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의 가치
김 경 숙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 찾아왔다. ‘지금 일어날까? 조금만 더 있어 볼까? 아침 반찬은 뭘 하지?’ 눈도 못 뜨고 머릿속은 여러 생각만 바람개비처럼 돌아간다. 결국 떠밀리듯 나와 창밖을 보니 하늘은 두꺼운 회색 구름이 몰려와 있다. 쌀쌀한 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현관에 미리 우산을 챙겨 놔야 할 것 같다.
현관 중문을 열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바닥에 반듯하게 깔린 신문지 위로 분홍색 보자기가 얌전히 놓여 있다. 서둘러 전화를 건다.
“언제 다녀가신 거예요?”
“안 그래도 문자 넣을라 했는데 벌써 일어났나? 깨울까 봐 현관에 두고 왔다.”
운동 삼아 다녀갔다고는 하지만 79세 친정엄마에게 버거웠을 텐데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다. 딸이 바쁘다고 번번이 우렁각시처럼 선물을 두고 가신다.
분홍 보자기 안에 있는 것들마다 엄마의 세심함이 스며있다. 빵과 떡은 손자들을 위한 간식이다. 초콜릿과 포도는 군것질 좋아하는 사위 먹으라고 넣으셨다. 두부, 손질된 멸치, 깻잎 김치는 딸의 반찬 걱정을 덜어주려 준비하신 것이다. 아직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새벽에 살며시 다녀가셨을 모습이 떠올라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삼 남매에게 무엇을 주시든 항상 보자기에 담아 주시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오십 넘은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챙기시며 더 많이 주고 싶은 마음도 켜켜이 넣었을 것이다. 바쁜 것을 핑계 삼아 자주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그리운 마음까지 꽁꽁 싸맸을 것이다.
예전부터 엄마는 보자기를 요모조모 잘 사용하셨다. 따뜻한 봄날 들에서 나물을 캘 때는 주머니가 되고, 시장에서는 시장바구니가 되고, 어린 우리에게는 공주 왕관을 만들어 주셨다. 종이 가방과 비닐봉지가 흔한 요즘이지만, 매번 빨아서 곱게 접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엄마가 싸 온 이런 보자기가 언제부터 쓰인 것인지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어 ‘복(袱)’과 ‘복(福)’은 같은 뜻으로 내용물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태어난 아기를 감싸는 ‘강보’, 한국인의 독특한 쌈 음식들도 보자기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전시회도 있다. 평범하게 여겼던 보자기가 새롭게 돌아 보인다.
보자기의 가치를 생각하며 내 마음 보자기를 돌아본다. 뜻이 다를 뿐인데 틀렸다며 상대를 밀어낸 적은 없었나?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과 편견만 싸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이해한다고 착각하며 좁은 품으로 감싸느라 버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뾰족한 것들은 넉넉하게 품어주고 넘치는 감정들은 싸매었다가 바람에 훌훌 털어 버리고 싶다. 상대에 따라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융통성도 발휘하였다가 역할이 끝나면 차분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기다리고 싶다.
나에게 보자기 같은 사람은 누구인지 찾아본다. 아직도 변함없이 큰딸을 걱정하시는 엄마는 분홍빛 사랑의 보자기다.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는 남편은 슈퍼맨 망토 보자기다. 엄마의 기분을 물어봐 주고 도와주려 애쓰는 아들들은 부드러운 비단 보자기다. 막히는 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을 뒤집어 주는 오랜 친구는 다락방에 숨겨둔 꿀 보자기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보자기는 못되지만, 넉넉하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이들이 많으니 조금씩 넓어질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자투리 마음이라도 다듬고 이으면 예쁜 조각보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보자기를 깨끗이 빨아 탁탁 털어 낸다.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맺혀 또로록 달리기를 한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지만,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이하는 것도 품어주는 마음 연습이라고 여기며, 보자기의 가치를 새로이 새겨보는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규방가사로 옮겨 본다.
진분홍빛 보자기속
선물들이 가득하네
늙은엄마 아픈다리
손수레를 친구삼아
이른새벽 몰래살짝
정성담뿍 두고갔네
철이덜든 딸이지만
그마음을 알것같네
두눈가득 그리웁고
두손가득 뜨거워져
고마운맘 감사한맘
갚을수도 없는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