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고 시대적 변화를 실감하면서 때로는 지나간 추억으로 감상에 젖곤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우리 사회는 극도의 혼란과 빈곤으로 온 국민이 어려웠으며 정치적으로는 남과 북이 갈라져서 이념 대립으로 너무나 혼돈의 시대를 거쳤으며 해방의 감격에 젖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 역사를 돌아보면 이조 오백 년 동안 서민들은 폭정에 고혈을 착취당하고 일제 치하에서는 자유를 구속당하며 식민지 생활을 하느라 수많은 목숨과 재산을 잃기도 하였는데 해방의 기쁨은 잠시,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으니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까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배고픈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생 문제를 생각하면 완전히 야만인 수준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화장실이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었지만 위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너무나 원시적이었는데 행랑채 저 뒤쪽 작은 구석에 둥근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문은 거적을 하나 걸쳐서 겨우 앞을 가릴 정도에 볼일이 있어 화장실에 가면 입구에서 미리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 안에 사람이 있으면 같이 으흠! 하고 응답을 하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들어가면 밑이 뻥 뚫린 그 위에 나무 가지나 널빤지를 대고 겨우 두 발을 올려놓을 수 있게 해놓았는데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니 겁이 많은 사람이나 아이들은 무서워서 볼일도 제대로 못 보는 경우가 있었고 볼일을 보고는 지푸리기를 뭉쳐서 밑을 닦았느니 얼마나 불편하고 비위생적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특히 자다가 볼일을 보고 싶으면 작은 것은 요강에 보지만 큰 볼일은 화장실에 가야하니 깜깜한 밤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 마당을 건너 한참을 가서 볼일을 보고 오면 잠은 멀리 도망을 가고, 특히 추운 한겨울에서 추위에 온 몸이 떨려서 화장실 한 번 갔다 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모른다. 주변에서 흔치는 않지만 화장실에 빠져서 똥독이 올라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욕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설 명절이 되면 물을 데워서 부엌에서 추위에 떨면서 목욕을 하는 것이 유일하였고 세수도 겨울에는 물을 데워서 세수 대야에 물을 조금 받아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온 식구가 아침저녁으로 수건 하나로 다 닦으니 얼마 안 되어 꼬질꼬질하게 까맣게 때가 묻어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렇게 살았고 여름이 되면 냉장고가 없으니 밥과 음식이 쉴 때가 허다하였는데 귀한 곡식으로 한 밥을 버릴 수가 없어서 찬 물에 씻어서 먹기도 하고 다시 밥을 하는 솥에 넣어서 같이 삶아 먹기도 하였으며 여름에 조금 시원하게 먹고 싶을 때는 집 근처 깊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찬 물에 담궜다가 먹기도 하였고 겨울에는 일 나간 사람의 점심밥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보호하려고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놨다가 낮에 먹으려고 보면 개미가 새까맣게 밥 속에 들어가 있어서 먹기가 싫은데 어른들은 개미를 먹으면 힘 좋아진다며 그냥 먹게 하여 배가 고프니 안 먹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억지로 울며 겨자를 먹듯 개미와 밥을 같이 먹었고 겨울에는 주식이 고구마로 김치 한 사발 놓고 고구마 한 입에 짐치 한 줄기로 배를 채우곤 하였다.
봄이 되면 보릿고개라 웬만한 집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먹거리를 찾아서 산으로, 들로 헤매며 나물을 뜯고 뿌리는 캐었고 바다에서는 조개와 굴, 파래 등을 채취하여 힘들게 보릿고개를 넘었다.
그런데 어려운 생활 중에도 제일 문제는 몸이 아플 때이다. 어릴 적에는 건강관리를 할 줄도 모르고 제대로 못한 나머지 누구나 치아는 벌레가 먹어서 시커멓게 썩고 때로는 아파서 밤새 찬 물을 머금고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배가 아프면 엄마가 배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 배를 잘 주무르는 할머니한테 가서 배를 주물러서 아픈 배를 달래기도 하고 나는 눈에 핏발이 서서 불편한데 병원에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이웃 동네 할머니한테 치료를 받은 기억이 나고 고등학교 시절 옴이 올라서 온 몸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는데 쌀을 씹어 가루를 내어 발랐다가 더 번지고 성해져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어른들 말에 옴은 깨끗하게 해야 낫고 옻은 더럽게 해야 낫는다는 말이 있는데 옻이 오르면 쌀을 씹어서 바르는 민간 처방을 했는데 옴에다 쌀을 씹어서 발라 완전히 반대로 된 처방을 하였으니 더 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객지에서 무슨 병으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게 돌아가셨고 큰 형님은 내가 5학년 때 원인도,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 한 번 못 가보고 방에 누운 채로 그대로 숨을 거두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럽게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되어 오랫동안 그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었다.
봄이면 꼴망태 메고 들로 다니며 꼴을 베어 소나 염소, 토끼를 먹이고 산으로 다니며 산새 알을 찾아서 터뜨리는 재미로 온 산을 헤매곤 하였고 바구니를 들고 나와서는 미나리를 비롯한 봄나물을 캐어 반찬을 하였는데 밥보다는 나물을 많이 무쳐서 배를 채우곤 하였다. 고전에 선비가 읊조리던 싯구가 생각난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하는 유유자적한 선비의 삶을 우리는 어릴 때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만 해도 위생관념이라는 것도 몰랐고 관심도 전혀 없었으며 어린 우리들은 여름이면 보에 가서 멱을 감거나 웅덩이에서 물놀이를 하면 완전히 흙탕물이 된 좁은 장소에서 입술에 퍼렇게 되도록 몇 시간씩 놀다가 해가 기울어지면 몸을 헹구지도 않은 채 옷을 입고 집으로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저녁을 먹고는 그냥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될 정도였지만 그 때는 다 그랬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여름이 되면 밤낮 베잠방이 하나로 여름을 보내는데 온 몸에 땀띠가 나서 가렵고 심지어는 곪아서 누런 고름이 차기도 하고 밥을 먹거나 몸을 조금 움직이면 땀이 비 오듯 하고 땀띠가 띠띠 쏘아서 괴롭기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어떤 아이들은 온 얼굴에 노란 고름이 생겨서 보기도 민망할 정도였고 겨울에는 보온이 잘 안 되는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니니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 가면 교실은 마루바닥이라 신발을 벗어야 하니 구멍 난 양말에 발이 얼마나 시리든지 두 발을 서로 비비고 포개며 추위를 달래기도 하고 쉬는 시간이면 밖으로 나와서 건물 벽에 기대어 볕 쪼임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추위를 쫓아보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것이 생활 그 자체였다. 쉬는 시간에 잠깐 볕 쪼임을 하면 6학년 주번이 다니면서 볕 쪼임을 못하게 쫓아내면 잠시 벽에서 떨어졌다가 주번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벽에 붙어서 추위와 싸우던 어린 시절은 아련한 추억으로 지금도 그래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언 80년, 내 나이가 80을 눈앞에 두고 보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데 참으로 감회가 새롭고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게 된다. 성경 말씀에 “사람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나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한 말씀이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은 나이 탓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보니 몸을 점점 쇄약해지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오늘은 이 병원으로 내일은 저 병원으로 전전하며 조금씩 손을 보지 않으면 힘들 정도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도 한 사람씩 곁을 떠나가고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기는가 하면 심심치 않게 부고를 받게 되니 이생의 삶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감상에 젖기도 한다. 24년 벽두에 다리 골절로 지금까지 고생하며 지내는 중에 그 사이 병원에 다닌 것을 정리해보니 정형외과에 7번. 치과에 12번. 내과에 3번. 피부과에 3번. 이비인후과에 1번 모두 2번을 다녔으니 거의 매일 같이 병원에 다니면서 봄부터 여름에 이른 것 같다.
95살이 된 장모님을 보니 일찍이 혼자되어 딸 아들 잘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고 혼자 지내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니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여 보호대상 3급을 받아 요양사가 일주일 중에 5일을, 하루에 3시간씩 보살펴 주니 생활에 많은 도움은 되지만 하루 24시간 중 세 시간을 제하고 혼자 생활을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힘든 일이 아니요 식사와 화장실 가는 문제가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 앞에 장사가 없고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양사가 휠체어에 태우고 바깥나들이를 할 때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고 여자 몸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들어서 휠체어에 태우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내가 휠체어를 타보니 더욱 실감을 하면서 요양사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기도 하였고 결국 많은 생각과 고민 중에 요양원으로 보내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다. 일단 보호자가 항상 옆에 있고 같은 노인들이 있으니 심심치도 않고 가족 된 입장에서는 한결 마음이 놓이고 편하다.
내가 만약에 몸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게 되건나 몸져 눕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을 예상하는 것 자체가 노인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몸만 불편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혹시 치매라도 걸리면 주변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무서운 생각까지 드는 건 나만의 걱정일까?
흔히 하는 말로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고 하는 말이 살아갈 수록 더욱 실감이 나고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은 나만일까? 진실로 먼저는 내 자신을 위해서지만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건강관리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특히 이번에 다리 골절로 오랫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생을 하다 보니 앞으로 나이 들면서 더욱 건강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오래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길지 않은 남은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서 밤낮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