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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히브리서 8장 6-7절
제목: 새 언약
오늘은 언약에 대해서 말씀을 좀 나누길 원합니다. 우리가 언약이란 단어를 많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언약에 담겨있는 메시지나 뜻을 알고 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언약에 담겨 있는 내용이 얼마나 우리에게 귀한 약속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 원합니다.
계약이란 단어와 언약이란 단어는 다릅니다. 계약은 당사자들 사이에 법적인 의무사항이지만 언약은 도덕적 의무와 영적 의무를 가집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또한 그의 후손들과 맺으신 옛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으신 새 언약입니다. 언약에 두 가지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단지 모형과 그림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옛 언약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중심입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짐승의 피는 죄를 완전히 없애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바로 옛 언약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약을 이해할 때 히브리적 개념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이 동양권에 속해 있으니까 동양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언약의 히브리어 단어가 ‘베리트’입니다. 이 단어는 ‘족쇄를 채우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히브리어의 어근에서 나온 말인데, ‘쪼개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부터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언약을 맺으면서 쪼개진 고기사이를 지나가는 절차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고기를 쪼개면 피가 나오게 되어있지요. 그리고 베리트의 더 정확한 의미는 ‘피가 나올 때까지 베다’입니다. 피가 충분히 나올 만큼 깊게 베야합니다. 이렇게 언약의 중심에는 피가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이나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피에 대한 개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이나 동양권의 사람들은 피가 없으면 언약이 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을 체결할 때 베는 것으로 서로 보증을 섰기 때문입니다. 왜 계약을 이렇게 무식하게 하느냐고 서양 사람들은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이 피의 보증은 언약의 당사자들이 합의된 내용에 발을 빼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장치입니다.
결론은 피가 없으면 언약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약이 훨씬 동양적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언약관계를 맺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각각 자기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까지 한 손바닥을 베고,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서로 합쳐서 피가 섞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벤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은 서로 피로 맺은 형제지간이 됩니다. 이것은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 사이에 어떤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상관없이 서로의 안녕을 위해 평생 노력하겠다는 헌신과 의탁 혹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손목을 베고 피를 나누는 경우고 있고, 손목이나 손바닥에서 피를 내어 그것을 포도주에 섞어서 마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의 언약을 맺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없는 동물을 희생시켜서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당사자 대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첫 번째 언약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점이나 흠이나 장애가 없고 무죄한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그 백성들의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로 언약을 세워야하는 모형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나 국가가 세우는 언약과는 달리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우리의 개입이 전혀 없이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언약관계를 시작하시고 규정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정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구약의 언약인 ‘베리트’와 신약에서 헬라어 단어인 ‘디아데케’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 ‘디아데케’의 단어는 ‘본인이 죽은 후에 자기의 재산을 본인의 뜻대로 나눠줄 것을 밝히는 유언’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디아데케’는 유언한 장본인이 죽은 후에야 이미 작성된 유언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는 것이니까 ‘전적으로 일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나 서로 책임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단 우리가 그 계약관계에서 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 분을 향한 충성과 순종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유일한 언약은 피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과의 동반자적 언약에서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됩니다.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체 먹지 말 것이니라’ 그리고 한 참 후에 레위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생명은 피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희생제물의 피는 그 피 안에 있는 생명이 죄를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에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피는 두 당사자들의 생명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피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결국 언약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며, 서로가 책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로가 생명이 섞이게 되니까 서로가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언약의 대상을 공격하면 상대방의 언약자를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서로 생명을 의탁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서로가 하나이며 그 생명의 언약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언약을 맺게 되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피로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 때문에 주님이 가지신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그 언약관계는 동시에 예수님의 관심과 우선순위가 바로 우리의 우선순위와 관심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관심과 우선순위를 위해 부름을 받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피 흘리신 것은 자신의 피와 우리의 피를 섞은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엄청난 결과를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동등한 지위와 입장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누릴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누립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우리가 소유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릴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를 쏟으시고 일방적으로 맺은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비밀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를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묶으시는 가족 같은 관계를 성립시켰습니다. 물론 옛 언약이 성립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동일한 약속을 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의관계가 아무리 인격적이라 할지라고 대등한 것으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적인 입장에서 믿음은 우리가 믿은 믿음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실체 내용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히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차이가 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구약의 믿음의 형태는 시편 103편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 자기를 경외하는 자는 불쌍히 여기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충분합니다마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사랑하셨느냐 하는 내용의 실체는 신약에 와서야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하나님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구약에서는 외적인 으로 관섭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이 되시고,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시는 등 외부적 인도였습니다. 성경표현대로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라는 말씀처럼 가깝고도 직접적인 인도였지만 어쨌든 외부로부터 인도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마음속으로부터의 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인도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 되게 하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성품과 인격으로 가지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로 맺은 언약의 관계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가?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관점에서 설교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은밀히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는 차원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 소원이 되는 존재,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인격으로의 변화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야하는지에 대해서 언약적 차원에서 이해하지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피로 맺었음을 항상 주시하십시오.
요한복음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구원하였다 언약을 맺었다 하는 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고 말을 잘 들음으로써 복 받는 백성이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을 내가 소유하고 싶어서 치르는 대가와 그 물건값은 대등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 백성으로 계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와 예수그리스도가 그 가치에 있어서 대등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일 우리를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 종 정도로 쓰려고 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대가를 치루시고 언약을 세우고 구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고 언약을 세우신 것은 여기 나오는 대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동등하고 동질인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런 인격적인 차원에서 사랑과 신뢰의 대상으로 동등하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하면 복 받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면 벌 받는다는 것에서 더 깊은 메시지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도 많이 하고 능력 있는 어떠어떠한 업적도 남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마는 그것이 종으로서 해야 하느냐, 아니면 피로 맺은 연합의 관계에서 그 분의 소원을 이루고 계획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 일이 내일이고 내가 감당해야 된다는 뜻에서 그 일을 하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26절 이하를 좀 봅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언약을 세운 것에 대해서 아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주지 않겠느냐, 네가 예쁘게 굴면 주고 밉게 굴면 안 주더냐 이것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못쓸 짓을 하고 들어와도 때 되면 밥을 줍니다. 교훈을 위해서 굶기는 수는 있지만 자식을 죽어라고 굶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들이 속상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안 먹어서 걱정입니다. 챙겨주지 않아서 걱정이 아니란 말입니다. 먹을 것을 숨겨놓고 몰래 먹는 부모들 있습니까? 짐승도 그런 짓 안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십시오. 새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새도 먹이시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말입니다. 하다못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우리를 그냥 두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지위와 신분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들이 종의 입장에서 무엇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이란 뜻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위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머리고 교회가 몸이며 우리는 각 지체입니다. 연합되어 있단 말입니다. 대등한 관계란 말입니다. 한 쪽이 기울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과 우리는 신분상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 차원에서 대등하게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하라 복종하라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에 순종과 복종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사랑부터 하면 싸가지가 없어집니다. 예의라는 것은 없고 자기마음대로 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매도 들고 잔소리도 하고 복종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모든 것이 자식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사랑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전도를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부름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충성을 다 하는 것은 종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지금도 주님의 위치와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관점에서 하는 것입니다. 심부름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해 주었으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전도대상자의 명단을 제출하세요. 전도부에 들어와서 그 일을 감당합시다. 하는 것은 헌신할 종을 찾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피로 언약을 맺었기에 주님의 일이 나의 일이란 말입니다. 그 일을 하는 대에 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임합니까?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것이 내 것입니다. 그 일은 믿음 좋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피로 맺은 형제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의 자매가 미국에 유학 간 사람과 결혼을 하게 돼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요일4:18을 축전으로 보냈는데 우체국의 실수로 요4:18절로 전달되었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후 부부가 된 이들이 목사님 축전부터 보려고 얼른 요한복음 4:18을 찾았더니 ‘여인아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라’가 아니겠습니까? 평생 안 잊어버릴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대등한 위치까지 격상시켰습니다. 그것이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 질병, 장래, 자녀 모든 것을 하나님이 피로 맺은 형제와 같은 입장에서 돌볼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언약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약속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금식을 했다든가, 금요심야예배를 드렸다든가, 전도를 했다든가, 봉사를 했다든가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우리의 일이요, 그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감당하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차원에서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세우시고 지금도 그 언약이 유효하게 우리의 삶을 주도하고 계신 줄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우리의 일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동일하다는 것을 언약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