에 있는 마을로, 가재가 골짜기에 많다해서 가재골이라 부른다. 모시터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꽃짝골

송곡리에 있는 마을로 꽃이 잘 어울려 피는 마을이라 해서 꽃밭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꽃짝골이라 부른다.


소골

보령 안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속골, 즉, 산 속에 있는 마을로 속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소골이라 부른다.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모시티

모시티에서 조치원읍 둥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시티라 부르고, 그 아래 마을을 모시티 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역시 모시티라고 부른다.


병마산(兵馬山)

현재는 조치원의 신안리 조형아파트 옆으로 흐르는 조천 건너에 있는 산이다. 산 정상에 산성이 있으며, 예전에 이곳에서 군사를 조련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재

하소골 동북쪽 송곡리 산26번지에 있는 낮은 토성(土城)이다. 토성이 아래 위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三韓)때의 농성(農城)이다.


중소골

소골 중앙에 있는 마을을 중소골 이라고 부른다. 또한 능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의 손(孫)인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묘(墓)를 여기에 쓰게 되자 소곡(小谷)을  능곡(陵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능(陵)이 있는 곳이라 능골이라 부른다. 그 후 영의정, 병조판서 등 많은 고관들의 능(陵)을 썼다.


하소골

하송곡(下松谷), 아래소골이라고도 하며, 소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옥자리터

모시티 동쪽에 모시티에서 300m거리에 옥자리터가 있다. 예전 삼한시대에 농성(農城)인 토성(土城)을 쌓을 때 부역자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옥자리인데, 한 번은 애를 밴 여인을 가두어 두었더니 쌍둥이를 분만하여 그 때부터 옥자리를 옮겼다 한다. 지금은 일명 쌍둥이 자리라 하여 집을 짓지 않고 전답(田畓)으로 사용한다. 쌍둥이 자리라고도 부른다. 송곡리 38번지에 있다.


장산

모시터 뒤에 있는 산을 지칭한다.


쌍둥이자리

옥(형무소, 교도소)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여자죄수가 쌍둥이를 낳은 자리라 하여 쌍둥이자리라 한다.


개작골

가재가 많이 났다하여 개작골 이라 하였으며 예전에 100여 호가 살았을 정도로 부자동네였으나, 그 가구는 거의 모두 장똘배기 였다.


황새바위

모시터 동쪽 끝에 황새처럼 생겼다 하여 황새바위라고 한다.


굴바위

모시터 동남쪽에 위치한 바위로 예전에 짐승들이 월동했던 굴이라고 한다. 동물들이 많아서 연기를 피어 올려 동굴의 동물들을 잡았으며, 장산에 위치하고 있다.


윗샘

모시터 사람들이 먹던 샘으로 위에 있다하여 윗 샘 이라 했는데, 샘이 아주 작지만 물이 깨끗하고 많이 나서 마을사람들이 아직도 펌프로 물을 끌어다 먹고 있다.



적산

일본이 일제시대 때 소유했던 산을 정부산, 그러니까 적산이라 했다.


신청산

황새바위가 있는 산으로 한마음 효병원 뒷산을 말한다.


댕이고개

모시터에서는 봉산리를 댕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봉산리 가는 고개를 댕이고개라 한다.


배남징이고개

봉산리를 개작골에서는 배남징이라 했는데, 개작골에서 봉산리 넘어가는 고개를 배남징이 넘어간다 하여 배남징이고개라 한다.


쪽다리

좁은 다리를 말하는데 보건소 옆 모시터 들어가는 다리를 말한다.



여우막골

부망골 옆 밑의 골을 여우막골 이라고 한다.


담배밭골

모시터 남서쪽 마을로 예전에 담배를 많이 재배했다 하여 담배밭골 이라 한다.


서낭당

봉산동 넘어가는 댕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1992년에 신작로가 나면서 서낭당이 사라졌는데 그 뒤로 마을 어른들이 계속해서 아프고 죽어나가서, 서낭당이 사라진 것 때문이라 하여 그 자리에 다시 서낭당을 만들었다.


능골

2리의 자연부락으로 조선시대 부마의 묘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질마봉

소질마 같이 생겨서 질마봉 이라고 불린다. 송곡리 북쪽에 위치한다.


새텃굴

송곡 2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이 앞에 있는 논도 새태논 이라고 한다.


샴배미

샘이 있던 곳에 있는 논이다.


장나들이

새텃굴 가는 쪽으로 현재는 소막이 있는 작은 길이다. 이 길을 지나면 모시울과 석굴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황새바위

마을동쪽 끝에 한마음효병원 있는 곳으로, 심청산에 있는 바위로서 황새모양이다.


석굴고개

송곡리에서 조치원 신안리(석굴) 들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석곡리(石谷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마을 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배기 돌꽂이로 불리우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석곡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선돌배기

선돌이 서 있었다 하여 선돌배기, 돌곶이, 석곡(石谷)이라 부른다. 예전에 한 장수가 한 길이 넘는 돌을 지팡이로 짚고 다니다가, 지금의 109번지에 꽂아 놓았는데 그 돌을 선돌이라 부른다. 선돌이 병오년(丙午年) 장마에 넘어져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선돌이 있던 마을은 선돌배기의 하석곡이며, 이 선돌을 주축으로 웃말은 위선돌, 가운데는 중석곡이라 부른다. 중석곡은 온고비골이라고도 부른다.


가운데 돌꽂이

중석곡(中石谷), 중석리(中石里)라고도 하며, 돌꽂이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위돌꽂이

상석곡(上石谷), 상석리(上石里)라고도 하며, 돌꽂이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래돌꽂이

하석곡(下石谷), 하석리(下石里)라고도 하며, 돌꽂이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국사봉(國師峰)

돌꽃이 남서쪽에 있는 산을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른다. 높이가 267m되는 산인데, 산에 돌산과 청마가 있고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고려 때부터 산봉(山峰)에서 국사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또한 서민(庶民)들이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제단(祭壇)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돌단과 철마가 있고, 산제당이 있다.


송학산(松鶴山)

국사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석곡리

돌이 많다해서 석곡리이며, 돌꽂이 라고도 한다. 상소곡, 중소곡, 하소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석곡

석곡리 제일 안쪽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안말 이라고도 한다.


중석곡

중간에 있는 석곡리라 중석곡이라 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 돌음말 이라고도 한다.


하석곡

아래쪽에 있어 하석곡이며 아랫말 이라고도 하고, 선돌배기 라고도 한다.


사기점골

안말 안쪽의 골짜기로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사기점골이 되었고 이곳에 사기 굽던 흔적이 남아 있다.


능안

사기점골 좌측으로 능안 이라고 한다.

능처럼 큰 묘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리개울

중소곡과 상소곡 사이의 논을 말하는데 농지정리 하기 전에 논이 구불구불 있다 해서 구리이며, 논 사이사이로 개울이 있어 구리개울이라고 한다.


옻샘

물이 아주 차가워 옻 오르면 이곳에서 씻으면 나았다고 하여 옻샘이라 하였다.


연자방아돌

중소곡에 있는데 마을에 있던 것을 주워다 놓았다.  연자방앗간은 1970년대에 소실되었다.


큰샘

안말 동네 중앙에 있는 샘으로 현재도 사용하며 각 마을마다 이런 큰 샘이 있었다.


둥구나무

안말 입구(상석곡)에 있는 300년 된 느티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유씨 열녀문

유씨(기계유씨)는 거창신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 살면서 동네사람들과 잘 지내며 성품이 어질고 총명하여 이웃과 가족에게 덕을 많이 베풀었다. 그렇지만 남편과 사별하자 가족을 모아놓고 모두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 이라고 얘기했고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후에 7일간 음식을 전폐하고 남편 뒤를 따랐다. 1727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보덕리(寶德里)

조선 태종(太宗)때에 전의현(全義縣)에 속했다가 다음에 전기현(全岐縣)에 속했으며 다시 전의현에 속했었다. 이 지역에는 넓은 들과 큰 보(寶)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보덕(寶德)이라 부르는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보평(寶坪)의 보(寶)자와 덕소의 덕(德)자를 따서 보덕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속하게 되었다.


보평(寶坪)

보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붓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 붓들 즉, 말해서 보(洑)가 있는 들이라는 뜻이 변해서 붓들이라 부른다. 앞들이 넓고 보(洑)가 있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어 붙여진  명칭(名稱)인데, 그래서 보물 같은 들이라 하여 보평(寶坪)이라 부른다.


서당(書堂)골

보평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서당이 있어서 서생(書生)들이 글 읽던 자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서당골 이라 부른다.


덕소(德沼)

지프네 위쪽에 있는 마을을 덕소(德沼)라 부른다. 예전에는 냇물이 흘러와서 고여 덕소라 부르고 선녀(仙女)들이 노는 신선지(神仙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래가 쌓여서 소(沼)는 없어졌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고이는 소(沼)가 있다 해서 이 마을을 덕소라 부른다.


절터골

연수봉 남동쪽에 300m정도의 계곡(溪谷)이 있는데 이 계곡을 절터골이라 부른다. 예전에 연수봉 기슭에 연수사란 절이 있었다.


장군(將軍)바위

보평(寶坪) 북쪽 냇가 산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군바위 라고 부른다. 또한 장군암, 석정(石亭)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바위가 넓은 바위 위에 얹혀 있고 그 밑에 큰 내가 흐르는데 명종 때 학자 박곤(朴坤)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을 맞아 바위 위에서 이학(理學)을 담론하였던 바위라 한다.


심천(深川)

보평(寶坪)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깊은 내가 있다 해서 심천이라 부른다. 또한 지프내 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은 깊은 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프내라 부르게 되었다.

심천(深川)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조천(鳥川)으로서 소(沼)가 있었다 한다. 여기는 깨끗한 물이 고여서 선녀(仙女)들이 가끔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가는 곳이라 전해 내려왔는데, 지금은 소(沼)자리에 깊은 못은 없어졌으며 그냥 통칭 심천(深川)으로 부르고 있다.


열녀문(烈女門)

서당골 앞에 있는, 김진창(金震敞)의 아내 나씨(羅氏)의 효열을 찬양한 정문이다.


통미

통미 산밑에 있는 마을이다.


통미산

보평 남쪽에 외따로 있는 낮은 산이다.


성재

남서쪽의 재를 말하는데 하소골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조선시대 토성이 있었다.


서당골

성재에서 조금 올라가면 김서방네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 이라 했다.


솔밭

1리 회관 동남쪽을 솔밭이라고 하는데 솔밭 끝에 묘가 많이 있었다. 1980년대 초에 경지정리를 하며 묘를 파내어서 납골당에 모셨다고 한다.


모래굴

장마로 인해 모래가 다 덮었다 하여 모래굴 이라고 한다.


황새바위

띠재산에 있는 바위를 말하는데 삐죽하게 생겨서 황새바위라고 한다.


노적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전쟁시 벼를 쌓아서 노적처럼 보이게 하려고 둘렀다 해서 노적산이라 한다. 지금은 둥그렇다 하여 둥그락 산이라 한다.


안터

덤소 너머 2리 마을회관 오는 길에 있는 마을을 안터 라고 한다.


덤소

2리 마을회관 동쪽을 말하는데 보덕 2리 마을입구에 위치한다.

소가 드러누운 형국인 와우형이라 하여 덤소라 했다.


국사봉

2리 마을회관 서쪽에 보이는 높은 산을 말하는데 일제 때 측량기점이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 곳에 성과 봉화대가 있었다.


칭벽미테

마을 들어오는 신작로 다리 밑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시미(이무기)가 살아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


북적골

이곳에다 절을 크게 지어야 한다 해서 그리 불렀는데 지리적으로 아래에서 쳐다보면 시신을 염해 놓은 것 같다 해서 치성을 많이 들이거나 정성을 많이 들인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쌍복골

애장터 였는데 죽은 아이들은 입던 옷을 입히고, 7번 묶어서 1m정도 파서 여우가 훼손하지 못하도록 깊게 묻었다.


작은절굴, 큰절굴

시커먼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굴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지어야 하는 터라 하여 크기에 따라 큰절굴, 작은절굴로 나뉘었다


노맛골고개

저수지 위쪽, 마을 정 서쪽에 있는 고개인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청람리(도맛골)가 나온다.


한응골

하늘만 보인다고 해서 한응골 이라 하는데 전쟁시에 피난하는 피난처였다.


대추나무골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대추나무골 이라 한다.


지린내미

청람리로 넘어가는 조그만 산길이 있다.


큰말내미

숯을 굽던 가마 같은 것이 나왔다 하여 큰말내미 라고 한다.


증골

즘촌 이라고도 했는데 그곳에서 옹기를 굽던 즘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즘촌이라 했다. 지금도 옹기가 출토된다.


솔모랭이

돌아간다 해서 솔모랭이 라고 한다. 솔모랭이에 소를 매면 소가 죽는다고 해서 소를 매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다.


산소골

산신을 위하는 골이라 하여 산소골 이라 하는데, 그곳에는 바닥에 자갈이 많이 깔려 있다.


부엉이굴

장내미 있는 곳에 있다. 굴이 커서 6?25때 피난처 구실을 한 곳이다.


금점굴

일제시대 때 금을 캐던 굴로, 송악산에  있으며 굴은 여러 개이다. 소화 7년(1932) ~소화 15년(1940)까지 금을 캤었다.


미곡리(美谷里)

원래 이 지역은 계곡(溪谷)에 풍류(風流)가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미곡(美谷)이란 시조(時調)와 학이 있듯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으로 통칭(通稱)되어 왔으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미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구역이었다.


운주산성(雲住山城)

전동면(全東面) 미곡리(美谷里)에 운주산정(雲住山頂)에 있는 산성을 운주산성 이라 부른다.

예전에 전성부사(全城府使)가 있을 때 목민(牧民)을 다스렸던 산성이다.


안렴사유허비(?廉使遺墟碑)

학당이 앞에 있는 비(碑)를 안렴사유허비라 부른다. 이 비(碑)는 안렴사(按廉使)였던 김휴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遺墟碑)다.


삼천암(三千岩)

운주산 중턱에 있는 바위를 삼천암(三千岩)이라 부른다.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어서 목천(木川) 수신(修身)으로 통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때 이 바위에 3,000명이 피난하였다가 왜적이 여기를 지날 때 바위에 숨어있던 3,000명 가운데 어린 아이가 우는 바람에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수구동(水口洞)

미륵당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때 이 곳에 피난하였던 수 백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 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쳤다 한다.


학당리(學堂里)

미륵당이 동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을 학당리라 부른다. 고려말엽 안렴사(按廉使) 김휴가 여기에 살면서 학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한 마을이라 해서 학당리 또는 학당이 라 부른다.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이 모퉁이에 있는 미륵으로 남녀 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 3척(尺) 5촌, 넓이 1척(尺) 8촌이 된다.


새뜸

신동(新洞)이라고도 하며, 조일말 동북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


조일말

제지곡(製紙谷), 지곡(紙谷) 이라고도 하며, 미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제지소(製紙所)가 있었다.


치마바위

삼천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로 잔돌이 큰 바위를 이루었는데, 옛날 남매 장사가 있어서 서로 목숨을 걸고 언약하기를, 남동생은 목매기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갔다 오기로 하고, 누이는 운주산에 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보니 아들이 질 것이 분명하므로 그를 구하기 위해, 뜨거운 국밥을 딸에게 권하여 먹이는 동안에 그 아들이 돌아와, 그 딸이 깜짝 놀라 치마에 싼 돌을 산기슭에 쏟아 놓아서 바위가 되었다 한다.


조일말

옛날 이 마을에 종이(창호지) 만들던 공장이 있어서 종이마을이란 뜻으로 조일말 이라고 한다.  마을회관이 있는 동네이다.


까치산

조일말에서 앞쪽으로 보이는 큰산이 까치산이다.


무속골

수구동이라고도 하며 처음에는 피수골 이라고 했는데 백제시대 때 이곳으로 적군이 쳐들어와 마을주민 3000명이 귀신바위 옆 삼천굴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만 아이가 울어 적군에게 모두 몰살당해 피로 골짜기가 얼룩졌다고 피수골인데 이름이 흉하다고 무속골, 수구동으로 바꾸었다.


처막골

수구동 마을 안쪽으로 좌측 끝 골짜기를 말하며 장수남매의 치마바위 때문에 그렇게 불리고 있다.


큰골

수구동 우측 끝에 있는 골짜기로 방아골 이라고도 했으며 운주산 올라가는 고랑이며, 골이 크다 하여 큰골이라 한다.


노적봉

학댕이 앞에 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이곳에 부자가 살았다.


한녀불

뒷고개로 올라가면 운주산으로 나 있는 길을 말하며 해가 잘 들어서 양달이라 한다.


향우정

앞고개 밑으로 난 지역을 말한다.


곱들깡

학댕이 마을 뒤 우측방면으로 옛날 이곳에서 곱들(무딘돌)이 많이 나왔다.


대자루 골짜기

학댕이 가는 골짜기이다.


다만밭

무속골 안쪽으로 있는 밭으로 옛날 이곳에 집이 지어진 담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연거지 논다랭이

마을 안쪽으로 있는 논이다.


열세마지기내글

연거지 논다랭이 부분으로 열 세마지기를 말한다.


고랑밭

무속골 마을 뒤쪽으로 산중턱에 있는 밭이다.


잔등밭

고랑밭 위의 산잔등 이란 뜻의 잔등밭이 있다.


바탕고개

무속골에서 전의로 넘어가는 고개로 쌍용주유소가 나온다.


학당고개

학당에서 선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치마바위

처막골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도 장수남매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병풍바위

운주산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모양의 바위이다.


귀신바위

운주산 삼천굴 옆에 있는 바위로 3000명이 죽어 귀신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장리(蘆長里)

조선말엽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엔 갈대가 무성하여 갈가리라 불렀었고 임진왜란 때 학자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갈대의 덕을 입어 무난히 그 왜란(倭亂)을 피한 후 마을을 그가 노장(蘆長)이라 하였다 한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노장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양지말

중로장(中蘆長)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양지촌(陽地村) 이라고도 한다.


이목동(梨木洞)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배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이목동(梨木洞)이라 부른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


죽엽리(竹葉里)

원지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겹니 라고도 부르는데, 대나무골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대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로 여기에서 나오는 대나무는 나라에서 군기를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하여 상당히 아꼈던 대나무밭 이라 한다. 대나무밭이 있다 해서 죽엽리라 부른다.


원지기

상로장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선조(宣祖)때 학자 권주(權柱)가 이 곳에서 임진왜란을 피하였다 한다. 원직(元直) 이라고도 부른다.


노장(蘆長)

노장리(蘆長里)에 하노장. 중노장. 상노장의 세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갈대와 연유한 마을 명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학자인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왜군(倭軍)이 쳐들어 왔을 때 갈대가 길게 늘어져 무사히 난(亂)을 피할 수 있었다 하여 갈대를 칭찬하기를 노장(蘆長)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노장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마을이 갈대숲 아래 위로 생기면서부터 위쪽은 상노장(上蘆長)또는 상로정(上蘆汀), 아래는 하노장(下蘆長), 가운데는 중노장(中蘆長)또는 중로정(中蘆汀)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장(蘆長)을 갈가리 라고도 부른다.


노장천

노장리 앞을 흐르는 천이라 하여 노장천이라고 부른다. 개간 전에는 이 곳이 모두 갈대밭이었으며 노장천의 상류, 중류, 하류에 따라 상노장, 중노장, 하노장 이라고 부른다.


양지말

해가 뜨면 질 때까지 비치고, 볕이 잘 든다하여 양지말 이라 한다.


동산적굴

중노장 북쪽마을로 동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산적굴이라고 한다.


만경산

중노장 정북 쪽의 산인데, 청원군과 연기군의 경계로 난리가 났을 적에 만 명이 서울을 향해서 만세를 불렀다 하여 만경산 이라고 부른다. 만경산에 가면 말 타고 훈련하던 성터가 지금도 있는데 나무속에 가려져 있다. (기마병 등의 훈련자리를 돌로 깔아 놓았다.)


상노장

노장 3리를 말하며 원래는 상노장 내 건너편에 있었는데 물이 너무 자주 들어와 홍수가 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큰사랑집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곳으로 안동 권씨네 종손집이었다.


서당골

상노장 북쪽에 있는 골을 말하며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 이라 한다.


산막골

임진왜란때 안동권씨 13대 할아버지께서 산에 막을 치고 피난을 했다하여 산막골 이라고 한다.


두티미골

원지기 옆 골을 말한다.


동투정

자비정사 있는 곳을 동투정 이라고 한다.


자비정사

2002년에 건립된 새로 생긴 절이다.


원적사

전설이 깊은 절로 빈대가 많아서 스님이 빈대를 죽이려고 절을 모두 태웠다가 1940년대 초에 다시 원적사를 지었다.


양물빼미

1. 예전에 아주 좋은 약수가 있어, 쌍가마(벼슬아치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와서 이 물을 마셨다. 이 곳은 개인소유였는데 돌을 덮어서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2. 아주 좋은 약수가 있었는데 어떤 기운 센 장수가 양물빼미 옆을 지나다 돌에 맞았다고 한다.  화가 난 장수는 큰돌을 들어서 거기를 막아 놓았다고 한다. 그 후로 그 약수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며, 병풍바위 위쪽에 위치한다.


병풍바위

병풍처럼 멋있게 펼쳐졌다 하여 병풍바위라고 한다.


진설미

상소골 환영슈퍼 앞들을 진설미라고 한다.


낡은터

만두라 옆을 말하는데 상노장 사람들이 처음 살았던 낡은 곳이라 하여 낡은터 라고 한다.


무시미

지금의 가스공장이 있는 곳을 무시미라고 한다.


벅시미

가스공장 있는 무시미 밑을 말하는데 예전에 주막이 있었는데 그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루뜰

상노장 저수지 있는 쪽이며 죽엽리 가는 곳을 말한다.


소시랑골

쇠스랑처럼 생겼다 하여 소시랑골 이라 했는데 여기에 여우가 살아서 잡으려고 총을 쏘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도술을 부리는 여우가 산다고 생각했다.


헛가마

원지기 가는 길 밑의 호두나무 있는 곳을 말한다.


수렁골

수렁이 많다하여 수렁골 이라 했는데 헛가마와 원지기 중간에 위치한다.


맨자마골

골이 거의 형성되지 않은 맨자마 같다하여 맨자마골 이라고 한다.


목뺑이

골은 좁은데 나무가 많다하여 목뺑이 라고 한다.


가마골

까마골 이라고도 하는데 골이 까맣게 보인다하여 가마골 이라고 한다.


작은 불당골, 큰 불당골

불당이 있었다 해서 불당이라 했는데 가보면 절터처럼 양쪽에 암자가 있다.


굴방아골

안에 작은 굴이 하나 있다하여 굴방아골 이라 했으며, 그 굴에 야생동물들이 많이 살았다.


원적골

원적사 있는데 골이 있다하여 원적골 이라 한다. 원적사는 고려중엽 때의 절로 불타서 없어졌던 것을 6.25이후 지어졌다.


꼭지마골

골 모양이 꼭지처럼 생겨서 꼭지마골 이라고 한다.


작은가재골, 큰가재골

가재가 많이 났다하여 그리 부른다.


감나무골

감나무가 많았다 하여 감나무골 이라 한다.


개구리바위

백산 이라고도 하고, 그 산을 통미산 이라고도 하는데 산이 길어서 뱀혈 이라고 한다. 개구리 바위가 뱀의 머리라 한다. 바위에 청색이 박혀 있는데 개구리 같다하여 뱀이 개구리를 물고있는 형국이라 한다.


백산(통미산)

이목동 가는 길옆에 있는 산으로 주인이 백씨라서 백산으로 칭했다. 이목동 사람들은 이 산을 통미산 이라고도 불렀다.


비바위

비가 오면 4, 5명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라 해서 비바위 라고 하며, 원적사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너러바위

개울 사이에 바위가 박혀 있는데 넓고 납작하다 하여 너러바위 라고 하며, 아이들이 줄타고 멱 감으며 놀았던 바위이다.


말바탕

마을동쪽 동림산 옆을 말하는데 말을 타고 그곳을 돌고 말을 묶어 놓았었던 곳이라고 한다.  말바탕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신기하게도 물에 씻긴 돌과 빗살무늬 질그릇이 나왔다.


봉대리(鳳臺里)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고소상리(古所峠里)?서방동(西方洞)?대동(垈洞)등을 병합하여 서봉과 만경대의 이름을 따서 봉대리(鳳臺里)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평말

봉대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평평한 땅 위에 있다 해서 평말 이라 부른다.


텃골

고삿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태말, 대동(垈洞) 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태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사태말이라  불렀다.


서봉동(棲鳳洞)

고삿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토형(土形)이 봉(鳳)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는데, 예전에 鳳이 날아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또한 고삿재 서쪽에 마을이 자리하였다 하여 서방(西方)골이라고도 부른다.


목우장(牧牛場)

서봉동(棲鳳洞) 북쪽 산기슭에 있는 터다.  산기슭에 약 3ha가량 되는 평지(平地)가 있는데 예전 조선중엽에 이 곳에서 목축(牧畜)을 많이 하였던 곳이라 하여 ??목우장(木牛場)??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금은 잡목(雜木)이 무성하지만 예전에는 동물(動物)을 키웠던 자리라 하여 목우장 이라 부른다.


심중리(深中里)

심중리(深中里)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일하면 지역으로 강외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공북리(拱北里), 서는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와 접하고 있다. 조선영조 후반 (1750-1776)에는 심천리(深川里)라 불렀으나, 정조13년(1785)경 한때 없어졌다가 헌종때(1895) 다시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0년경 경술국치 직전 상심동(上深洞), 하심동(下深洞), 심남리(深南里), 심서리(深西里), 갈거리(葛巨里), 조광동(早光洞), 태고동(太古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심동과 하심동의 각 일부를 상봉리(上鳳里)로 넘겨주고 미원동(彌院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중리라 하여 강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부로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부락으로는 갈거리(葛巨里), 불근덕(丹悳), 덕룡굴(德龍堀), 민태절, 사기소(砂器所), 소죽골, 중지프내(中深里), 지프내(深川)로 나뉘어진다.


민태절

심중 2리 마을로 연기군 전동면과 청원군 동림리와의 경계지역이다. 예전에는 청원군 강외면 심중 2리였던 것을 1995년 3월 1일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으며 민태산 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 동림산 중턱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이 민태절 이라 부른데서 연유했고, 절이 폐사 되면서 절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민태절 절터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돌축대를 쌓는 곳과 그곳에서 산 정상 쪽에 계단식 건물지가 보이고 동쪽으로 험준한 벽을 오르니 기와편이 무더기로 산재한 건물지가 있었다. 이 곳의 건물지는 모두 넓은 평지를 이용하여 지어졌다는 것보다 경사를 극복하려고 돌축대를 쌓았고 그 지형을 최대한 살려서 건물을 지은 듯 하다. 건물의 숫자는 5군데 건물지가 보이고 중심지 옆에 커다란 바위에는 고인돌에 나타나는 구멍(성혈)이 서 너개 뚫려 있었다.


동림고개

민태절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이곳을 넘어가면 충청북도 옥산면 상동림 마을이 나온다.


가마골

마을 뒤 동림산 밑을 지칭한다.  그릇편이 많이 출토되어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웠던 자리라고 전해 온다.


농바위골

동림산 정상에 동림산성이 있는데 남쪽 봉우리 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이를 농바위라 부른다.


점터

절터 아래에 그릇을 구웠던 곳을 지칭한다.


성불원

민태절 아래에 있는 굿당이다.


범바위

마을에서 서남쪽 높은 봉우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른다.


약물내기

범바위 아래에 있으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한다.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았는데 양쪽 옆에 묘를 쓰는 바람에 그때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림산성

동림산성은 민태절 뒷산 동림산 정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충북 청원군 강외면 지역이었던 것을 1995년 3월 1일자로 연기군에 편입되었다. 성안에는 헬기장과 편입기념비가 설치되어 있고 민묘가 서 너기 있다. 산성의 모양은 세 군데의 정상을 휘어 감아 돌로 쌓은 퇴뫼식 석축 산성이었다.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가 심하여 돌로 높이 쌓을 필요가 없었는지 약간의 석축과 흙으로 쌓아올린 흔적이 보이고 남쪽과 동쪽은 돌을 견고하게 쌓았는데 모두 무너진 상태이다. 남서쪽의 높은 봉우리에는 누각을 지었을 건물지가 보이고 기념비, 헬기장 등에 건물지가 보이나 이들 시설을 하느라 유적 파괴가 심각했다. 석축의 방법은 축대를 쌓는 형식이었고 남쪽 봉우리 가기 전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붉은덕

땅이 황토 흙이라 하여  붉은덕 이라고 한다.


깊은내

깊은 냇가가 있어 깊은내 라고 한다.  냇가는 상심천, 하심천으로 부르며 깊은내가 상심천, 보덕리가 하심천이 된다.


서당골

1반 마을뒤 우측으로 있는 골짜기로 서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은 없다.


밤나무골

1반 들어가는 길 좌측에 있는 산으로 밤나무가 많아서 그리 부른다.


대추나무골

밤나무골 옆으로, 대추나무가 많아서 그리 부른다.


북묵골

1반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애장터가 있었는데 비가 오면 아이 우는 소리가 나서 무서운 골짜기라 사람 왕래가 드물다고 한다.


술배

현재 마을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부자만 살았는데 도둑이 많이 들어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곳 밭에서 기와장이 많이 나오고 샘이 있다.


강청골

2반에 있는 골짜기로 이 마을에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강씨는 없다.


너덜봉

깊은내에서 앞에 있는 산을 너덜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아래로 흐르는 내가 넓은 바다와 같은데 지관이 보기에는 이 봉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 하여 너른 바다 가운데의 봉이라 하여 너덜봉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덜봉의 제일 꼭대기는 학봉 이라고 한다.


뵙새울

3반 옆산으로 너덜봉 옆의 좌측에 있는 골로 이곳에서 곱돌이 많이 나와서 이곳 돌을 부셔 벼루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북절골

너덜봉 옆 우측으로 나 있는 골로, 이 골 밭 가운데에서 물이 나는데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되는데 이곳에 도깨비가 많고 운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절골에서 보면 너덜봉이 염해놓은 송장 같다 하여 기가 센 땅이라, 이곳에 절을 지어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하므로 북쪽의 절골이라 하여 북절골 이라 했다.


비석산

깊은내로 들어오는 길옆의 산이다.  이곳에 비석이 많다고 하여 비석산이라 한다.  이곳에서 3구의 미라가 나왔다고 하는데 이곳에 습기가 많았다고 하며 소나무관의 굵기가 한 뼘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 산이 동림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철도를 놓으면서 끊어졌다.


덤소뜰

깊은 내 뒷동산 넘어 논밭으로 소가 누워서 일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는데,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덤소뜰

깊은 내 뒷동산 너머의 뜰이며, 와우형국이라 하여 덤소뜰 이라 불렀다.


구레논

1반 마을입구의 논으로, 밑의 논을 하구레 라고 한다.


솔고개

술배 돌아가는 골목길의 고개이다.


산수골고개

1반 동쪽으로 상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미타절

제일 위쪽의 마을로 동림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미타사 라는 절이 있어서 미타절 이라 불렀다.


덕룡동

심중 2리 중간에 있는 마을로 앞산은 용의 형세이고 뒷산은 크고 웅장하다 하여 큰덕?(德)자에 용용(龍)자를 써서 덕룡동(德龍洞)이라 한다.


조광골

해가 제일먼저 뜨는 마을이라 하여 조광골 이라 한다.


칼골

심중 2리 첫 동네로 신라시대 임경업 장군이 말을 타고 가다가 이곳에서 쉬려고 칼을 놓았다고 해서 칼골 이라고 한다.


동림산

덕룡동에 있는 산으로 전의 동쪽에 있으며 나무가 수풀처럼 우거졌다고 해서 동림산이라 부른다. 산 정상에 동림산성이 있다.


안산

덕룡동 안쪽 산으로 용의 형태이다.


굼바골

처막골과 진골사이의 골짜기이다.


사냥골

진골의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높아 매 사냥을 할 때 이곳에서 매를 관찰하였다 하여 사냥골 이라 한다.


양달골

굼바골과 진골 사이에 있는 골로 양지바르다고 해서 양달골 이라고 한다.


동산절골

동산사 라는 절이 있었던 골이라 하여 동산절골 이라고 한다.

이 골에서 기왓장이 나온다.


양터골

조광골과 덕용동 사이의 논과 밭이며, 양지터라 하여 양터골 이라고 불리웠다.


행상바위

행상처럼 생긴 바위로 아들 낳기를 기원하던 사람들은 이 바위에 돌을 던졌다고 한다. 아들이 있어야 행여를 매 준다는 것이 이유이고, 저수지 안에 있었다.


치마바위

치마처럼 생겼던 바위로 저수지 안에 있었다.


칼바위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긴 바위로 저수지 안에 있었다.


용궁바위

자연적으로 가운데 구멍이 난 바위로 용왕제를 지내는 바위이다.


산제바위

용궁바위 위로 있으며 산제를 지내는 바위이다.


동산절고개

곶말로 넘어가는 고개로 절 뒤쪽으로 있다.


곶말고개

옛날의 절터인데 덕암리로 가는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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