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서단(해맞이 마을)

6. 남명 조식 (南冥曺植) 가. 남명선생에 대해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천왕봉으로 치닫는 산줄기들이 마을을 겹겹이 에워싸고 맑은 덕천강 물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덕산. 이른 아침이면 지리산정에서 뻗어내려온 고고한 기운이 차갑게 내려앉는다. 옛 이름이 덕산인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이르면 '지리산만큼이나 무거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던' 고고한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을 만나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남명을 떠올릴 만한 유적은 덕천서원, 산천재, 남명묘소 등이다. 남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동시 시대인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부각되지 못했다. 벼슬을 일절 사양하고 지리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것이 큰 이유였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식의 족적은 소왜돼왔다. 이웃한 고을 삼가(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태생인 남명이 지리산 밑의 덕산에 자리잡은 것은 61세 때였다. 젊은 날 정통 유학과 노장학 등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박학하였지만,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장원급제 하여 한양에서 공부 하였으나, 기묘사화 때 숙부인 조언경이 조광조의 일파라 하여 비명에 가고 아버지도 파직되어 집안이 쑥밭이 되자 고향인 삼가로 내려왔다. 남명은 생계가 어려워지자 중종 26년(1531)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에다 산해정을 짓고 18년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38세인 중종 34년(1539)에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와서 만나기를 청하여도 "대감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만나 뵈어도 늦지 않을 것이요"하며 거절하였다. 그뒤에도 몇 차례 천거 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였고, 1554년 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물리쳤다. 관직을 단호히 물리고 지방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음에도 그의 명성은 자자하여 제자가 되길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구, 곽제우, 정홍인, 김우옹, 오건, 강익, 문익성, 박제인, 조종도, 곽일, 하항 등이 그들이고, 모두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문풍을 일으킨 유학자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특징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 활동에 직접 참여한 선비들이라는 점이다. 남명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히 절제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특히 경의(마음이 밝은 것을 '경'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 함)를 중시하여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해나간다는 생활철학을 실천하였다. 학문을 익히는 것 못지 않게 실천을 중시했던 스승의 정신은 그 제자들에게 이어져, 제자들은 임진왜란 같은 나라의 위기상황에서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했다. 회갑을 맞은 남명은 지리산 가까이로 찾아들었다. 이 곳 덕산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 그는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였다. 일반 유학자들이 주자학 일변도의 성리학만을 고집하였던 것과 달리 남명은 폭넓은 성리학을 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태도로 노장학까지 섭렵하였다. 학문의 폭이 넓은 학문을 집약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경지를 더욱 높였다. 그는 "모든 사물을 환히 내려다보는 고명이 있고서야 행함이 도에 어긋나지 않고 세상에 쓰임이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배우지 않음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을 범한 것이 된다"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은 거개가 학문을 이룬 뒤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이를 군신지의로 간주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것을 불의로 여겼다. 남명은 나라에서 군신지의를 저 버렸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으나, 남명 자신은 꼭 벼슬에 나아가 왕을 돕는데만 군신지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며, 대도에 입각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도를 후세에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다. 미수 허목이 남명 선생 신도비문에 "늘 뜻을 드높이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며, 구차스럽게 조정의 요구에 따르지도 않거니와, 또한 구차스럽게 정치의 잘못을 묵과하지도 않아 고고한 자세로 홀로 우뚝 선다"고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늘 자기를 깨우치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는 남명. 한번 결심을 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의리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신에게도 용서 없이 질책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한편 퇴계와 남명 두 사람은 모두 인품이 고결한 도학자였지만 출처와 현실관을 두고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였다. 두 사람은 평생 한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류하였다. 남명보다 퇴계가 한 해 먼저 세상을 떴는데,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도에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로다"하며 애통해 마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퇴계가 "내 명정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따끔한 일침을 가하였다. "할 벼슬을 모두 다 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라고. 그야말로 시대의 라이벌다운 일화이다. 그러나 두 사람 생전까지도 이러한 갈등은 사소한 성격 차이었을 뿐이었다.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두 사람이 죽은 뒤인 광해군 3년(1611) 정인홍의 상소 사건 때문 이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본받을 만한 사표, 곧 5현으로 정해지자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두고 그에 대한 시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대부분이 퇴계 계열이었던 성균관 유생과 조정의 언관들도 가만히 있을 리 만무였다. 서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들춰내며 헐뜯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인홍의 세력이 밀려 결국 문묘종사의 문제는 기정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정인홍은 인조반정 직후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지고, 대개 남명의 제자였던 북인들은 그 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284년 만인 순종 1년(1907)에 정인홍의 죄는 신원되고 관직도 복구되었으나, 이미 정인홍에 의해 처음으로 엮어진 조식의 문집은 훼손되어 버렸고, 남명의 문도들도 된서리를 맞고 쇠퇴한 뒤였다. 두 도학자가 죽은뒤, 제자들 사이에 얼마나 심한 갈등과 도전이 있었는지는 남명의 묘소앞에 있는 여러 개의 신도비로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처음 신도비는 정인홍이 세웠지만 그가 실각하자 넘어졌고, 후손들이 다시 명사의 글을 구하였는데, 어쩌다가 미수 허목, 우암 송시열의 글이 동시에 당도했다. 두 사람 모두 산림처사 출신인 남명을 추앙하였지만, 각각 남인과 노론의 지도자 격이었던 두 사람의 비를 함께 세울 수는 없었다. 난처해진 자손들은 미수의 비를 덕산에 세우고 우암의 비는 남명의 고향인 삼가에 세웠다. 한편 정세가 퇴계를 위주로 한 남인들에게로 기울자 남명은 자연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자손들은 그럴바에야 노론인 우암의 신도비문을 받은 일이 있으니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마침내 미수비를 쓰러뜨리고 우암비를 남명 별묘에 세웠다. 그러나 남인 중심의 유림도 떠나고, 노론이 적극적으로 남명을 떠받드는 것도 아니어서 남명의 존재는 점차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타계하고 5년 뒤인 선조 9년(1576)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웠으며,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져 1920년대에 다시 중건 되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정면에 난간을 두르고 마루를 넓게 마련한 강당이 있다. 정면 5칸으로 된 이 경의당은 서원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으로 이용되었다. 내삼문 뒤쪽에는 숭덕사가 있다. 이 곳에 남명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8월 10일 남명제를 지낸다. 나. 산천재(山天齋) 덕산은 입구가 좁은 洞天으로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은 벼랑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돌문을 통해야만 했는데 이를 가리켜 入德門이라 하였다. 이는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과 '군자가 덕으로 들어간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入德門'이란 글씨는 조식의 제자인 李濟臣이 암벽에 새겼었는데 1982년 도로 확장으로 암벽이 깨져나가게 되자 글씨 부분의 암석만을 떠서 표본으로 만들어 보존되고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61세 되던 명종 16년(1516)에 처음 세워졌으며 여러차례 중수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옆으로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으로 툇마루를 내어붙인 자그마한 한옥이다. 학문하는 처사의 서재답게 가식이 없는 목구조로 되어있다. 이 집의 네 기둥에는 조식이 회갑을 맞은 뒤 새로운 심정으로 이곳 덕산으로 들어와 자리잡고 살 때의 심경을 읊은 한시 德山卜居(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가 주련으로 달려 있다. 春山底處无芳草(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銀河十里喫猶餘(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산천재란 이름은 주역의 64괘 중 大畜卦에서 따른 것으로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제 스스로를 빛나게 하고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조식이 새로이 서재를 짓고 결심을 함축한 것이다. 또한 마루 위 토벽에는 벽화가 세 군데 그려져 있다. 현판 위의 그림은 隱者 네 분이 바둑 두는 청아한 모습이고, 오른편에는 소부와 허유의 고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선비가 밭을 가는 모습인데 조식이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과 실천위주의 학문관을 헤아리게 한다. 경내에는 앞뜰 대문 쪽으로 정면 2칸의 아래채가 있으며 뒤뜰 옆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 164호인 남명문집 책판을 보관한 판각이 있다. * 전설 하나 남명 선생은 산청 지방에서는 거의 신격화되다 시피한 인물이다. 그러한 관계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남명 선생이 67세 되던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셨는데, 서울 소식을 알 수 없던 남명 선생은 그날 산천재 앞의 덕천강변에서 꺽지회를 드시고 계셨다. 그 앞을 말을 거꾸로 타고 지나가던 오일봉이 말하기를 '산림처사는 국상이 나도 술이나 먹고 있는가?' 하자 깜작 놀란 남명 선생이 입속의 꺽지를 뱉고 일어서 곧 바로 북향사배하고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남명 선생의 입에서 나온 꺽지는 살아갔는데 그 이후로 덕천강 꺽지는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한 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새끼일 때는 양 눈이 멀쩡하나 철들만큼 크면 한 쪽 눈이 백태가 되어 있는 것을 필자가 확인하였다.) 다. 덕천서원(德川書院) 1576년(宣朝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光海君1)에 '德川'이라는 賜額을 받아 賜額書院으로 승격 되었으며, 그 뒤 崔永慶을 추가 配享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高宗5)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지방 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 경의당, 동재, 서재, 신문, 대문, 세심정, 산천재, 상실, 장판각, 별묘, 문루, 재실, 고사 등이 있고, 神道碑도 있다. 崇德祠는 3칸으로 된 사우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의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때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남명제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 4두이다. 이 서원의 유물로는 조식의 手描四聖賢屛風 외에 문집 약간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