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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찰생태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두레 조채희
* 여기에 올리는 답사자료들은 김재일 선생님이 1991년 두레문화기행을 창립해 답사를 다니면서 작성한 것입니다. 2000년 전후에 작성한 자료이기에 오늘의 모습과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찰 외에 이 지역의 다른 문화유산을 알아보시려면 두레 카페로 가보세요.
* 불갑사 불갑산을 일명 모악산이라고도 한다. 불갑사의 창건연대는 아직 오리무중에 있다. 영조 때 세웠다는 사적비에는 창건연대가 미상으로 나와있지만, 백제불교 유래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은 마라난타가 남중국 동진(東晉)에서 서해 바다를 건너 가까운 법성포로 들어와서 불교를 전래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백제 침류왕(384년) 때 ‘왕이 교외로 나가 스님을 맞아 궁궐로 안내하고 예경한 뒤 다음 해 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을 출가시켰다’고 했다. ‘法聖浦’라는 지명도 불교도래사와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법성포의 옛 지명인 ‘아무포(阿無浦)’도 ‘나무아미타불’을 연상케 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호남의 3갑사(도갑사, 봉갑사, 불갑사)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때인 1341년 각진국사가 머무르면서부터 크게 번창했다. 각진은 송광사 보조지눌 후계 13세주의 한 사람으로 선에 능했다. 불갑사는 그 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불갑사를 ‘도갑사’로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 그의 오류일 것이다. 산문에 들어서면 천왕문 앞의 돌계단이 인상깊다. 사천왕상은 신라 진흥왕 때 화엄사를 창건한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조성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북 무장의 연기사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흥왕 당시 무장은 백제땅이며, 사천왕상의 재질이 은행나무인 것을 보아 신라 때 조성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이 사천왕상 복장에서 국보급 문화재들이 나와서 매스컴을 탄 적이 있었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월인석보(月印釋譜)> 2권과 <금강경(金剛經)> <수륙무차평등제의(水陸無遮平等祭儀)> 등 50여권의 국보급 고서가 나온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만세루. 불갑사 현판글씨는 근대여성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김진민(金眞珉)이 열한살 때 쓴 글씨이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찬 기를 느끼게 한다. 아홉 살의 나이를 시작으로 그 유명한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서 스무살까지 연이어 특상을 한 보기 드문 근대 여류서예인이다. 신사임당에 버금간다는 그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선전에 특상을 받기도 했다. 남성미를 보여주는 그의 글씨는 금산사, 내장사, 백양사 등에 많이 남아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대웅전․팔상전․칠성각․일광당․명부전․만세루․보광전․산신각 등이 펼쳐져 있다. 이 절의 백미는 역시 보물 제38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이다. 네 개의 두리기둥 위에 다포를 놓고 팔작지붕을 얹은 매우 화려한 집이다. 게다가 정면에 연꽃과 국화를 새긴 꽃창살까지 붙여서 한껏 치장을 했다. 옆면에까지 토벽으로 마감하지 않고 전체에 문창호를 달았다. 극락전과 약사전이 따로 없다보니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석가모니의 집인 대웅전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런데 불상들이 모두 옆면을 향하고 있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런 예는 영주 무석사 무량수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범어사 극락전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설법공간 확보를 위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불상이 앉은 화려한 수미단, 불상위 닫집과 이어진 기둥에 조각되어 잇는 작은 동물상,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목각 동자상, 성기(性器)가 볼 만한 목각 사자상도 답사객들의 눈길을 한참이나 끌게 한다. 대웅전 뒷벽에 까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하는 설화에, 대웅전 꽃창살을 만들던 한 목공이 자기가 불사를 하는 동안 여자가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부탁했으나, 호기심이 동한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순간 목공이 까치로 변해 푸드덕 날아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불상 뒷벽에 까치 그림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대웅전 지붕에는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새긴 삼존불대가 있는데,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상이다. 용마루 한가운데 도깨비상을 한 기와가 앉아있다. 그 유래나 용도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개 와가의 지붕 위에 있는 장치들은 거의가 화마(火魔)를 막는 벽사물이다. 이 절의 것도 그와 같은 용도로 세웠을 것이다. 대웅전 뒤로 올라가야 잘 보인다. 그리고, 이 절에 오면 각진국사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 112호 참식나무와 가을에 피는 상사화를 보고가야 한다.
* 고막다리 고막다리는 함평읍에서 3번 국도를 타고 좀더 내려와서 무안과 나주를 잇는 1번 국도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10여분 거리에 있다. 새로난 다리께에서 불과 1백미터 거리 들녘에 있다. 어린시절, 비오는 날이면 방에 엎드려 지도를 펴놓고 지명을 찾는 놀이를 즐겨했는데, 그 때 전라도 어디에 ‘학교’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고는 재미있어했던 적이 있었다. ‘학교초등학교’ ‘학교중학교’...하며 즐거워했던 일이, 그러나 벌써 40년 저쪽의 일이 되었다. 그 때 그 학교가 바로 고막다리가 자리한 함평군 학교면이다. 우리나라에서 다리가 처음 건설된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가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당시 다리의 축조는 국가정책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고대 돌다리는 홍예교와 돌널판다리가 대표적이다. 기록상 최초(413년)인 평양주대교는 돌널판다리이며, 750년 김대성이 세운 불국사의 청운․백운․연화․칠보교는 최초의 무지개형 홍예교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리로는 개성 선죽교가 있는데, 이 다리는 돌로 만든 단순교로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이곳 고막다리는 한강 이남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다리이다. 조선시대(1420) 다리인 서울의 살곶이다리[箭橋]는 당시로는 가장 긴 다리였다. 청계천에서 장충단으로 옮겨진 수표교는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고학적인 설계로 지은 다리이다. 그 밖에 충남 진천의 농다리, 충남 논산의 원목다리, 강경의 미내다리, 보성의 벌교, 창녕의 만년교 등이 이름나 있다. 수문 역할까지 겸한 수원의 화홍교 등이 있다. 근래 와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우리나라 다리가 있다. 이름하여 성수대교! 고막다리는 고려 원종 15년(1274) 무안 승달산의 법천사 스님인 고막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이 다리는 당시로는 흔치 않은 돌널판식 돌다리이다. 20미터 길이에 폭은 1.8미터, 높이는 2미터 남짓하다. 다섯 개의 교각 위에 넓고 두꺼운 돌판자를 마루장 깔 듯 걸어서 얹은 다리이다. 이 다리는 고막대사의 애민(愛民) 보살행 때문인지 해마다 겪는 홍수에도 7백년 넘도록 끄덕없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떡장수들이 지나다녔다고 해서 떡다리라고도 했다는 이 다리는 인근에 새 길이 나면서 그만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도 눈앞에 턱하니 새로 세워진, 언제 성수대교 꼴이 될 지도 모를 시멘트 다리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 총지사 절터 무안읍에서 장승으로 유명한 총지사 절터까지는 811번 지방도를 타면 10여킬로미터 남짓하다. 몽탄역을 1킬로미터 가량 남겨두고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총지사의 역사는 그 옛날 신라 성덕왕 때, 이 마을 승달산 기슭에 총지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초까지만 해도 승려들의 숫자가 8백을 넘는, 전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었다고 한다. 조선 순조 임금 때, 임씨 성을 가진 양반이 있었다. 그는 집안의 영화를 위해 풍수의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묘를 절터 뒤에다 몰래 썼다. 그러자 스님들이 알고는 산소에다 참나무 말뚝을 박았다. 권세께나 했던 임씨 양반이 그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절에 불을 질러 태우고 스님들을 내쫓아버렸다. 이러한 전설 끝에 사라진 총지사의 옛 터는 이제 한적한 시골로 변해버렸다. 행정상으로는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당시의 주춧돌이 채전밭에 묻혀 있다. 마을 입구에 석장승 2기만이 울먹이는 얼굴로 그때를 되새김질하며 마주 서 있다. 총지사 장승은 땅에 하반신을 묻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키가 작다. 할아버지는 살이 붙은 삼각형 얼굴에 둥글게 튀어나온 눈이 좀 치켜올라가서 고집스럽게 보인다. 벙거지를 쓰지 않은 민머리에다 뭉퉁하고 힘 있어 보이는 코, 꾹 다문 입에 긴 수염을 달고 있다. 할머니 장승도 자연석에 얼굴만 가꾸었다. 할아버지보다 각이 덜 져있어서 한결 여성답다. 우승보와 강정환이 기념사진 찍는다고 그 앞에 나란히 앉았다. 못난이들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이나 장승이나 같다. 찰칵. 인근 법천사 터에도 장승이 있다. 이곳 장승들은 비교적 키가 작은 편이다. 불교탄압으로 사라진 총지사터를 나와 자산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5백년의 불교탄압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은 고려말로 올라간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급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성리학을 무기로 수구세력과 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辯)>을 통해 불교의 교리를 성리학으로 비판하였다. 배불유림들은 불교를 공격하여 고려지배계급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사찰토지 및 사찰노비를 몰수하기 시작했고, 폐지하고 도첩을 소유치 못한 승려들은 모두 강제환속시켰다. 이때 무학의 제자인 함허대사가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저술하여 배불정책의 과오를 지적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세종은 도성 안에서의 독경행사를 폐지하였고, 성종은 사대부의 강요로 불경을 펴내던 간경도감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믿는 신하들을 드러나게 미워하였다. 폭군 연산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를 주연을 위한 기방(妓坊)으로 바꾸고, 비구니들을 관아의 노비로 환속시켰다. 중종은 각 지방의 폐찰토지를 향교재산으로 귀속시키고, 도성 밖 비구니 사찰은 유생들이 분배해서 가졌다. 영정조시대에 들어서는 능묘 부근에 사찰 창건금지, 원당제도 금지가 뒤따른다. 이러한 배불정책에 기대어 지방 유림들의 횡포가 날로 극심했다. 현종 때는 세도가문이던 민씨네가 문중의 장지를 마련키 위해 안성 칠장사를 불태우고 주지를 분살(焚殺)하였다. 풍양 조씨네들에 의해 절터를 빼앗긴 충남 용봉사, 풍천 임씨들의 훼방으로 폐사된 보은 만세암, 밀양부사의 묘소로 바뀐 창녕 보림사, 절을 뜯어 마을 서당으로 쓴 임실 수락사, 홍릉의 재각을 짓기 위해 뜯겨나간 봉인사와 부도암, 절을 불 태우고 권씨 묘소를 쓴 임실 선압사, 남원의 유생들에 의해 방화된 남원 실상사... 5백년 동안의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지금껏 용케도 살아남아 있고, 유교는 거의 궤멸한 상태이다. 유교는 성균관과 몇 군데의 서원을 빼고는 거의가 개점 휴업 상태이다.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마당에는 잡초가 그득하며 기왓골에는 이끼만 쌓이고 있다. 답사객들조차도 유교의 유적들을 별로 즐겨 찾지 않는다. 불교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불교는 처세학문이었던 유교(儒學)와는 차원이 다른 종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은 그런 면에서도 학문에 앞선 생명력을 지닌다. <불씨잡변>이라는 논저를 통해 불교의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여 우리 역사에서 가장 뚜렷한 배불의 족적을 남겼던 정도전도 나이가 들어서는 불교쪽 정서에다 자신의 노후를 맡기고 있다. 그가 남긴 시 <山中>이라는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護竹開迂逕 대나무를 심어놓고 길을 돌아내고 燐山起小樓 산이 좋아 작은 정자 하나 지었더니 隣僧來問字 이웃마을 스님이 글 물으러 와서 盡日爲相留 하루종일 서로 이야기 나누었네 弊業三峰下 학문을 폐하고 삼봉산에 들어와 歸來松桂秋 송계마을로 돌아와 노후를 맞네 家貧妨養疾 가난해서 약도 못 먹지만 心靜足忘憂 한가한 마음으로 시름을 잊네 해우(解憂)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 했지만, 속세를 떠나 마음을 다스려 평안에 이르고자 하는 노후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