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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계 유호인 선생의 시문학 소고 -역사상 가장 대우받은 시인-
김 성 진
Ⅰ. 들머리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은 조선 성종 때의 대문장가로서 특히 아름다운 시문(詩文)으로 인해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대우를 받았던 인물이다. 관직에서 당상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충효와 시문과 필력이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이라 일컬었고 우리 역사상 왕으로부터 가장 우대와 사랑을 받고 많은 포상(褒賞)을 받은 시인(詩人)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스승보다 15세 아래인 그는 스승을 깎듯이 존경했지만 점필재는 그의 빼어난 학문과 사상, 그리고 그의 필력으로 인해 학문의 동지로 혹은 벗으로 대했다고 하며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천거로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6명 중의 일인이다. 점필재로부터 귀재(鬼才)라는 극찬을 받은 사신(詞臣)이며 강희맹(姜希孟)과 성현(成俔)도 뇌계의 시를 “시문의 문체나 말의 수식이 웅혼하고 시경의 아송(雅頌)을 터득한 모범적인 시”라 하여 그 진가를 높이 평가했다.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가치관 아래 인생의 진실을 어떻게 추구했으며 자신의 인생관을 어떻게 발산하려 노력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시문학을 통해 고찰해 보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문학사적 시야에서나 시사적(詩史的) 측면에서도 조선 초기의 한문학의 단면을 조명해보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뇌계의 시는 지금까지 200여수가 전해져 왔다. 그런데 십여년 전 일본에서 창평판학문소소장(昌平坂學問所所藏) 10703호 <뇌계집>을 발견하였다. 정유왜란 때 왜군이 탈취해간 것으로 짐작되는데 5언소시가 9수, 7언소시가 429수, 5언고풍이 72수, 7언고풍이 60수, 5언율시가 127수, 7언율시가 186수, 산문이 36편으로 도합 919수가 있다. 먼저 뇌계의 생애를 간략하게 더듬어 보고 그의 시문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뇌계의 삶
㈎ 문헌 속의 뇌계
뇌계의 선조는 신라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고려에 불복하여 기계(杞溪)로 유배되어 그 후손들이 대대로 거기에 살면서 본관을 기계로 하였다. 그 후 고령(高靈)으로 이거하여 대를 이어 살았으며 뇌계의 조부가 장수(長水)로 옮겨 살았다. 그의 아들 음(蔭)이 함양의 형곡(荊谷)으로 옮겨 살았으며 여기에서 1445년 뇌계를 낳았는데 뇌계는 대관림 즉 대덕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1462년(세조8) 17세 때 생원.진사 양시에 급제하였고 1472년(성종3) 김종직의 제자로 들어가 2년 후인 성종5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며 성종 7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원하여 거창현감으로 갔는데 거창에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루고 상경하였다. 성종 17년 홍문관 교리가 되고 왕이 문신도시(文臣都試)를 베풀어 관리들이 글을 지었는데 뇌계가 장원하여 표창을 받았고 사은시(謝恩詩) 배율(排律) 12운을 진상하여 또 큰 보상을 받았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다시 외직을 원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세계록(歲季錄)을 지어 바치니 왕이 기뻐하며 어머니 봉양을 위해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글을 지어올려 진사(陳謝)했는데 그 글이 심히 아름다웠고 왕이 매월 정기적으로 글을 지어 바치라 하였다. 임기후 서울로 돌아와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다시 외직을 희망하여 임금이 진주목사를 제수하라 하였으나 전조(詮曹)가 왕의 좌우에 있어야 한다며 위헌이라고 하여 보내지 않았는데 계속 임금께 간청하여 합천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합천군수로 부임한지 한달여만에 졸하니 당년 50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임금이 하사한 부의물(賻儀物)로 장례를 치루었으며 그의 유고(遺稿)들은 아들의 동년배(同年輩)들이 힘을 모아 문집을 발간하였다. 묘비는 아들의 동년배요 후임 군수로 부임한 어득강이 비문을 짓고 비를 세워주었다.
㈏ 성종실록에서
성종실록에 보면 원전 9집 352면에 의정부와 이조에서 사가독서할 문신을 뽑았는데 채수, 권건, 허침, 유호인, 조위, 양희지 등 6명이었다. 원전 10집 692면과 693면에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유호인과 조위의 시를 책으로 만들어 올리라고 했고 경연관(經筵官)에 오래 있었는데 외방에 나가 있으니 왕이 학문과 문학을 숭상하고 장려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경상도관찰사에게 서책을 내려 표창하도록 하고 그의 어버이에게 쌀과 콩 15석을 주라 하였다. 원전 11집 47면에는 문신 70명에게 배율(排律) 10운(韻)을 짓게 하였는데 유호인이 장원하여 녹라(綠羅) 한필을 내려주었다. 동 176면에는 유호인을 어버이가 있는 고을 가까운 곳에 수령을 제수하게 했고 동 190면에는 여지승람을 편찬하여 김종직에게는 초록단자(草綠段子) 한필을 이의무, 최부, 유호인, 이창신, 신종호에게는 녹피(鹿皮) 한 장씩을 하사하였다. 동 390면에는 경상도관찰사에게 쌀 4석, 황두 2석, 식염 5석, 미역 1상자, 청주 10병과 건어물과 태(苔)를 갖추어 주라고 하였다. 동 577면에는 의성현령 유호인이 지은 시고(詩稿)를 바치니 음식물을 전례처럼 갖추어 주라 하였다. 원전 12집에는 외직으로 가기를 원해 끈질긴 간청 끝에 합천 군수로 부임한 일과 얼마 안되어 죽은 내용과 부의물로 쌀과 콩 15석, 유둔(油芚) 3사(事), 종이 70권, 석회 20석을 주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시문학과는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곳곳에 유호인에 대한 내용과 유호인이 경연(經筵)을 마치고 아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성현의 뇌계시집 서문, 강희맹의 송유수찬 귀양서, 임훈과 어세겸의 행장, 어득강의 묘갈명 외에 홍귀달 김일손 권오복 조위 등 18명의 만사와 제문을 종합해보면 속세를 벗어난 풍류인으로 시문불사(詩文不死)의 신념에서 살았다. 오묘하고 모범적인 시를 써서 웅장하고 맑으며 아송(雅頌)의 유음이 있다. 조탁(造琢)의 비범으로 인해 유미적이고 다정한 느낌마저 풍긴다고 말하고 있다.
Ⅲ. 뇌계의 시문학
뇌계는 부귀공명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산수, 속세를 벗어난 곳에서 혹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시를 창작해 나간 천재적 시인이었다. 가정에서는 과부가 된 두 딸과 어미를 잃은 두 손자를 양육하고 있는 노모를 봉양해야 했다. 아내조차 일찍 세상을 떠나고 노모에게 짐을 맡겨 부담감이 컸고 신체상으로는 다병조로(多病早老)하여 항상 마음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불우한 선비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인 성리학은 인간 내면의 진실성과 엄숙성을 요구하는 도덕적 순수와 순결성을 간직해야 하는 당위성마저 안고 있었다. 이렇게 복합된 여러 요인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시문불사(詩文不死)의 굳은 신념으로 아름다운 시를 표출시켜 나갔던 것인데 그의 빼어난 점을 더듬어보고저 한다.
㈎ 서정적 탐미시(眈美詩)
뇌계가 점필재를 사사(師事)한 이래 20여년간 훈도와 시문화답이 있어서 학풍이나 시풍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뇌계는 스승 점필재와는 많은 이질성을 가지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점필재는 서사적 사실적인 서술경향이 있고 사회적 비판의식이 강한 외향성을 띠고 있는 반면 뇌계는 서정적 자성적 내면성을 띠어 온건한 표현이 퍽 대조적이다. 그는 자기 성격에 맞는 우아하고 심오한 서정시를 써서 세류에 휩싸이지 않고 유미(柔美)세계로 흐르면서 독자적 은유법을 써서 일종의 허구시(虛構詩)를 구축가기도 하였다.
옥으로 만든 듯한 금당, 기와 이은 두둑도 높디 높고(玉室金坮瓦瓏危) 소나무 삼나무 가지의 틈새 구름도 바깥담같이 둘러 있어(松杉罅處雲罘罳)
단풍잎으로 산도 어지러이 가을이 남았는데(亂山黃葉秋殘後) 가랑비 오는 석양길에 나그네가 올 때(細兩斜陽客到時)
밝은 달은 한 쪽에서 나무꾼을 읊조리듯 비추고(明月一方吟宋客) 푸른 이끼 서린 가는 길에 한서의 비(碑)가 누워 있다(綠苔微逕臥唐碑)
이 사이에 견디어 소부와 허유처럼 귀를 씻으니(是間堪洗巢由耳) 골짜기 속에서 내려가게 해서 못에 그림자 움직인다.(洞裡須敎下닙池) - 與曺大虛遊斷俗寺 -
이 시는 가장 아름답게 꾸민 공간, 가강 적당한 시간을 포착한 탐미시(眈美詩)로 볼 수 있다. 옥실금대와롱은 미(美)의 극치를 이루는데 주위의 배경 또한 가을의 석양을 묘사하여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중국고사를 끌어들여 소부나 허유가 기산영수에 귀를 씻듯이 그림자 움직이는 못에 내려와 세속을 버린다는 작자의 의도가 들어있다. 단속사(斷俗寺)라는 시제는 뇌계의 시 속에 4수나 있다. 단속(斷俗)이란 시제를 채택한 의도는 사회시의 사실적 통속화를 단절해 서정시로 전환시키려는 의지가 들어있는 것이다. 탐미적인 인생시 몇 편을 더 예시해 본다.
자주빛 이끼로 덮인 돌 모서리를 오르고 또 올라, 눈에 가득히 보이는 계산의 빛은 푸름 이 진하다, 낙조가 흠뻑 담기어질 때 금사슬처럼 깨끗하고, 물방울이 흩어져 나는 곳에 옥과 같이 조용해진다.(登登石角紫苔封 滿眼溪山彩翠濃 落照蘸時金鎖屑 飛澇選處玉春容) <遊德峯寺西溪> - 덕봉사의 계곡 묘사가 잘 되어있고 착상이 기발하다. 위의 시나 이 시 가 다 색채감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는데 뇌계의 시는 색차감이 선명하고 정적인 장면을 동적인 활기가 넘치는 표현으로 쓰는 작법이 또한 빼어나다. 낙조가 내릴 때의 그 깨끗하고 아름다움에 물방울이 옥같이 깨끗하게 번쩍이는 신비로움을 비유법으로써 더 선명하게 쓴 한적시다.
십리에 뻗쳐 꾀꼬리와 꽃이 야단스럽고, 흔들리는 실가지에 밝은 날은 더디 가네, 바람비 는 논가는 늙은이와 속삭이고, 시서는 강아지에게나 가르치리.(十里鶯花뇨 遊絲白日遲 風 雨談耕叟 詩書訓犬兒)<近日所得> - 농촌의 한가하고 화사한 봄 풍경으로써 묘사는 대담 하고 기발한 표현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어 풍우를 벗삼는 농부, 시나 글은 강아지에 게나 가르쳐준다는 표현으로 자연에 동화되어 구태어 시서(詩書)가 나와 상관없다는 두메 풍경은 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세월은 창망하여 기러기 북으로 가고, 국화꽃 흔들리어 떨어지니 객은 남으로 온다. 옥당 은 멀어 구름과 숲이 가리워졌고, 양쪽 땅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이미 얼룩졌네.(歲律蒼 茫鴻北去 黃花搖落客南歸 鑾坡遠與雲林隔 兩地歸來鬢已斑) <登龜寺> - 쓸쓸하고 적적한 가을의 풍경을 나타낸 시다. 기러기는 북으로 가고 나그네는 남으로 돌아온다와 한편 구 름과 숲이 더불어에 양쪽 땅에서 돌아오니 가까워지는 표현의 댓구는 원심 대 구심이 대 응되는 결구로 매었다 풀었다 하는 솜씨가 실로 시성(詩聖)의 경지라 하겠다.
㈏ 풍부한 표현력
누구나가 뇌계의 시를 좋다고 하는 것은 시를 어렵게 쓰지 않고 보다 쉬운 말로 감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표현력 또한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수사법은 다양하게 응용하여 시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아무리 부드럽게 쓰려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해도 선천적인 성품과 재질이 없다면 무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뇌계의 시는 어느 것을 읽어보아도 까다롭거나 딱딱한 데가 없고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여기에 학사루의 시를 감상해보자.
구름같은 걸음걸이 꽃비녀 낀 그녀 이미 선녀가 되었는가(雲步花鈿已化仙) 붉게 파인 볼, 취옥 부서지는 음성, 구름같은 향기 일어(紅彫翠碎惹雲烟) 상한 마음에 해당화 나무에는 해가 저무는데(傷心日暮海棠樹) 정을 품고 바라보는 마음 동풍은 뜻을 전하지 않는구나(脈脈東風意不傳) - 悼亡 _
뇌계의 시는 비유법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표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재치있는 말이나 언어의 조탁(造琢)이 신선하다. 앞의 2행은 미녀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표현법이 특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뒤의 2행은 연정을 품고 있어도 그 뜻을 전하지 못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였다. 한시는 대부분 딱딱한 느낌이 들게 마련인데 뇌계의 시는 전연 다르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다. 누구나가 읽어보면 그의 시에 마음이 매혹되어 빨려들어가게 된다.
꽃향기는 쇠라도 녹일 듯 오리는 동쪽 행낭채로 걸어가고(香銷金鴨步東廂) 습기 자욱한 호수 물결은 푸른 빛을 띄는구나(渺渺湖波泛碧光)-次佔畢齋矗石樓韻중에서-
한조각의 밝은 날 아지랑이가 바로 지척에서 헤매며(一片嵐迷咫尺) 한편에서 음침한 퉁소소리 반석에 편 자리에 떨어진다(半邊陰籟滴盤筵)-假山烟嵐중에서-
난초는 죽더라도 그 향기는 오히려 멀리 있나니(蕙死香猶遠) 기러기 날아가는 그림자에 더위잡고 오르지 못하네(鴻飛影莫攀) -讀私淑齋文集중에서-
긴 구름 따르는 늙은 기러기 읊고 있는 중이라 여기고(長雲老鴈吟中料) 떨어지는 저녁해, 외로운 연기가 술취한 뒤 그림인양(落日孤烟醉後圖) -登六十峴중에서-
4수의 시를 위에서 각각 그 일부를 기록해 놓았는데 다양한 비유법이 쓰였고 시각적이며 동적인 표현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활기차고 동적인 표현, 아름답고 선명한 표현을 했지만 부드럽고 밝은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환경과 처지에 따른 잠재의식이 표출되기도 하고 불우한 처지가 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시는 자신의 내면적 표출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내재적 의식이 들어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작자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나 환경 성격 등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뇌계의 시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지만 그 절묘한 언어 구사와 표현력은 기발하고 선명하다.
㈐ 잠재의식의 표출
뇌계의 유고를 보면 이른 시기에 백발이 되었다는 것이 군데군데 기록되어 있다. 조백(早白)이면서 조로(早老)였던 사실이 마음에 부담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 시문 <대우유감(對雨有感)>에 잘 나타나 있다. ‘白髮怕臨流’ 즉 백발로 물가에 가기(흐르는 세월)가 두렵구나 하는 임종의 위기감을 느끼는 표현이라 하겠다. 안국사 의선사(義禪師)에게 보낸 시에서 「홍안에 세상티끌로 희어진 머리 다시 누구와 친하리?(紅塵白髮更誰親)」나 마천에 점필재를 따라가서라는 시 「백발에 누런빛 떨어지는 가을을 놀라지 말라(白髮休驚黃落秋)」그리고 서정처산수도에서 「귀밑머리와 모발은 원래 무뢰해서 세월이란 정녕 믿을 수 없구나(鬢髮元無賴 年華定不憑)」한 것이 다 노경의 허무감이나 위기감을 절실히 표현한 시로 평가되는 동시에 절박한 생의 위협을 초극하려는 모습이다. 조로백발의 잠재의식을 표현한 시를 몇 군데 더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寄舍弟好禮> <何處難忘酒> <題李茵盡像> <(贈僧祖繼> 등 여러 곳에서 조백(早白)에 관한 단어들이 쓰여진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두 번째의 시 ‘어느 곳에 가던지 술을 잊기가 어렵다’는 시제와 같이 그가 술을 좋아하는 시가 몇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생명을 단축시킨 원인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들은 누구나 즐겨 쓰거나 좋아하는 어휘가 있다. 뇌계에게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않아 ‘外’ 나 ‘邊’ ‘城’ 자를 많이 썼다. 즐겨 쓰거나 좋아하는 어휘나 글자는 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의식이 표출된 것으로써 그 시인의 시세계나 시풍을 암시해 준다던지 그 시의 명암, 색깔뿐 아니라 율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外’나 ‘邊’은 그 개념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관심 밖, 대상 밖의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핵심적이 못되고 중심 밖의 주변적인 존재를 나타낸다. 다시말하면 버림받았거나 소외된 존재이며 고독을 직감한 자아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뇌계는 만사(挽詞)나 세모(歲暮)같은 시간의 종말감, 사찰(寺刹)같은 고적한 공간에서 ‘外’나 ‘邊’을 구사했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조로현상의 시간성 등에 감상적(感傷的)으로 쓰면서 깊고 미묘한 맛을 더하고 인생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같다. 중심에 서서 고함치는 자신이 아니라 항상 인생의 주변에서 서성대는 자신으로 비하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벽달 몽롱하게 나그네 벼개밖에 비치고(曉月濛濛羈枕外) 차를 다리는 연기 귀밑머리 가에 간들거린다(茶煙裊裊鬢絲邊) -嚴川寺중에서-
응수의 물이 동으로 흐르는 밖에(鷹水東流外) 두류산의 저녁놀이 비치는 가에(頭流落照邊) -悼判官중에서-
저 영밖에 외로운 신하가 있어(嶺外孤臣在) 시를 읊조리다가 이미 올해도 저물었다(吟邊歲律殘) -臘雪중에서-
‘엄천사’는 잠자리에서 벗어난 곳이나 주변에서 맴도는 연기는 시인 자신의 마음이다. ‘도판관’도 자신의 마음은 중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응수나 지리산 변두리에서 맴돌고 ‘납설’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불우한 환경과 다병조로하여 50을 겨우 넘긴 박명(薄命)한 시인으로 학문과 문장이 고고했지만 인생에 대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짙었고 소외감마저 느끼는 듯 위기의식 속에 자기 존립에 허덕이는 삶을 엿볼 수 있다. 자기만 운명에 밀려나 항상 변두리에서 외로운 삶을 찾을 수밖에 없는 불운에서 단지 시문불멸(詩文不滅)의 신념 속에 살았다. ‘城’도 ‘外’나 ‘邊’처럼 정을 뿌리로 둔 말의 싹이라 할 것이니 시가 곧 언어예술이란 현대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城’이 갖는 시정(詩情)의 싹은 무엇이겠는가? 회고, 소외, 고독, 난공불락의 허무의 요새, 인생행로의 비정을 안고 있는 운명같은 인자(因子)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뇌계 시문에서 몇 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탄스럽구나 가성으로 가는 길이여(嘆息佳城路) 뜬 인생은 다 북망으로 모이는구나(浮世摠北却) - 悼秀才중에서 -
가면서 읊으니 해는 또 석양되어(行吟日又斜) 외로운 성은 바다를 비추는 저자(孤城暎海市) - 題河東縣東軒중에서 -
어찌하여 천령고을 나그네가(如何天嶺客) 낙성의 티끌에 오래 누워있는가(久臥洛城塵) - 無題중에서 -
‘도수재’에서는 무덤으로 가야하는 인생의 허무감을 나타냈고 ‘제하동현동헌’은 해질무렵에 외로운 자신의 마음이녀 ‘무제’에서는 순진한 시골나기가 부질없이 서울거리에 서성거리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뇌계가 시에서 ‘城’을 사용한 예가 많은데 그 용례를 보면 滿城, 孤城 山城, 古城 등은 뇌계 자신의 고독한 안식처를 표현였하고 洛城, 禁城, 闕城, 등은 활기찬 서울이나 궁궐을 鷄城은 계림을 倻城은 가야산을, 佳城은 묘지를 나타내었다. 시도 단순히 시(詩)라고 하지 않고 시성(詩城)이라 정감을 붙여 분위기를 변용시키려 한 의도가 보인다. 즉 성은 경우에 따라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멋이나 옛스러운 향기를 풍기고 있으며 자신의 내재적 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외나 변이 고독이나 소외감의 표출이라고 한다면 성은 자기보호나 압박감의 표출이라 하겠다.
㈑ 충효생활시
성종조의 명신록에는 뇌계를 충효청렴, 심중간엄, 고고한 시문과 뛰어난 필력으로 당대의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그가 옥당에 있을 때 성종이 달밤에 경회루 연못에서 뱃놀이를 할 때면 환관 몇 명과 뇌계만 따르게 했으며 뇌계가 숙직할 때 성종이 찾아와 이불에 솜이 비어나온 것을 보고 내시를 시켜 다른 이불을 가져오게 하여 덮어주었다. 뇌계의 노부모가 함양에 살고 있어 귀양(貴養)을 원했을 때 거창현감으로 보냈고 다시 노모봉양을 원했을 때 의성현령으로 보냈다. 성종은 보내기 아쉬워 전별연을 베풀고 친히 술을 권하면서 단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퇴경(退京)하는 그를 한강까지 발자취를 살피게 했다. 뇌계는 문경새재에서 임금을 생각하고 시 한수를 읊었다,
첫 새벽을 무릅쓰고 새재의 서릿고개에 오르니(凌晨登雪嶺) 봄뜻은 정영 몽롱한 기분이네(春意政濛濛) 북쪽으로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고(北望君臣隔) 남쪽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서로 같이 있게 되는구나(南來母子同) 창망히 밤을 새운 안개가 헤매더니(蒼茫迷宿霧) 아득히 먼 하늘로 사라져가고 있구나(迢遞倚層空) 다시 서찰을 마련코자 하는데(更欲裁書札) 시름진 하늘가 북쪽으로 가는 기러기떼 있구나(愁邊有北鴻) -北望君臣隔중에서-
이 시를 써서 벽에 붙였는데 신하가 이 사실을 임금에게 전하니 성종은 이 시를 읽고 나서 “호인의 몸은 비록 밖에 있으나 마음만은 임금을 잊지 않고 있구나.”하고 흐뭇해 하였다. 아우 호례(好禮)에게 보낸 시에도 충효를 충효를 강조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귀밑머리가 성성하게 되는 것을 참지 못하겠구나(叵耐星星鬢) 빠른 세월은 섣달 그믐이 다가오는데(光陰逼歲除) 관직에 있는 동안 충효를 함께 다하고(襟期共忠孝) 사업에는 세월을 아껴 쓰자꾸나(事業惜居諸) - 寄舍弟好禮중에서 -
그 외에도 지난 날 경연(經筵)에 나아가던 선정전(宣政殿)을 못잊어 읊은 시(詩)나 쌀, 콩 15석을 내려받은 뒤 감격해서 지은 시, 그리고 의성현령으로내려가 <14자위운>이라 해서 지은 5언고시 등 성은에 감격해서 지은 시가 많지만 다 열거할 수 없다. 그러나 스승 점필재의 가르침도 크다고 보는데 점필재의 시에서 제자에게 순순히 권면하는 시를 볼 수 있다.
시강(侍講) 때 분부한 곳이기에(侍講分符地) 진정 그대로서는 고무할만한 기회로다(眞成鼓舞機) 정히 임금님의 은혜 무거움을 힘입었으니(正賴君臣重) 조심조심해서 그 뜻에 어긋나지 않기 바란다(拳拳願莫違) - 送克己之任義城중에서 -
그러나 가장 중심된 요인은 두편의 설화(金玉非寶良臣寶에 日月非明聖主明해서 즉석 댓구를 지어 즉석 紅牌及第狀을 하사받은 詩才설화와 뇌계천에서 잉어를 잡아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서울까지 가지고 온 忠義의 내용 설화) 내용처럼 뇌계와 성종과는 당초부터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같다. 뇌계에 대한 성종의 은총이 유달랐는데 이는 뭐라해도 뇌계의 인품과 시재에 결합되어온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고 고고한 아송(雅頌)의 묘체(妙諦)를 얻었고 인생의 애환과 조화를 터득한 시인이었다. 그는 고집도 대단했던 것같다. 옥당의 화려한 내직을 버리고 귀양(歸養)한 것을 보면 홍문관수찬에서 거창현감으로, 홍문관교리에서 의성현령으로, 사헌부 장령에서 합천군수로 취임하기 위해서 끈질기게 임금에게 간청한 것이나, 영의정 윤필상에게 불윤비답(不允批答)을 전하라 했으나 벌을 받을지언정 끝까지 전하지 않아 왕명을 거역한 죄로 책벌하려 했으나 결국 용서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효를 위해서는 화려한 벼슬도 아낌없이 버렸고 도리에 어긋난 일은 벌을 받을 지언정 왕명도 거역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Ⅳ. 마무리
이제 결론을 짓고자 한다. 그의 생애는 온화하고 순수무구했으나 다병하고 조로하였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그의 가치관은 도의쌍전 충효로 일관했기 때문에 병마와 어려운 환경과 싸워야 했다. 인생 허무를 느끼며 환로가 막히고 비운과 박명의 인생이었다. 그의 시는 운명의 실존 속에 시문불사의 신념을 가지고 그가 쓴 시는 맑고 깨끗한 아송(雅頌)의 유음(遺音)이 있었다. 즉 허무감상적 시상이 조탁의 비범에서 이루어져 다정한 친밀감을 갖게 하고 비판적 사실적 사회시에서 벗어나 우미한 한적시로 한시의 정도를 걸어오게 되었고 우아한 분위기 있는 시어, 멋이 넘치는 시어로써 진실에 호소하고 생의 운명을 파고드는 시라 하겠다. 풍부한 상상력, 적절한 비유법을 써서 자유자재로 허구의 세계까지 운치있게 비상하는 감미로운 시를 쓰고 유수처럼, 바람처럼 부드럽고 꽃처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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