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번에는 사전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찾아보자. 다음(daum) 백과사전에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초기 불교는 선정, 교학, 계율이 중요한 수행법이었다. 중국불교에서는 선정과 교학이 대립하게 되었다. 한국도 중국불교를 수입한 이래 고려중기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선종의 승려인 지눌은 선정과 교학이 결코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 않으며, 선(禪)의 입장에서 교(敎)를 포용하는 정혜쌍수 입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화엄교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엄종의 종교적 수행을 뒷받침하는 이론과 선불교도들의 수행이론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은 것이다. 지눌은 화엄교학의 성기설(性起說)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종의 근본 가르침과 같다는 것을 증명했고, 화엄교학의 중생과 부처는 같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상(相)과 용(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 선에 대한 통찰력을 강화·심화시킬 수 있었다.
위의 사전은 초기불교의 계(戒), 정(定), 혜(慧)를 각각 계율, 선정, 교학으로 보아, 혜(慧)를 중국의 화엄교학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붓다가 말하는 혜(慧)는 위빠사나 관찰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에 대해 밝게 이해해 들어가는 것인데, 중국불교를 이어받은 고려 보조지눌 스님은 혜(慧)를 화엄교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선정과 지혜는 서로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定慧)는 본디 계·정·혜의 3학으로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 후세에 선을 닦는 자가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敎)는 지식문과 이론문이고, 선(禪)은 실천문이다. 지식과 이론을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한 안내로 본다면, 선은 그것을 실천, 체험하는 방편이다.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지도이념으로 하여, 그릇된 폐단을 없애, 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고 표현했다. 이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보조국사 이후 우리나라 선종의 중요한 수행법이 되었다.
위의 사전도 역시 혜(慧)를 교학으로 해석하고, 정(定)을 선(禪)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는 해석일까? 그들은 정혜쌍수의 의미를 모르고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은 ‘선과 교학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의미로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지눌 스님도 정혜쌍수의 의미를 몰랐거나 그 의미를 왜곡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지눌 스님은 정혜쌍수의 의미를 몰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중국 선불교를 이어받은 한국불교에는 예나 지금이나 지혜의 개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보조지눌 스님은 “定(정)은 본체이고, 慧(혜)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慧(혜)는 定(정)과 분리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定(정)은 慧(혜)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지눌 스님도 定(정)과 慧(혜)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 하고, <육조단경> 유의 중국 선어록을 읽고,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에는 지관겸수(止觀兼修)는 그 용어자체가 없고, 그 대신 교관겸수(敎觀兼修)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사용하고 있고, 정혜쌍수는 그 개념을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혜쌍수(定慧雙修)는 왜 의미가 왜곡되었나?
지관겸수(止觀兼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부처님 선(禪)수행 방법의 핵심을 말해주는 용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용어의 의미가 왜곡되어 있는가? 그것은 중국 선불교를 이어받은 한국불교에는 위빠사나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중국 선불교에는 위빠사나 개념이 없는가? 그것은 중국 선불교가 석가불교와 깨달아야 하는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석가불교에서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깨달아야 하고, 중국 선불교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해 무상, 고(苦), 무아의 반대개념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나, 진아(眞我)를 깨달아야 한다. 중국 선불교에서는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나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매 순간 생멸변화 하는 오온에 대한 관찰은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중국 선불교는 오온의 생멸변화를 관찰하는 위빠사나의 관찰법이 필요 없게 되었고, 관찰과 관찰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지혜[慧]의 개념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의 혜(慧)를 화엄교학으로 해석하여, 정혜쌍수를 ‘선과 교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의 개념을 없애버린 중국 선불교가 정혜(定慧)의 의미를 크게 왜곡한 것이다.
또 부처님 수행법인 지관겸수(止觀兼修)를 교관겸수(敎觀兼修)로 바꿔치기 하여, 지관(止觀)의 개념을 흩뜨리고, 교관(敎觀)에서 관(觀)을 선(禪)으로 해석하여, 관찰의 개념을 없애버렸다. 교관(敎觀)에서의 관(觀)은 선(禪)이 아니라 관찰이고, 지(止, 멈춤) 또는 정(定, 선정)이 선(禪)이다. 그래서 ‘교학과 선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려고 하면, ‘교선겸수(敎禪兼修)’라고 하는 것이 맞다. 여기서 선(禪)은 선정(禪定)의 준말이고, 선정은 관찰과 더불어 부처님 수행방법의 양대 축을 이룬다.
지관겸수(止觀兼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이와 같이 의미왜곡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국불교는 중국 선불교를 받아들인 까닭에 석가부처님의 불교와 근본사상이 다르고, 그에 따라 수행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관찰과 지혜는 불교의 눈이다. 관찰과 지혜의 개념을 없애버린 중국 선불교는 맹인(盲人) 불교이고, 헛소리 불교이고, 헤맴의 불교다.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무슨 뜻인가?
그럼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선정과 지혜의 개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그 둘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정혜(定慧)에서 정(定)은 선정(禪定)의 준말이다. 또 선정은 ‘禪(선)’과 ‘定(정)’이 결합된 단어다. 또 한자 ‘禪(선)’은 볼 시(示 watch)와 홑 단(單 one)이 결합된 글자로서 ‘줄곧 한 대상을 지켜본다’는 뜻이고, 定(정)은 ‘고정(固定)’의 의미로,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고, 줄곧 한 대상에 고정돼 있음’을 의미한다. 즉 선정은 한 대상을 지켜봄으로써 그 대상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정혜(定慧)에서 혜(慧)는 ‘지혜’라는 뜻이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을 통하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들의 작용과 그 특성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이다. 즉 지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관(內觀)의 눈이다. 지혜의 반대개념은 無明(무명), 無知(무지), 어리석음[痴], 자신에 대해 깜깜하게 어두운 것, 痴暗(치암), 昏沈(혼침) 등이다.
定慧雙修(정혜쌍수)와 止觀兼修(지관겸수)는 같은 말이다
定慧雙修(정혜쌍수)와 止觀兼修(지관겸수)는 같은 말이다. 定慧雙修(정혜쌍수)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말이고, 止觀兼修(지관겸수)는 ‘멈춤[止]과 관찰[觀],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定慧雙修(정혜쌍수)에서 定(정)은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마음을 한 대상에 고정(固定)시켜, 선정(禪定)에 든다는 뜻이고, 혜(慧)는 지혜의 준말로서, 그렇게 선정에 든 상태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觀]하여, 그 특성을 밝게 알아간다는 뜻이다. 지혜와 관찰은 같은 말이다. 관찰을 통하여 지혜가 밝아지고,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止觀兼修(지관겸수)에서 止(지), 즉 멈춤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마음을 “나”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에 멈춘다[stop]’는 뜻이다. 觀(관)은 그렇게 멈춘 상태에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즉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멈춤[止]은 선정을 의미하고, 관찰[觀]은 지혜를 의미한다. 온갖 대상을 쫓아다니는 마음을 한 대상에 멈춰야만 선정에 들 수 있고, 선정에 들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해 들어가, 그 특성에 대해 밝게 알아가야만 반야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댓글, 감사, 반가운 댓글입니다. 모든 분들 추석명절 의미있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