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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12처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하였지만 어원 확인정도에서 끝나 처에 대하여 시원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가 쓰인 7주2처의 '무색계'란 어떤 경지인지 살펴보며 ' 처'의 순수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전재성씨의 12처 번역인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물,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실로 일체라고 부른다. ] 번역 될수 있는지 다시 살펴 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선에서 제 1처가 왜 쓰였는지, 무엇을 뜻하는지 올립니다.
처--처는 대상성이 배제된 식의영역 , 대상에 대한 의식이 들어오기전의 상태
제1처--욕계,색계의 의식의 바탕이 됨 (무상무각의 경지) -
제2처--공처,식처,무소유처의 바탕이 됨
--> 제1,2처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욕계,색계,무색계가 어떤 경지인지 알아야 이들의(욕계,색계,무색계)의 존재 가능케 하는 바탕(제1,2처)의 의미를 정확히 알수 있습니다.
[존재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바탕이 필요한것은 당연합니다.예)대상은 공간을 바탕으로 함]
(각주 - 한문,영문,팔리어 생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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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처설고 141P에서 발췌
.......물론 육입처는 안입처 내지 의입처이기 때문에 육근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타가 근이라 한지 않고 입처라고 한 까닭은 분명히 감각이나 감관을 뜻하는 근과는 다른 의미에서 안의비설신의를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 입처(ayatana)가 십이처 이외에 어떤 곳에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먼저 ayatana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ayatana는 무색계(arupya-dhatu) 사천인 공무변처(akasanancayatana), 식무변처(vinnanancayatana), 무소유처(akincannayatana), 비유상비무상처(nevasannanasannayatana)에 쓰이고 있다. 이와같은 무색계 사처에 ayatana가 쓰이고 있다는 것은
ayatana가 분명히 근(indriya)과는 동일한 개념일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들 사처를 고찰함으로써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중생계를 욕계(kama-dhatu), 색계(rupadhatu) 무색계(arupya-dhatu)로 나누고 우리가 사는 인간계는 세속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욕계에서 선정을 통하여 욕계천, 색계천, 무색계천으로 갈 수있다고 하고 있다 .
그런데 ayatana가 욕계천이나 색계천에는 쓰이지 않고 무색계에서만 쓰인다는 점에 우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점에 유의하면서 욕계에서 무색계까지의 설명이 잘 갖어진 중아함 대인경의 칠식주(satta vinnanatthitiyo)와 이처(Deve-ayatanani)에 대한 교설10)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칠지주와 이처를 정리하여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삼계 칠식주, 이처
욕계 (욕천)색중생,*신**상---------------------------------- 제1식주
(초선): 색중생, **신1상-----------------------------제2식주
(2선): 색중생,1신**상-------------------------------제3식주
색계 (3선): 색중생,1신1상--------------------------------제4식주
무상천(4선):색중생,무상무각--------------------------------제1처
공처:무색중생,도1절색상 *유대상 무량공처성취유--------------제5식주
무색계 식계:무색중생,도1절공처 무량식처성취유---------------------제6식주
무소유처:무색중생,도1절식처 무소유처성취유-----------------제7식주
비유상 비무상처:무색중생,도1절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성취유-----제2처
(더 자세한 도표는 초기불교 십이처설고를 참고 하세요)
위의 도표에서 우선 7식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기로하자.
칠식주는 일곱가지로(satta, seven) 식(vinnana)이 주(thiti)한다는 의미인데11) 여기에서 식은 중생의 분별망식이라 할 수있다. 그리고 주로 한역된 thiti(s.k.stiti)는 'standing, remaining, stay'의 의미로‘머뭄’의 뜻이다. 결국 3계는 망식이 머무는 방법에따랄 구별된다는 것을 위의 도표는 보여준다 할 수있다.
여기에서 제4식주(3선) 까지는 識이 身과 想에 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식이 그 인식의 대상에 머물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색계의 무상천(4선, 제1처)에서는 무상무각이라하여 식의 대상이 없어진다.
따라서 식은 색계에 머물되 대상이 없는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제1처 즉 ayatana라는 표현을 써서 식이 대상이 없는 영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1처에서 대상을 상실한식은 이제 색을 대상으로 했던 색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色想를 넘어서 유대상12) 소멸된 영역을 대상으로 머물게 되는데 이곳이 공무변처이다.
이와같이 무색계는 어떤 한정된 대상(유대)을 초월한 영역으로 식이 머문다는 의미에서 ayatana가 쓰이고 있다 전술했듯이 ayatana는 'place, abode'의 뜻으로 들어가서 머무는 장소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13) 이 표현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비유상비유상처에 이르면 무상천과 마찬가지로 식주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제2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마 색계의 무상천에서 식이 색계에 머물되
그 대상이 사라진 상태에서 머물렀듯이 식이 무색계에 머물되 무색계에서 대상으로 취했던 공간,의식,무와 같은 무변하고 무제한적인 개념조차 사라진 (비유상비무상)상태에서 머문다는 의미에서 일 것이다 . 결국 비유상비무상처도 극복되어 멸진정을 증득해야한다고 설해지고 잇는데14) 이는 망식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가운데 망식의 근원적 의지처를 비유상비무상처로 설정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이상의 고찰에서 주와 처의의미는 드러났다고 생각 된다. 즉 주는 식이 어떤 대상(그것이 욕계에 속하든 색계, 무색계에 속하든)을 가지고 있을 때 사용되는 개념이며 처는 대상이 배제된 상태에서 식이 머무는 영역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한계가 없다.
특히 제1처와 제2처에서 알 수 있듯이 처는 대상성이 배제된 식의영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ayaytana를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 할 때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의 발전을 욕계에서 애욕(kama)이 배제되어 색계에 이르고 색계에서 외부의 대상이 배제되어 무색계라는 순수한의식의 영역에 이르는 근원적 의식으로의 환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Husserl의 현상학적 환원(Phonomenologisch Reduktion)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된다. Husserl은 자연적 태도에서 성립하는 세계를 사실의 세계라고 하고 판단중지를 통해 본질 즉 형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형상적환원(eidetisch Reduktion)을 제 2환원이라하며 다시 초월적 존재가 배제된 선험적환원(tranzendentale Reduktion)을 제 2환원이라고 하는데
전술한 제1처(무상천)와 제 2처(비유상비무상처)는 제 1환원과 제2환원과 매우 유사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제 육근과 육입처의 의미는 확실히 드러난다.
육근은 욕계의 중생들이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연적 태도에서 인식된 우리의 감관과 마음이고 육입처는 자연적 태도에서 벗어난 대상성이 배제된 본질적이며 무제약적인 의식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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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처
사선의 성취를 통해 도달한 제1처는 욕계와 색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의 바탕이다. 욕계와 색계에서의 모든 의식 즉,고락등의 감정(수), 기쁘거나 슬픈마음(희비심), 대상에 대한 갈애(애)와 욕구, 그로 인한 취착(취) 등은 그 근원이 제일처에 있는 것이다.즉 육근이 외부의 대상과 접촉하기 있기 때문에 이들이 생긴 것이다.따라서 색계에 대해 발생한 의식들에 의해 존재로 전환한 육계의 모든 존재는 이 접촉의 영역(촉입처)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어떤것이 의존하고 있는 바탕이 되는 영역을 불타는 처(입처,처,ayatana)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ayatana는 a-yata(들어가다, enter,도달하다.arrive,머물다.abide0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중성 추상명사로서 본래는 '어쩐목표에 도달하여 들어가 머물게 된 장소)를 의미한다.
이같은 본뜻에서 ayatana는 휴식처(resting), 토대(support), 고향(home), 집(house),거주처(abode),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장소 (place) , 영역(region,sphere)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타가 사선의 경지에 이 개념을 사용하여 제1처라고 하고 있는 것은 불타가 욕계가 ' 촉'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타가 '촉'에도 처라는 새념을 사용하여 '촉입처'(phassa-ayatana)라고 하고 있는 것은 (잡아함경209경) 촉이 이와같이 욕계의 토대가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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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처
(무색계)-제5식주인 공처는 무량무변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의식상태이다.공처정은 이같은 의식상태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다. 공간이란 전술한바와 같이 색의 없음이다.
즉 감각적으로 지작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량무변한 존재이다. 이와 같은 공간에 대한 인식의 내용은 어떻께 생긴 것일까? 공간은 지각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공간에 대한 지식은 지각을 통해 성립 된 것 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고 공간이 무량무변한 존재라면 이같은 지식은 경험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유한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색이 지각되지 않을때 우리가 갖게 되는 관념이다.즉 우리는 색이 지각되지않을 때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색을 유한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색의 없음'즉 색과 대립되는 개념에 대하여 무량무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이 같은 관념을 일으키는 의식이라 할수 있으며 이같은 자각을 통해 공간에 대한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나 의식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제 7해탈의 경지(대인경)인 식처의 성취이다. 이곳에서도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곳이 공간의 바탕이기 때문이다.(대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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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식연기설중..
불타는 스승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사유를 하게 된다. 사무색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이란 처, 즉 ayatana의 세계이다.
처는 전술한바와 같이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그 존재가 의존하고 있는 바탕이 되는 되는 영역을 의미한다. 사무색정은 그 존재가 바로 이같은 처에서 시작한다. 사무색정이 행해지는 무색계를 공처,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라고 하여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전술한바와 같이 불타가 색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생각한 가운데 식을 벗어날수 없었다. 우리가 욕탐을 벗어난다해도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는 의식은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kamasava는 벗어 났지만 bhavasava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첫번째 스승으로 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불타는 크게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경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이 곧 식을 벗어난 경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타가 스승을 삼아 무소유처를 목표로 수행한 이유를 이와같이 생각할 수 있다.
존재가 의심된다면 그 존재인 바탕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을수 없다.처'가 문제되는 것이다.불타에게 문제되는 것은 색계의 존재이다.색계는 무엇을 의지 하고 있는 것일까?
색계는 공간속에 존재한다.만약 공간이 없다면 색계는 존재 할 수가 없다. 이같은 사유를 통해 불타는 공간이 세계의 바탕즉 처(ayatana)임을 자각하고 모든 색상을 초월하여 색계에서 벗어날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고찰했듯이 공간의 바탕은 의식임을 깨달아 식처를 성취하고, 다시 식처에서 사유를 통해 무소유처를 성취한다.
그렇다면 불타는 왜 무소유처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첫댓글 처를 단순히 본문 제1처에서 말하는 [모든 의식세계의 바탕]말그대로 받아드리면 전재성씨의 12처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물(?)]도 충분히 상상 할수 있습니다.그러나 제 1처는 욕계,색계 의식의 바탕 입니다. 즉 욕계와 색계가 의지 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 2처는 공처,식처,무처의 바탕이 됩니다.무색계(중생망식)의 의식 영역이 어떤 상태인지 염두하고 생각해보면서
[처는 자연적태도를 벗어난 대상성이 배제된 본질적이며 무제약적인 의식의 영역이며 의식내부를 관조함으로써 드러난 존재의 본질적 바탕에 사용된 개념.....]를 보면 단순한 법문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12처는 범부가 알수 없는 법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육입을 무명에 근접하게 생각합니다. 의와법 을 이해하기 위하여 처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먼저 처의 내용을 올렸습니다.
색계가 공간속에 존재한다면 역으로는 공간속에 색게가 존재한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네요 앞만보면 색계가 공간속에 존재하고 뒤를보면 공간속에 색계가 존재하네요 불타가 그랬을까요 ? 처라는 개념은 완전히 성취함을 처라는 개념이더군요 예를들면 색계는 탐심 진심 어리석음이 소멸하는 곳처인데 완전하게 벗어났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면 처라는 개념으로 정립이 되여 있더군요 아함경에 있는데 나중에 필요하시면 올리겠습니다 다시는 그와같은 번뇌가 없음을 요달한 경지 처라고 설명하더군요
^^본문의 공간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emptyness)'이 아닌 공간(space)입니다. 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잘못 하겠네요.죄송하게 자운행님의 언어를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공간속에는 유위조작이 있으니 조작을 버리면 공이 되니 뜻은 같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사유하신 부분이 알맞게 진행되여지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공간속에 12처의 활동의 육경이 떠나게 되면 곧 공이 되는 것이지요 12처는 연기를 닦으면 범부가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속에는 12처가 있습니다 18계는 그들의 본성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구요 처의 이해는 제가 글을 정리하지 못해서 그럴겁니다 이해합니다 더 들어가면서 나누어보면 되겟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