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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2014년3월22일 토요일(그랜드 산악회
2014년 시산제)
무럭고개 도착[09:12] - 무럭고개 출발[09:21] - 정상4.4Km지점
이정목[09:31] - 정상3.8Km지점 이정목[09:41] - 정상3.2Km지점 삼거리 이정목(무럭고개와
한국아파트.천주교)[09:54] - 삼각점(포천432; 550.1m) 삼거리(깊이울과 무럭고개)
이정목[10:01] - 정상2.5Km지점 이정목(거북바위 있음)[10:07] - 정상2.1Km지점 이정목[10:12]
- 정상1.6Km지점 이정목[10:17] - 정상0.9Km지점 이정목[10:30] - 정상0.65Km지점
이정목[10:37] - 호병골 분기점으로 이정목과 소방구조목이 함께 있는 왕산사 갈림
삼거리[10:40] - 왕방산 정자 삼거리(무럭고개와 어룡동 선광사)로 헬기장이 정자
바로 위에 있음[10:46] - 헬기장[10:48 ~ 11:10 ; 점심] - 왕방산 정상(정상 내림길
길목에서 오지재고개와 국사봉으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길 주의)[11:12~11:16]
- 왕방이고개(소방구조목 1.3 깊이울분기점 ; 국사봉2.3Km, 깊이울저수지2.9Km지점)[11:27]
- 깊이울 계곡 이정목(방향 표시판 없음; 정상2.1Km지점)[12:00] - 정상2.7Km / 깊이울1.1Km지점
이정목[12:14] - 깊이울만남교[12:17] - 소방구조목(1.5 깊이울저수지 ; 정상2.9Km)
있는 자그마한 광장[12:20] - 깊이울교[12:23] - 깊이울 저수지 뚝방[12:29] - 메아리산장[12:34]
무럭재 : 「무럭재」는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와 신읍동[신읍리] 사이에 가로놓인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成汝完)[1309~1397]을 찾아왔다고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訛傳)되어 무럭재로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성여완의 본관은 창녕이고 호는 이헌(怡軒)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의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고사하였다고 한다. 1984년과 1997년 포천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포천 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간행한 『포천의 설화』에도 각각 실려 있다. 고려 말엽이었다. 해주, 충주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을 거쳐, 창녕 부원군에까지 봉해졌던 성여완이, 난세를 피하여 이곳 왕방산(王方山) 아래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이성계가 등극하자, 그가 지금의 신북면 심곡리와 신읍리 사이에 가로놓인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씨 조정에 입조(入朝)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이 고개를 예를 갖추어 찾아온 고개라 하여 ‘문례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재는 문례현의 와전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성여완이 우거했던 왕방산은 왕이 찾아온 산이라 하여, ‘왕방산(王訪山)’이라는 한자 표기가 옳을 테지만, 이조의 모든 문헌에는 이태조를 격하하는 것을 기하여, ‘방(訪)’자 대신 음이 같은 ‘방(方)’자로 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설도 있다.
또 일설엔 근년에 장독곡이란 분이, 어느 날 문례현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후유! 이 고개가 아직도 얼마나 남았을꼬? 아니 이 고개 이름이 무슨 고개인고?” 하면서 자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물어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참고자료;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 보면 ‘살아서는 포천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가야 양반’이란 말이 있어 포천에는 빼어난 인물들의 흔적이 많다고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와 영의정을 지낸 유순, 양사헌, 이덕형, 대한제국 말의 최익현, 이항복이 그들이라 한다. 또한 위의 무럭고개 유래에서 언급했던 성여완은 그 시절에 89세까지 천수를 누렸고, 그 아들 성석린은 86세까지 장수하였다고 포천 고을의 사찬읍지인 <견성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듯 포천 땅은 복 받은 곳이고, 산 높고 골 깊은 왕방산은 예로부터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던 명산이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산림청 홈페이지 ‘숲에 ON' / 포천시 홈페이지 /
네이버 지식백과-
2014년 3월22일에 도착한 무럭고개에는 問禮峴藥水(물어고개 약수)란 석비가 고갯마루 약수터 입구에 있는 것을 보았다.
왕방산(王方山) :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동·신북면과 동두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포천시의 진산으로 불려온 왕방산(732.7m)은 많은 전설과 유래가 전하는 명산이다. 신라 시대인 872년(헌강왕 3)에 도선(道詵) 국사가 정업을 닦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불렀고, 그 절을 왕방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왕방사지에는 30여 년 전에 청매화상(靑梅和尙)이 보덕사[지금의 왕산사]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다가 환궁하는 도중 형제의 난을 접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해 체류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왕방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조선 태종이 어머니인 신의 왕후 한씨를 모시고 재벽동에서 살 때 이곳에서 늘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방산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속세를 떠나 산중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했다 하여 국사봉이라고도 했는데 왕이 항상 이색을 생각하며 이 산을 바라봤다 하여 왕망산이라 부른 것이 왕방산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지승(地乘)』「영평현(永平縣)」에서는 ‘포천 왕망산(抱川王望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왕방산의 한자 지명은 그동안 왕방산(王方山), 왕방산(旺方山), 왕방산(王訪山)으로 혼용되었는데, 2009년 8월 포천시 지명 위원회에서 왕방산의 한자 지명을 통일하고자 심의 회의를 거쳐 ‘王方山’으로 결정하였다.
-출처; 디지털포천문화대전-
왕방산은 한북정맥의 지맥이랄 수 있는 천보산맥의 한 봉우리이다. 포천시에서 왕방산 정상에 팔각정을 설치해 놓아 포천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포천의 많은 산 중에서도 왕방산은 포천시의 진산(鎭山)으로 불리운다. 왕방산으로 불리운 유래를 찾아보니 정말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한문 표현만 보아도 왕방산(王方山), 왕방산(王防山), 왕방산(王訪山)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일(日)자를 덛붙여서 왕방산(旺方山)이라고 뜯어고치기까지 하였던 산이다. 지금은 포천시 지명위원회 결정에 의해 왕방산(王方山)으로 통일되었다. 왕방산으로 불리우게 된 유래 중에 가장 오래된 유래는 신라 말(872년) 헌강왕이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 지금의 보덕사를 친히 방문했다 하여 산 이름을 왕방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왕방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온다고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신라 말 극심한 내란이 전개되고 있어 왕이 극도로 혼란했던 변경의 포천을 방문했다는 것이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보다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이 지역의 지지세력을 위무하기 위해 자주 다녀갔기에 궁예가 왔던 산이란 뜻으로 왕방산이라 불렸을 것이란 견해도 있느데 이 전설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다른 전설로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속세를 떠나 왕방산에 들어와 은신해 있었기에 고려왕이 항상 이색을 생각하며 이 산을 멀리서 바라보았다고 하여 왕망산으로 불리다가 후에 왕방산으로 변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회자되고 있는 유래가 있으니 <포천군읍지>와 <견성지>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사냥을 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오와 추석에 강무(임금이 참관하는 무예시범)를 했다 하여 왕방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함흥에 살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왕자의 난 소식을 듣고 비통한 마음을 달래고자 이 산을 찾았다는 다른 유래도 전해진다. 왕방산 주변에 이와 연관된 지명으로 왕숙천, 팔야리(이성계가 한양에 들어가기 전에 여덟 밤을 지낸 마을) 등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전설들이 사실 여부를 떠나 산 높고 골 깊은 왕방산의 신령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왕방산 주변에는 선단(仙壇)과 어룡(魚龍)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마을 뒤편의 왕방산에 큰 바위가 있어 주민들이 이곳에 제단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신선이 내려온다고 믿어 선단(仙壇)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어룡(魚龍)은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yooyh54/519 맨발나그네 산행기-
깊이울계곡 : 산세가 험하고 깊이가 깊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깊이울계곡은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에 있으며, 왕방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은 맑고 수심이 깊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09:21] : 물어고개 약수터에서 도로 건너 산자락을
향해 출발하여 산비알을 오르기 시작한다.
[09:22] : 신비알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소방구조목[2.1 무럭고개 ; 정상4.4Km]을 만난다. 그 옆에 왕방산등산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09:30] : 통나무 의자가 있는 쉼터 봉우리에 도착한다. 이어서 내림길을
내려가고
[09:31] : 정상 4.4Km / 무럭고개0.4Km를 알리는 이정목을 지난다. 이정목과
소방구조목의 거리표시기록이 0.4Km의 차이가 난다.
[09:33] : 다시 오른 봉우리에서
잠시 평탄한 등로를 진행하다가 잠시 오르니
[09:35] : 통나무의자가 있는 쉼터
봉우리에 닿는다. 잠시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
[09:38] : 봉우리에 닿고 내려가서
다시 오른
[09:40] : 봉우리에 닿는다. 이어진 내림길이면서 평탄한 등로에
[09:41]
: 정상3.8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이 있다.
[09:47] : 또 봉우리를 지나고
[09:54]
: 또 봉우리를 오르니 한국아파트와 천주교에서 오르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로 정상
3.2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과 의자가 있는 쉼터이다. 계속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10:01]
: 삼각점(포천432)이 있는 550.1m 봉우리로 삼거리 갈림길이다. 여기서 깊이울계곡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다.
[10:06] : '성균관대학교 야외실험중'이란 팻말이 땅바닥에
있는 봉우리를 올라 이어지는 등로에
[10:07] : 정상2.5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을
만나고 곧이어 오름길에 거북바위를 지난다. 거북바위을 지나 봉우리를 넘어가도
되고 거북바위 못미쳐 좌측으로 우회하여도 되나 봉우리를 넘는데 힘든 곳이 없다.
[10:12]
: 다시 오르는 봉우리에 서있는 이정목은 정상2.1Km 지점을 알리고 있다. 내림길인
둣하면서 다시 오른
[10:14] : 봉우리을 지나 언덕을 넘듯이 내려간 등로를 진행하여
오르니
[10:16] : 또 봉우리에 오르니 이곳은 쉼터 역할을 하는 듯 공터가 있다.
이어 봉우리 사면길을 좌측으로 진행하니
[10:17] : 정상1.6Km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을
만난다. 이어 봉우리를 오르니
[10:22] : 다른 산줄기로 이어지는 능선 갈림길인데
통나무로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왕방산 가는 길은 좌측 능선 경사로를 계속 진행하면
된다.
[10:30] : 정상0.9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을 지나 이어지는 오름길은
[10:37]
: 정상0.65Km 지점의 이정목을 지난다. 이어서 올라선 봉우리는
[10:40] : 호병골분기점으로
왕산사 갈림 삼거리이다. 이정목(정상0.4Km)과 소방구조목(정상0.3Km)이 함께 있는데
역시 거리표시가 차이난다. 왕산사까지도 이정목은 1.7Km, 소방구조목은 1.2Km를
표시하고 있다. 계속 오르고
[10:43] : 도착한 봉우리에는 통나무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10:44] : 목책에 안전로프로 통행로를 조성하여 헬기장으로 바로 오를
수 없게 등로를 유도하고 있는 봉우리에 접근하여 시설물따라 좌측으로 돌아가니
[10:46]
: 정자와 삼거리를 만나는데 어룡동 선광사에서 왕방산으로 오르는 등로이다. 정자에
올라 포천시내를 잠시 둘러보고
[10:48] : 헬기장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식사를
한다.
[11:10] : 헬기장을 출발하여 잠시 오르니
[11:12] : 왕방산 정상이다.
정상석 옆에 삼각점이 있고 조망이 좋다. 119구급함과 소방구조목이 함께 있고, 무인산불감사카메라
시설물도 있다. 동두천시에서 설치한 왕방산 정상 안내도도 있다. 정상석에는 해발
737.2m로 표시되고 삼각점은 736.4m로 표시되어 있다.
[11:16] :
왕방산에서 주변을 여유있게 둘러보고 국사봉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내려서는데 이정목이
오지재고개(3.4Km)와 국사봉(2.8Km) 삼거리 갈림길임을 알리고 있다. 국사봉 방향으로
등로를 잡아 내려가니
[11:27] : 왕방이고개로 불리는 안부에 도착한다. 소방구조목이
현위치를 깊이울분기점으로 표시하며 국사봉(2.3Km)과 깊이울저수지(2.9km) / 왕방산정상(0.5Km)를
알리고 있다. 깊이울 계곡으로 하산하려면 좌측 계곡 하산길로 진행해야 하며, 국사봉을
들려서 깊이울로 하산하려면 진진하여 국사봉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깊이울계곡으로
하산하는 내림길은 급경사와 미끄러움으로 긴장도를 높여준다.
[11:48] : 너덜길
옆에 돌탑이 있는 곳을 지나고
[11:50] : 계곡 건너에 등산로를 로프로 막아놓은
곳에서는 계곡 물길의 바위들을 이용하여 내려간다.
[11:53] : 위험표시판이 세워져
있는 지점을 통과하고
[12:00] : 방향표시판이 없는 이정목 기둥만 있는 곳을
지나
[12:01] : 정상 2.1Km를 표시한 표시판이 숲길 옆에 버려져 있는 지점을
지나 계속 내림길을 이어가니
[12:13] : 첫 번째 만나는 유원지 식당을 지나고
곧 이어
[12:14] : 이정목을 만나는데 정상2.7km / 깊이울1.1Km를 표시하고 있다.
[12:17]
: 깊이울 만남교를 건너고
[12:20] : 넓은 공터에 화장실과 주차장과 식수대가
설치된 곳에 소방구조목[현위치1.5 깊이울저수지 ; 정상2.9Km]이 있다.
[12:23]
: 깊이울교를 건너 도로따라 진행하니
[12:24] : 깊이울저수지 상부에 닿고, 도로따라
계속 진행하여
[12:29] : 깊이울저수지뚝방에 조성된 지점을 지난다.
[12:32]
: 도로 좌측으로 신당비슷한 당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니
[12:34] : 도로 우측으로
깊이울캠핑장과 메아리산장 간판이 보인다. 오늘의 시산제를 겸한 산행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