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 사촌 김광수 향나무
경상북도 의성(義城)은 삼한시대에 조문국(召文國)이었다. 의성 김씨의 본관이고 집성촌이 많은데 의병과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에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을 의병장으로 삼아 왜를 섬멸하다 1593년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일제강점기 전국 유림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성균관대 설립자 김창숙도 의성김씨이니 의성은 말 그대로 의로운 고을이다.
또 안동 김씨 집성촌인 이곳 점곡면 사촌리는 의성 의병의 구심처였다. 이 마을 안동 김씨는 고려 명장 김방경의 후손이다. 1392년 김방경의 5세손 김자첨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에 와 중국 동한시대 선비 서치를 동경하여 그가 살던 사진촌의 이름을 빌렸으니 오늘의 사촌이다.
그 뒤 김자첨의 손자 김극해는 성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례현감 등을 지냈고, 김극해의 아들 김광수는 유성룡의 외조부이다. 그러니까 유성룡이 태어난 마을이다.
이곳에 연산군 7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김광수(1468~1563)가 심은 향나무 만년송이 5백여 년 세월을 넘겨 지금도 푸르름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또 여기 김광수의 증손자 김사원(1539∼1601)이 자신의 호를 따 1582년에 세운 만취당이 있다. 사찰, 궁궐을 제외하고 개인 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도산서원 이황의 제자였던 김사원은 임진왜란에 사림의 추대로 의병의 보급 관련 책임자인 의성정제장이 되었다. 두 동생 김사형과 김사장은 곽재우 의병이 되어 화왕산성에서 싸웠다.
왜란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의병활동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김사원에게 정3품 절충장군과 종4품 행 용양위 부호군을 내렸다. 하지만 김사원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처럼 이들 사촌마을 만취당의 후손들은 1627년의 인조 때의 정묘호란, 영조 때의 1728년 무신란인 이인좌의 난, 그리고 세월이 흘러 1895년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때에도 망설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 을미사변 때 만취당의 후손인 김상종은 의병대장이 되어 소모장 김수욱, 선봉장 김수담, 관향장 김수협 등 일가와 함께 분연히 떨쳐 일어나 붓 대신 총칼을 들었다. 62일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김수담, 김수협이 전사하였다.
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사촌마을에 불을 질렀는데, 이 만행으로 영남의 와해(瓦海)라 했던 기와집이 모두 연기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취당이 화마를 피한 것이다.
이들 만취당 후손들의 가훈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無自欺)’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일어나고 이웃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함이니 의성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이다. 백성들이 만취당의 종가 창고를 의로운 창고인 ‘김씨 의창’이라 부른 연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한 만취당 김사원의 일화이다. 김사원은 여성이나 걸인이 오면 꼭 의관을 정제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하러 온 사람을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곡식을 꿔준 뒤 반드시 ‘차용증’을 받았으나 이는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느 날 한 백성이 곡식 대신 토지문서를 가져오자, 차용증을 태워버린 뒤 ‘마음고생이 심했겠다’며 위로했다고 한다.
이 의성의 사촌마을 만취당을 지키는 5백여 살 향나무 만년송을 바라보니, 남북으로 가르고 동서로 나누고, 나는 잘했는데 너희들이 못했다는 세태가 답답하고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